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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치기 살해사건>
<양치기 살해사건> ⓒ 대교베텔스만
아일랜드의 외곽 넓은 목초지에 '조지 글렌'이라는 이름의 양치기가 있었다. 조지는 이 목초지에서 수십 마리의 양들을 돌보며 혼자 살고 있었다. 조지는 늙고 외로운 남자다. 정신도 좀 이상하고 결혼생활도 실패했고, 딸은 떠났다. 그에게 남은 것이라고는 오직 양들밖에 없다.

조지는 마을에 사는 사람들과의 인간관계가 별로 좋지 않지만, 그래도 양들에게는 나름대로 좋은 양치기였다. 먹이도 풍부하게 주고, 특히 허브풀이나 영양 풀처럼 양의 몸에 좋은 풀을 풍족하게 제공했다. 그리고 양들에게 책도 읽어 주었다. 추리소설도 읽어주고 연애소설도 읽어 주었다.

그랬던 그가 한여름 아침에 시체로 발견되었다. 병이나 자연사가 아니라 누군가가 조지를 죽인 것이다. 이 시체를 처음으로 발견한 것은 양들이었다. 이 양들은 이때부터 조지가 왜 죽었는지, 누가 조지를 죽였는지를 놓고 토론하기 시작한다.

양치기를 죽인 범인의 정체를 추적하는 양들

레오니 슈반의 소설 <양치기 살해사건>은 이렇게 독특한 상황에서 시작한다. 양치기를 잃은 양들은 모여서 머리를 맞대고 의논하고 논쟁하면서 이 사건을 풀어가려고 한다. 하지만 양들의 대화는 처음부터 중구난방이다.

이 소설의 등장인물, 아니 등장동물들은 모두 제각각으로 개성이 강하다. 어떤 양은 나이가 많고 의젓하다. 또 어떤 양은 머리가 좋고 침착하다. 그리고 어떤 양은 하루종일 풀을 뜯는 생각밖에 하지 않는다.

이 양들은 처음부터 조지에 대한 평가로 양분된다. 어떤 양들은 조지가 좋지 않은 양치기였다고 말하고, 또 어떤 양들은 조지가 자신들을 지켜주었다고 말한다. 그래도 이 양들에게는 공통점이 있다. 자신들을 이끌어줄 양치기가 없다는 사실에 허전함을 느끼는 것이다.

이리하여 이들은 자신의 양치기를 죽인 범인을 찾기 위해서 수사를 시작한다. 하지만 이것이 쉬운 일은 아니다. 이 양들은 숫자를 10까지도 세지 못하는 경우가 허다하다. 기억력이 짧아서 재채기 몇 번에 모든 것을 잊어버리기도 한다. 그래도 조지는 가끔 자신의 양들에게 추리소설을 읽어 주었다. 양들은 그 추리소설에서 배운 지식을 나름대로 응용하면서 사건을 파헤치려고 노력한다.

양들은 모두 개성이 강한 만큼, 각자 독특한 능력이 있다. 어떤 양은 냄새를 잘 맡고 어떤 양은 기억력이 비상하다. 또 어떤 양은 시력이 좋고 어떤 양은 발이 빠르다. 그리고 놀랍게도 사나운 개와 싸워서 개를 물리칠 수 있는 능력이 있는 양도 있다.

이들은 자신이 가지고 있는 능력을 모으고 조율해서 절묘한 2인 3각 체제를 구축한다. 사건현장에 찾아오는 마을 사람들의 말을 엿듣고, 사람들의 냄새를 통해서 뭔가 단서를 찾으려고 한다. 한밤중에 마을로 찾아가서 잠복근무를 하는가 하면, 자신의 영역에 침입한 사람과 맞서 싸우기도 한다.

양들의 대화와 행동은 우스꽝스럽고 때로는 답답하지만, 적어도 순수한 열정만큼은 누구에게도 뒤지지 않는다. 양들은 이런 과정을 거쳐서 조금씩 사건의 해결에 다가간다. '이것이 정의야!'라고 외치면서.

양들이 주인공으로 나서서 양치기 살해사건을 해결해가는 추리소설. 설정만으로도 꽤 흥미로운 소설이다. 동물이 범행을 하는 추리소설은 있어도, 동물이 사건 해결에 참여하는 추리소설은 드물다. 일본작가 아카가와 지로의 <삼색털 고양이>가 이런 부류에 해당한다고 할까. '삼색털 고양이'는 주인공에게 아이디어를 제공하는 조연에 불과했다. 그런데 <양치기 살해사건>에서는 양들이 일약 소설의 주인공으로 등장한 것이다.

오랜 시간 동안 양들을 관찰해온 저자 레오니 슈반

저자인 레오니 슈반은 어린 시절을 아일랜드와 프랑스에서 보냈다고 한다. 특히 그중에서도 아일랜드에서 보낸 시간이 <양치기 살해사건>을 구상하는데 큰 영향을 끼쳤을 것이다. 아일랜드에는 양이 많다. 어디에 가나 지천으로 널려 있는 것이 바로 양이다.

레오니 슈반은 어린 시절에 많은 양들을 관찰하면서 양들의 생김새와 성격, 먹이 등을 기록하기 시작했다고 한다. 그 결과 양들이 가지고 있는 각기 다른 개성을 확인하게 되었고, 양을 주인공으로 하는 소설을 기획하게 된다. 마치 프랑스의 작가 베르나르 베르베르가 개미에 미쳐서 소설 <개미>를 쓰게 된 것처럼.

저자의 이런 과거 때문인지 <양치기 살해사건>을 읽다 보면 개성 강한 양들의 모습이 눈앞에 떠오른다. 이 작품에는 수십 마리의 양이 등장하지만, 모습이나 식성이나 습관이 비슷한 양은 한 마리도 없다. 좋아하는 풀도 다르고, 좋아하는 장소도 다르다. 비슷한 점이 있다면 한 가지, 양치기 조지를 죽인 범인을 알아내려고 노력한다는 점이다.

독특하고 재미있는 추리소설이면서 동시에 아일랜드의 작은 마을과 넓은 목초지, 그 너머로 펼쳐진 해변의 모습을 떠오르게 하는 작품이다. 마을의 선술집에서 아일랜드 전통 기네스 맥주를 마시는 사람들. 멀리 하늘과 닿아있는 수평선. 하늘 같은 바다와 바다 같은 하늘. 거기에 놓인 마치 양처럼 생긴 구름. 그 구름이 되고 싶어하는 양의 마음까지.

<양치기 살해사건>을 읽고 나서 양을 바라보는 시각이 바뀐다면 과장일까? 보통 '양처럼 순하다'라는 표현을 사용한다. 하지만 사실 양은 대책 없이 순한 동물이 아니다. 그보다는 정직하고 고지식한 동물에 가깝다고 한다. 정의를 외치면서 고지식하게 범인을 추적해가는 <양치기 살해사건>의 양들이 이와 비슷하지 않을까.

우리나라에서 양은 흔한 동물이 아니다. 목가적인 풍경을 배경으로 양떼와 양치기를 보려면, 작정하고 멀리 여행가지 않으면 안 될 일이다. 혹시라도 그런 기회가 온다면 조용히 앉아 양들을 관찰하면서, 소통하려고 노력해보는 것도 좋을 것 같다. 양치기 조지처럼, 양들과 어떤 형태로든 교감이 생길지 누가 알겠나.

덧붙이는 글 | 레오니 슈반 지음 / 김정민 옮김. 대교베텔스만 펴냄.


양치기 살해사건 - 누가 양치기 조지 글렌을 죽였는가

레오니 슈반 지음, 김정민 옮김, 북스캔(대교북스캔)(20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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