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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부, 목사, 불자인 시민기자가 타 종교 성직자들을 만나 그들의 삶과 종교에 대해 진솔하게 이야기를 들어보는 자리를 마련했습니다. 기사를 통해 타 종교에 대한 이해를 높이고, 종교의 진정한 의미를 나누고자 합니다. 첫 번째 순서로 최종수 시민기자(전주 팔복동성당 주임신부)가 임종자들의 어머니로 불리는 비구니 스님 능행(정토마을)을 만났습니다. <편집자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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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신교, 불교, 원불교 성직자들을 두루 만났지만 비구니 스님은 개인적으로 만나본 적은 없다. 고등공민학교 동기동창 중에 한 명이 비구니가 되었다는 소식은 들었지만 만나지는 못했다. 사제가 비구니 스님을 만나러 가는데 어찌 설렘이 없으랴. 노총각이 첫선을 보러 가는 마음이 이런 마음일까?
인생을 아름다운 동행이라고 말한다. 누군가에게 아무런 욕심 없이 동행이 되어주는 인생이 아름답다는 말일 게다. 누군가에게 동행이 되어주는, 그것도 임종(臨終)자들의 동행을 자처하고 나선 아름다운 사람을 만나러 갔다.
충북 청원군 미원면 대신리. 구녀산을 굽이굽이 돌아가는 길모퉁이에 '정토마을' 표지판이 반갑게 인사한다. 무덤가 할미꽃처럼 낮게 자리한 정토마을, 호스피스 병원인 그곳에는 할미꽃처럼 온화한 스님과 고달픈 인생의 소풍 길을 끝내고 떠날 채비를 하는 임종자들과 가족들이 함께 살고 있다.
죽음을 앞둔 '시한부'의 사람들. 임종자들을 돕고 있는 비구니 스님 능행(47)은 이들에게 어머니로 불린다. 19일 오후 2시 30분, 서울에서 막 돌아온 그는 늦은 점심식사 중이었다. 직원의 안내로 법당에 들러 큰절을 올리고 사무실로 가는 도중에 능행을 만났다.
"스님, 사랑했던 사람은 없었는지요"
"먼 길 오시느라 수고가 많으셨죠."
전화의 자상한 목소리처럼 그의 첫 인상은 큰 누님 같다. 덥석 잡은 손이 따뜻한 것처럼 눈빛이 참 맑았다. 임종자들의 절망과 희망, 슬픔과 기쁨으로 닦아놓은 눈빛은 하늘로 열린 영원의 창 같았다. 오래 들여다보면 한 사람의 영혼이 비칠 것만 같았다. 응접실에서 다기를 꺼내 녹차를 준비하던 스님이 말을 건넨다.
"살과 살이 부대끼고, 인간과 인간과의 만남이 이루어지는 정토마을에서 인욕(忍辱·참기 어려운 것을 참아내며 남이 하기 힘든 선행을 하는 것)수행이 굉장한 수행이라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저의 화두는 가난한 사람들입니다. 지금 우리 사회는 상대적 빈곤이 갈수록 심해지고 있습니다."
"우리 사회에 가난한 사람이 있나요? 영적으로 가난한 사람들이 많지요. 우리 사회의 가장 큰 문제인 상대적 빈곤감이 너무 크다 보니까 자살, 우울증, 가정파탄 같은 많은 사회문제가 양산되는 것 같아요."
"제가 이목구비가 확실하고 눈썹도 송충이 눈썹이잖아요. 그런데 '어떻게 신부가 되었을까?'하는 질문을 가끔 받습니다."
"저에게 그런 질문을 하고 싶은 것이지요."
"하하하"(함께 웃음)
- 스님, 사랑했던 사람은 혹시 없었는지요.
"제가 완벽하게 사랑하는 사람은 석가모니 부처님밖에 없어요. 그분만을 한결같이, 수억겁을 다시 살아도 부처님만 사랑할 것입니다. 의심 없이 항구하게 사랑할 수 있는 사람, 제 사랑의 모든 것은 부처님입니다.
- 황순원의 <소나기> 아시지요. 중학교 땐 짝사랑하는 여자 친구가 있었고, 고등학교 다닐 때는 통학하는 여학생에게 쪽지 한 장 보낸 적이 있었어요.
"왜 소나기 같은 사랑이 없었겠어요. 근데 부처님을 알고 난 이후 그런 사랑이 부질없다는 것을 알게 되었죠. 부처님이 제 사랑의 전부입니다. 일생에서 가장 잘 선택한 것이 출가입니다. 제가 후배 스님들에게 가장 축복된 선택이라고 말합니다. 지금 세상은 좋은 것이 너무도 많아 성소자가 줄고 있지요. 불편하고 힘든 일을 싫어하는 젊은이들에게 매력이 없는 거지요."
능행은 애초에 개신교 신자라고 했다. 의외였다. 그는 광적인 교회 분위기에 회의감을 느끼던 와중에 불경 소리를 듣게 되면서 불교에 매료되었다고 했다.
개신교 신자였다가 스님이 된 까닭?
"저의 신앙의 뿌리는 개신교입니다. 중·고등학교는 천주교 재단인 거제도의 해성중·고를 다녔습니다. 수녀님들이 운영하는 천주교 학교였지요. 스물다섯 살까지는 개신교 신앙 속에서 살았는데, 특별한 체험은 없었어요. 하지만 제가 워낙 열정적이라 신앙생활을 열심히 했습니다.
그런데 초파일 즈음에 거리를 지나가는데 음반판매점에서 불경 소리가 나는 거예요. 처음 듣는 그 소리. 지나가다가 살짝 들었던 그 소리와 내가 합일이 된, 고압선에 감전된 듯한 그 순간 걸어갈 수가 없었어요. 제 전 존재를 흔들어 버린 것이죠. 처음 들어본 그 불경이 저를 사로잡아 버렸죠. 그 후로 교회에 앉아 있어도 아무것도 들어오지 않았어요. 그 당시 부흥회가 한참 유행이었는데, 광적인 교회 분위기에 회의감이 들기 시작했어요. 회의감이 들수록 그 불경 소리가 떠오르고, 그럴수록 너무 너무 행복해 지는 거예요. '부모은중경 테이프가 다 늘어나 망가질 때까지 들었어요.
'야, 불교가 이렇게 심오하고 거룩하구나.'
그리고 나서 불교신문을 구독하면서 불교에 대해 이해하기 시작했어요. 그 당시에 성철스님이나 법정스님 등 몇 분의 책들을 읽으면서 불교가 참 정적이고 고요하고 자유롭다. 참 멋지다. 행복하게 사는 것보다 멋지게 살고 싶은 열망이 가득한데, 불교 스님들이 그렇게 인생을 멋지게 살고 있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어요.
법정 스님의 산문집을 샀어요. 책을 읽으면 제가 불일암에서 법정스님처럼 차를 다리고 예불을 드리고, 달빛이 내리고 후박나무 열매가 떨어지는 소리를 듣는 거예요. 진짜 이렇게 살다가야지 이렇게 멋지게 살다가야겠다. 나도 출가해야지. 스님만 되면 성철스님 법정스님처럼 다 그렇게 살 줄 알았어요.
바람처럼 물처럼 구름처럼 끊임없이 흐르는 불교, 개신교에서 펄쩍 뛰어서 불교로 뚝 떨어졌어요. 아무것도 모르고 떨어졌는데 현실은 그게 아니었어요. 스님들이 굉장히 많은 줄 알았어요. 저 같이 초짜 스님들은 열심히 공부하고, 공부가 끝난 스님들은 가난하고 어려운 사람들을 위해 열심히 봉사하는 줄 알았어요.
병원이나 어려운 곳엔 수녀님과 신부님, 선교사나 목사님들만 넘치는 거예요. 스님들을 찾아볼 수가 없는 거예요. 지금은 스님들도 여러 분야에서 잘 하고 있지만 20년 전엔 불교계는 거의 전무했어요.
너무도 실망하고 절망하면서 딜레마에 빠졌어요. 그럼 그 스님들 다 어디 갔는가. 다 뭐 하나. 스님들은 거의 선방에 있는 거예요. 나름대로 열심히 수행하고 있지만 중생의 고통스러운 현장에는 스님들이 없는 거예요. 부처님은 살아 있지 않는 거예요. 스님을 만나려면 선방에 찾아가야 하는 거예요.
어느 날 보살님을 따라 말기 암환자 병문안을 갔습니다. 서울에 있는 큰 천주교 병원이었어요. 병실에 늘어섰는데 스님들이 그 병원에 엄청 많은 거예요. 그래서 내가 물었죠. '이 병동엔 왜 이렇게 스님들이 많아요'라고 묻자 간호사들이 웃으면서 스님들이 아니라 항암제를 맞고 머리카락이 다 빠져서 그렇게 됐다고 설명하는 거예요.
그런 환자를 처음 봤는데 부처님의 고행상 같았어요. 눈은 심리 밖으로 쑥 들어가고, 몸은 삐쩍 말라가지고 링거 몇 개씩 달고 있는 거예요. 무섭고 두려웠어요. 근데 그 병원에 스님이 없는 거예요. 천주교와 개신교 신자들은 임종 때 성직자들의 보살핌을 받는데 불교 신자들은 그렇지 못하고 있었어요. 그때 '소외' 라는 것이 뼛속까지 파고들더군요. 그 이후로 질병과 고통에 대해 관심을 갖게 되었어요."
임종 앞둔 스님과 손잡고 한 약속
- 그게 임종자들의 병원을 설립하게 된 동기군요.
"직접적인 동기는 따로 있어요. 몇 년이 흘러 말기 암환자 스님을 병문안 가게 되었어요. 그 환자 스님이 제 두 손을 잡고 소원이 있다는 거예요. 스님들이 편안하게 눈을 감을 수 있는 병원을 설립해 달라는 거예요. 이미 숨이 목까지 찼는데 '병원을 세우겠다는 약속을 하지 않으면 눈을 감을 수 없다'는 거예요.
그 간절한 소원에 대답하지 않을 수 없었어요. '스님도 하늘에서 함께 기도해 주실 수 있다면 해 보겠습니다'라고 대답했지요. 서로 두 손을 꼭 잡으며 약속을 했고, 그 스님은 몇 시간 후에 편안하게 눈을 감으셨어요. 그 약속이 제 인생을 통째로 바꾸어버리는 숙명이 된거죠."
그 약속으로 능행은 한 해에 80~90명의 임종자들을 하늘로 보내는 스님이 되었다. 편안한 죽음, 스님이 있어 황천 가는 마지막 길이 행복했었노라고 고백할 수 있게 된 것이다. 한 스님의 유언으로 인해 말이다.
- 호스피스병원을 하시면서 보람이나 깨달음이 많을 것 같은데요.
"이 일은 그 어떤 수행보다도 정말 멋진 수행인 것 같아요. 죽음을 통해 죽음 안에서 내가 부처님의 가르침과 정합을 이루고, 그 가르침을 자각해 가고, 내 삶을 성찰하는데 이보다 더 좋은 수행은 없다고 봅니다. 멋진 수행자가 되겠다고 출가했는데, 그 뜻대로 멋진 수행의 삶을 살고 있다는 자부심을 갖게 해 줍니다. 특히 별로 아름답지도, 평안하거나 안락하지 않은 이 시설에서도 환자나 가족들이 행복해 하고 기뻐하고 감사해 해요. 그들의 삶이 붕괴되거나 파괴되기 직전에서 온전히 새롭게 거듭날 때, 가족이 화해하고 가족이 다시 새롭게 만들어질 때 기쁘지요. 무엇보다도 감사한 것은 떠나는 사람과 남은 사람의 관계가 찌꺼기 없이 온전히 아름답게 회복될 때, 부둥켜안고 엉엉 울며 서로를 용서하고 화해할 때 눈물겹도록 기쁘고 행복하지요."
- 기억에 남는 슬픈 일도 많았을 것 같습니다.
"가장 슬픈 일은 돈 때문에, 이 더러운 돈 때문에 가족이 붕괴되고, 돈 때문에 소외되고 싸우고, 돈 때문에 미워하고 원망하고, 죽을 때 눈도 못 감고, 또 돈을 많이 벌었는데 다 못 쓰고 죽는 것이 한이 돼서 죽지 못하고, 돈 때문에 겪는 중생들의 고통, 그것이 가장 슬프고 가슴이 아픕니다. 이 돈 때문에 일어나는 사건과 고통을 어떻게 완화시킬까 생각하면서 병원을 세워야겠다고 생각했어요."
- 국가가 해야 할 사회복지를 종교단체나 사회단체가 하고 있는 현실과 국가의 사회복지정책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시는지 궁금합니다.
"국가가 빈민층 기초생활수급자에게 많은 혜택을 주고 있는데 중하층 서민들에 대한 대책은 거의 없어요. 저희가 경남 언양에 짓는 병원은 서민들을 위한 무료병원입니다. 운영은 후원금으로 하고 병원비는 저희 공동체의 후원으로 운영하려고 합니다. 돈 때문에 병원에 가지 못하는 서민들이 돈이 없어도 사회에서 버림받지 않는 세상도 있다는 것, 그래도 세상은 살만한 곳이라는 것을 보여주고 싶어요.
사실 서민 가족 중에 환자 한 사람이 생겨 투병하면 풍비박산이 나잖아요. 그런 서민들의 문제를 어떻게 할 것인가. 국가가 서민들의 의료복지에 더 많은 신경을 써야 합니다. 국가의 복지시설에 들어갈 수 없는 서민들에게도 혜택을 주는 복지정책이 필요한 시점인 것 같습니다. 서민들의 삶의 질을 높여야 합니다. 그러려면 세금을 더 많이 거둬야겠지요."
돈에 미친 세상... 영성은 가난에서 시작
- 현재 우리 사회의 가장 뜨거운 문제 하나만 지적해 주시지요.
"한미FTA가 아닌가요. 우리 사회가 너무 급작스럽게 서구화 되는 성장일변도가 문제지요. 질적으로 천천히 성장해야 하는데 엄청나게 빨리 성장하는 것이 결국 우리를 병들게 할 것입니다. 미국 사람들의 덫에 걸려들면 안돼요. 일제 식민지는 36년으로 끝났지만 한미FTA는 그렇지 않잖아요. 우리의 목숨이 미국에 달려 있어요. 참 두려워요. 그 덫은 우리 세대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자식세대와 손자에 손자들에게까지 고통의 멍에를 물려주는 거 아니겠어요. 어떻게든지 막아야 되는 것 아닌가요?"
- 스님은 이 세상의 가장 큰 문제가 뭐라고 생각하시는지.
"청소년 수련원에 가서 '하느님과 돈과 싸우면 누가 이길까? 물었더니 거침없이 '돈요'하는 거예요. 청소년들까지도 돈이 우상이 되어버린, 돈에 미친 세상이 되었어요."
- 그런 돈에 미친 세상과 종교는 어떤 관계가 있다고 보십니까?
"돈에 미친 세상이기에 종교의 역할이 더 크다고 봅니다. 모든 종교가 청정하고 맑아진다면 우리 사회가 맑아지고 깨끗해 질 것입니다. 세상 사람들이 영적으로 너무도 가난한 거예요. 종교지도자들마저도 영적으로 가난해지면 우리 사회는 희망이 없겠지요. 근데 영성은 가난에서 시작되지 않나요."
- 종교의 벽을 허물기 위해 구체적으로 하시고 있는 일이나 종교간의 일치를 위해 무엇인 필요하다고 보십니까?
"종교의 벽은 원래 없죠. 단지 우리 마음의 벽, 사고의 벽만 존재하는 것이죠. 각자가 타인의 종교를 이해하고 인정해야 합니다. 절대라는 것이 참 위험합니다. 이것은 절대고 저것은 절대가 아니라는 것은 편견이죠. 이 편견이 인간을 고통에 빠지고 하고 사회를 혼란시키는 것이죠. 성직자들의 편견이 신자들에게 그대로 파급되는 것 같아요. 그래서 성직자들의 편견은 더욱 무서운 거지요. 서로 조화를 이루어 이 세상을 평화롭게 하는 것이 종교의 역할이 아닐까요? 죽어가는 삶을 돌보는 수녀님들과 신부님들, 목사님들과 교무님들과 잘 지내고 있습니다."
동행의 등불을 걸어주신 누님 같은 스님
- 스님이 어떻게 사시는지 보고 싶습니다.
"글쎄요. 조금 쑥스럽네요. 대단한 일을 하는 것도 아니고 제가 좋아서 하는 일인데….”
- 멀리서 꽃만 보고 갈 수 없잖아요. 가까이 가서 꽃잎 속에 숨어 있는 향기도 맡아야 꽃구경 제대로 한 것이 아닐까요?
"죽음의 현장에 무슨 향기가 있겠어요."
- 아, 스님 한번만 보여 주세요(코 먹은 소리로 애교를 부린다). 멀리 전주에서 눈썹을 휘날리며 왔는데요.
"하하하"(함께 웃는다.)
"그래요. 출생으로 시작한 가장 아름다운 인생의 꽃, 제가 이곳에서 인생이라는 아름다운 꽃향기를 뼛속까지 느끼며 살고 있지 않나 생각합니다. 동백꽃이 나무에서 시들지 않고 뚝뚝 통째로 떨어지잖아요. 그 동백꽃 낙화와 같은 죽음을 통해 인생의 가장 아름다운 풍경을 봅니다. 임종하는 순간, 풀잎에 맺힌 새벽이슬 같은 눈빛에서 가장 평화로운 영혼을 느낍니다."
능행은 간호실을 지나 일흔살 정도 돼 보이는 병자가 누워있는 침대에 이르자마자 마치 어머니가 병석에 누워있는 아이와 눈을 맞추고 이야기 하듯이 말을 건넨다.
"평안하셨어요."
"예."
"오늘 눈빛이 참 맑아 보이네요."
"스님이 기도하고 가신 뒤로 안정이 되는가 봐요."
"그랬어요. 참 잘 했네요."
"하실 말씀이나 도와드릴게 있으면 말씀하세요."
"치료비가 걱정이에요."
"걱정하지 마세요. 스님이 돈이 많잖아요. 어때요. 누님이 곁에 있으니까 좋지요?"
"큰 누님이라 그런지 어머니 같아요."
"큰 누님이 좋아요?"
"근데 제가 큰 누님께 잘해 드리지 못했어요."
"아니에요. 고향에 오갈 때마다 시골에 시집가서 고생한다고 꼭 들렸어요. 그게 어디 쉬운 일인가요."
"누님이 곁에 있으니까 참 좋네요."
"동생만 바라보면 눈물이 나서 죽겠네예."
"어머니 같은 누님이 곁에서 시중을 드니까 동생이 얼마나 행복하겠어요."
스님의 왼 손은 어느새 동백꽃 떨어지듯이 뚝뚝 눈물을 떨구는 환자 누님의 등을 쓰다듬고, 오른 손은 환자 무릎을 만져주고 있다. 왜, 시한부 임종자들과 그 가족들의 어머니라고 불리는지 알 것 같다. 죽음 속에서 피어나는 아름다운 동행의 향기가 콧등을 스치며 눈시울을 뜨겁게 달구고 만다.
등을 쓰다듬는 스님의 왼손이 눈물을 훔치는 내 등짝을 토닥이는 것만 같다. 아름다운 동행은 이렇게 눈물 속에서 피어나는 향기가 아닐까. 마음과 영혼의 불을 밝히는 스님의 열정이 어두운 세상에 불을 밝혀야 하는 사제의 가슴에도 맑은 등불 하나 걸어놓았다. 아름다운 소풍처럼 이승의 삶을 마치고 저승으로 떠나가는 길을 밝혀주는 아름다운 동행의 등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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