온 몸이 뻐근하다. <태백산맥> 종주를 막 끝냈다. 그간 이 10권의 책을 '종주'하느라 취침시간을 후딱 넘겨버리기 일쑤였다.
예전에 이 책을 처음 읽었을 때는 그렇지 않았던 것 같은데, 두 번째로 읽은 이번에는 염상진이 최후를 맞이하는 10권의 마지막 대목에서 그만 목이 메이고 눈물이 났다. 다시 보면 볼수록, 세월이 흐를수록 더 몰입해서 볼 수 있는 책이 바로 <태백산맥>이다.
예전에 이미 읽었던 <태백산맥>을 다시 손에 잡게 된 이유는 바로 얼마 전에 있었던 전남 벌교로의 짧은 여행 때문이었다. 큰 아들녀석이 <태백산맥>을 읽고 있길래 책 내용을 같이 이야기하다가 문득 떠오른 것이 벌교 여행이었다. 아내도 이미 읽었고, 작은아들도 만화로 <태백산맥>을 본 적이 있다고 했다.
벌교 소화다리에 서니, 과거가 현재가 된다
갈 때까지는 별 기대가 없었다. 그냥 오랜만에 바람이나 쐬고 오자는 것이었다. 그런데 막상 벌교에 가니, 예전 <태백산맥>을 읽었을 때의 그 감흥이 새롭고 솟아나는 것이었다. 그 당시 좌익과 우익의 대립으로 총살당한 시체들이 아래 갈대밭과 갯벌에 즐비했다는 소화다리에 서니 그 끔찍했던 과거가 갑자기 현재로 다가온 듯한 느낌이었다.
벌교초등학교 운동장에 서니 계엄사령관 심재모 중위를 앞세운 계엄군이 씩씩하게 운동장으로 진군해 들어오는 광경을 나도 모르게 상상하게 되었다. 바로 옆의 소설 속 남도여관은 비록 간판은 없지만 예전의 낡은 모습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었다. 토벌대로 와서는 편안히 남도여관에 퍼질러 있다가 심재모에게 호통을 당하고 쫓겨나는 장면이 연상되었다.
물론 소설이 실화는 아니지만, 벌교에는 <태백산맥>의 모든 것이 있었다. 길가는 노인에게 '김범우의 집'이 어디냐고 여쭤보면 아무렇지도 않게 동네 위 큰 기와집을 가르쳐주고 그 집에 살던 사람들에 대한 친절한 설명도 아끼지 않는다.
지금은 농민상담소로 바뀌었지만, 예전 그대로의 모습으로 자리잡고 있는 '금융조합' 앞에서 쭈뼛대고 있으니 옆 집 할머니가 괜찮으니 들어가서 구경하라고 한다. 벌교 철교 앞에 서니 염상구가 주먹패의 패권을 두고 '땅벌'과 마지막 한판을 겨루기 위해 달려오는 기차 앞에 서있는 듯하다.
짧은 벌교 여행에서 돌아와서는 <태백산맥>의 열병이 도졌다. 예전에 읽었던 그 가물가물한 기억들만으로는 직접 가서 본 그 장소들의 의미와 감흥을 충분히 느끼기가 힘들었다. 그래서 다시 손에 <태백산맥>을 잡았고, 일단 손에 잡으면 10권까지 다 읽기 전에는 손에서 놓을 수가 없을 것임은 자명했다. 그래서 두 번째의 <태백산맥> 종주가 이제 끝났다.
'좌익'은 헛되게 죽었을까
<태백산맥>은 오늘날 우리의 현실과 어떤 관계가 있는가? 사실 이 책을 읽다보면 자신도 모르게 소설 속의 '좌익 세력'에 동조하고 있는 자신을 발견하고 놀라기도 한다. 책 속의 그 좌익들은 역사의 실패자들인가? 그들의 죽음은 헛된 것이었을까?
또한 우리 민족은 이제 <태백산맥>의 비극과 고통에서 벗어난 것인가? 세계10대 경제대국이 될 만큼 잘사는 나라가 되었고, 오랜 독재정치를 타도하고 민주사회가 되었지만, 과연 모두가 '항꾼에(함께)' 잘사는 살기 좋은 세상이 되었다고 말할 수 있을까? 이 모든 물음이 해결되기까지는 아직 더 많은 역사가 필요한 것이 아닐까라는 생각을 한다.
사실 <태백산맥>에는 무수한 사람들이 동시다발적으로 등장하기 때문에 누가 과연 주인공인가가 궁금증을 불러일으키기도 했는데, 언제가 <태백산맥>의 작가 조정래가 방송에 나와 <태백산맥>의 주인공이 누구냐는 물음에 하대치가 주인공이라는 암시를 한 적이 있다. 마지막까지 살아남았지만 쓸쓸히 떠나간 하대치에게는 길남이와 종남이라는 두 아들이 있었다.
조정래의 또다른 대하소설 <한강>에서는 유일민과 유일표라는 형제가 주인공으로 나온다. 월북한 아버지를 둔 바람에 공부 잘하고 똑똑한 이들 두 형제는 남북간의 이데올로기 대립과 빨갱이 사냥의 희생물이 되어 정상적인 삶을 살지 못하게 된다.
바로 <태백산맥>의 길남이, 종남이의 고통은 <한강>에서 유일민과 유일표의 고통으로 계승되어 대한민국의 산업화 시대를 살아간다. 고통과 희생은 계속 이어져 왔다.
항꾼에 잘 사는 세상, 아직 멀었다
<태백산맥>은 과거의 이야기가 될 수 없다. <태백산맥>이나 <아리랑>, <한강>에는 항상 그 때의 현실에서 고통받고 패배하는 우리 민중과 민족의 이야기가 나온다.
이것이 과거의 이야기가 되려면 "정의와 진실은 현실 속에서 끝없이 패배한다. 다만 긴 역사 속에서 승리할 뿐이다"라는 <한강>에서의 한 대목처럼 역사 속에서 진정으로 정의와 진실이 승리할 때만이라야 할 것이다.
하지만 아직 잘못된 과거는 제대로 청산되지 않고 있으며, 잘려진 태백산맥의 허리는 언제나 이어질 지 막막하다. 그나마 민족의 의지를 모아야 할 것인데 아직 힘께나 쓴다는 이 땅의 수구기득권 언론이나 정치세력들은 '돈이 곧 정의'라는 선전을 해대며, 과거사 청산에 어깃장을 놓고, 남북간의 민족대결을 부추기는 데 여념이 없다.
우리나라가 세계10대 경제대국이 될 만큼 잘 살게 되었다고, 민주주의와 자유로운 사회가 실현되었다고 <태백산맥>이 과거가 되는 것은 아니다. 우리가 과거의 우리 민족을 제대로 볼 수 있어야, 그래서 현재를 올바르게 살고, 미래를 정의롭게 설계할 수 있어야 비로소 <태백산맥>은 과거가 되는 것이다.
마지막으로 보너스 하나, <태백산맥>을 읽어보신 분들은 아시겠지만 <태백산맥>은 정말 재미있는 책이기도 하다. 그 재미를 보태는 것이 절묘한 전라도 사투리의 찰진 맛과 욕설이나 성적 묘사에 대한 뛰어난 해학적 표현의 덕이라 할 수 있겠다.
빨치산과 토벌대가 목숨을 걸고 한 바탕의 총싸움을 벌이고 난 후의 상황을 묘사한 다음 대목을 보면 그 민망한 욕설을 전라도 사투리를 동원하여 얼마나 해학적으로 풀어내고 있는가 대해 감탄하지 않을 수 없다.
전라도 사투리 욕설, 민망한데 재미있네
십여 분만에 적진에서 먼저 사격을 멈추었다.
"중지, 중지!"
첨점바구는 다급하게 팔을 내저었다.
"야이 빨갱이 새끼덜아! 납탄 쏘지 말어. 제네바 협정 위반이다!"
적진에서 외치는 소리였다.
"나가 대거리할라요." 외서댁이 벌떡 일어났다. 외서댁의 목청이 유만복 다음가게 크고 카랑카랑한 것은 다 아는 일이었다.
"아조 야물딱지게 맹글어뿌시요." 유만복이가 물러서며 말했다.
"요런 반동새끼들아! 납탄이 무서우면 총알 놓고 가먼 될 거 아니여어! 잡소리 말고 총알이나 놓고 가!"
두 주먹을 부르쥔 외서댁이 있는껏 목청을 뽑고 있었다. 그런 그녀의 머리에는 옷고름 너비의 새빨간 천이 질끈 동여매져 있었고, 뽑아 늘린 목에는 힘줄이 불끈 돋아올라 있었다. 그녀는 전투가 끝나면 그것을 풀어 정성스럽게 접어가지고 몸빼 주머니에 넣었다. 새빨간 천을 낭자머리위에 매듭진 그녀의 모습은 남자대원들이 무색할 정도로 용맹스럽게 보였다. 그런 외서댁을 보면 힘이 절로 난다는 남자대원들도 있었다.
"야이 씨부랄년아! 집구석에서 좆이나 뽈제 멀라고 입산혀갖고 재수대가리 웂이 나스고 지랄이냐아!"
적진에서 들려온 소리였다.
"허, 저놈이 얄랑궂은 소리 허네?"
외서댁이 헛웃음을 치며 대원들을 둘러보았다. 그 예상하지 못했던 소리에 대원들의 얼굴이 어색하고 민망해져 있었다. 그런데 외서댁이 숨을 들이켰다.
"야이 씨부랄눔아! 뽈자도 뽈 좆이 웂어 입산혔다. 니눔 좆대감지럴 뿌랑구가 뽑히게 뽈아줄 팅께 욜로 당장에 올라오니라, 올라와!"
부들부들 떨어대며 외치는 외서댁의 목청은 아까보다 훨씬 컸다.
"못 올라오는 눔도 빙신이다아!"
유만복이가 외쳐댔다.
"이, 그 말 좋으요. 다 항꾼에 그 말 서너 분 소리질릅씨다."
천점바구가 반색을 하며 말했다.
"야, 그러제라." 유만복이가 손바닥으로 허벅지를 철퍽 치며 좋아라 하고는, "글먼 다 항꾼에 시 분만 허는 것이요잉. 짜아, 한나 둘, 싯!" 하며 손짓했다.
"못 올라오는 눔도 빙신이다아!"
"못 올라오는 눔도 빙신이다아!"
"못 올라오는 눔도 빙신이다아!"
서른 다섯 명이 합친 소리가 우렁차고도 우람하게 퍼져나갔다.
아래쪽에서는 아무 대꾸도 들려오지 않았다. 대꾸 대신 들려오는 것은 웃음소리들이었다. 분명, 궁지에 몰린 소리질렀던 사람을 놓고 서로가 웃는 웃음일 것이었다.
(<태백산맥> 9권 55쪽에서 56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