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에서의 활동은 원세개에게 그야말로 장밋빛 그 자체였다. 이때부터 그는 사망 시까지 계속해서 고속 승진의 출세가도를 달렸다. 아직 서른도 안 된 원세개는 갑신정변(1884년) 이후 총리교섭통상사의로서 조선 현지의 책임자 자리에 오르게 되었다. 진수당(陳樹棠)이 갑신정변 발생의 책임을 지고 본국으로 돌아감에 따라 원세개가 그 후임이 된 것이다.
당시 청나라의 한반도정책은 조선문제 최고책임자인 이홍장(1823~1901년)과 현지 책임자인 원세개의 콤비 플레이로 전개된 것이었다. 청나라 내정·외교의 대권을 장악한 '왕회장' 이홍장의 후원 하에서 원세개는 불도저식 한반도 정책으로 이홍장의 신임을 축적해 갔다. 그는 평소에 조선 국왕에게 제대로 인사도 하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조-러 밀약사건을 빌미로 고종 폐위를 도모하고 또 화교 상인들의 활동을 적극 보호하는 등 청나라의 영향력을 조선에 이식하기 위하여 온갖 심혈을 기울였다.
'한국은 전통적으로 중국의 내정간섭을 받았다'는 일부 한국인들의 관념은 바로 이때부터 생긴 것이다. 그 이전에는 중국 왕조가 한반도의 내정·외교에 간섭한 적이 없었으나, 전무후무한 원세개의 내정간섭이 한국인들의 기억을 확 바꾸어 놓은 것이다. 원세개의 내정간섭이 매우 극심했기 때문에 그 이후 한국인들의 뇌리 속에는 '한국은 본래 중국의 내정간섭을 받은 나라'라는 잘못된 기억이 입력될 수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이홍장과 원세개의 과도한 내정간섭은 청나라의 라이벌인 일본의 입지를 강화시켜 주는 동시에 청나라의 국제적 고립을 자초하는 요인으로 작용했다. 이러한 요인을 포함하여 여러 가지 요소가 복합적으로 작용하여 청나라는 청일전쟁(1894년)에서 작은 섬나라 일본에게 완패를 당하는 치욕을 경험하고 말았다.
청일전쟁 패전과 한반도정책의 실패로 원세개의 지위는 물론 신변의 안전까지 위험해졌지만, 그는 특유의 처세술로 위기를 극복하고 출세의 '엑셀레이터 페달'을 힘껏 밟아 나갔다. 그 과정에서 생긴 인상적인 사건 몇 가지를 소개하기로 한다.
청일전쟁 발발 며칠 전에 원세개는 자신을 엄습하는 무거운 중압감을 견디다 못해 부하인 당소의(唐紹儀, 1862~1938년)에게 책임을 떠넘긴 채 본국으로 도주하고 말았다. 패전이 불을 보듯 뻔한 상황에서 일단 자신의 신변부터 챙기고 본 것이다.
한반도 문제에서 손을 떼고 본국으로 돌아간 원세개는 무술변법(1898년) 초기에는 개혁파의 편에 가담하여 정변을 도모했다. 그러나 그는 곧 동지들을 배신하고 개혁을 좌절시킨 다음에 서태후(西太后, 1835~1908년)의 신임을 받아 산동순무로 승진했다.
한편, 자신의 후원자인 '왕회장' 이홍장이 1901년에 사망하자 원세개는 그 뒤를 이어 북양대신 겸 직예총독의 자리에 오르게 되었다. 이로써 그는 막강 '북양군벌'의 명실상부한 지도자로 떠오를 수 있었다.
이후 그의 '인격'을 잘 보여준 사례는 신해혁명 때의 행각이었다. 신해혁명이 발생하자 그는 '마지막 황제' 푸이(溥儀, 1906~1967년)에 의해 진압책임자로 임명받았다. 그러나 그는 도리어 혁명파와 내통하고 황제 푸이를 퇴위(1912년)시키는 데에 가담하였다. 무술변법 때와 똑같은 행동 패턴을 보인 것이다.
그의 배신 행각은 여기서 그치지 않았다. 1912년 2월에 그는 손문(쑨원, 1866~1925년)으로부터 중화민국 임시총통의 자리를 물려받았지만, 얼마 안 가서 손문마저 배신하고 권력을 독차지하였다. 황제 푸이를 배신한 데에 이어 혁명파마저 배신한 것이다.
원세개의 욕심이 여기서 그쳤다면, 원세개의 인생은 그런 대로 '성공신화'의 단골 소재로 활용되고 있을지도 모른다. 그런데 임시총통이 된 원세개는 여기서 한걸음 더 나아가 아예 황제가 되고자 하는 야심을 품었다. 이미 폐지되고 없는 황제 자리를 부활시켜 원씨 제국을 열고자 한 것이다.
이때부터가 원세개 인생의 내리막길이었다. 황제가 되어 보겠다는 꿈 그 자체야 나쁠 것이 없겠지만, 문제는 시대 흐름을 정면으로 거역하면서까지 황제가 되어 보고자 했다는 점이다. 전제정치와 봉건정치를 청산하고 공화정치와 민주정치를 확립하기 위한 신해혁명의 이념을 부정하고 시계 바늘을 거꾸로 돌리려고 시도한 그 순간부터 원세개의 인생은 내리막길로 걷게 되었다.
중국인들이 황제전제정치를 타도한 것은 꼭 황제독재가 싫기 때문만은 아니었다. 그 주된 이유는 봉건적 황제정치체제가 당시의 새로운 경제적 생산관계와 모순이었기 때문이다. 아편전쟁 이전부터 이미 중국에서는 자본주의적 생산관계(맹아)가 수공업 등 분야에서 싹트기 시작하였고, 특히 양무운동 이후의 근대화 과정 속에서 부르주아라 불릴 만한 신흥세력이 성장하고 있었다. 그리고 신해혁명은 바로 이 신흥세력이 주도한 것이었다. 봉건체제가 자신들의 '돈벌이'를 방해하기 때문에 그들은 혁명을 선택한 것이다.
이런 신흥세력의 입장에서 원세개의 '황제 욕심'은 자신들의 경제적·정치적 기반을 근본에서부터 위협하는 것이었다. 봉건적인 구체제로 돌아간다면, 신흥 자본가로서의 그들의 위상 또한 흔들리지 않을 수 없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중국의 혁명세력은 황제가 되고자 하는 원세개에게 대항하지 않을 수 없다.
이는 현대 한국에도 어느 정도 부합되는 이야기일 것이다. 과거 개발독재 시기에는 성장 패러다임이 한국 경제를 지배했다. 하지만, 오늘날에는 분배 패러다임이 사회적 다수의 지지를 얻고 있다. 성장 패러다임은 실패한 패러다임이라기보다는 이미 그 수명을 다한 한물 간 패러다임이다.
이미 다수의 한국인들이 새로운 패러다임에 적응하고 있는데, 과거의 패러다임을 한국 사회에 부활시키려 하는 사람들이 있다면 또 그런 사람들이 한국 사회의 '황제'가 되고자 한다면, 신해혁명 이후의 중국인들이 그러했던 것처럼 현대 한국인들도 그러한 역사의 반동(反動)에 적극 대항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그것은 부활된 구체제(개발독재체제) 하에서는 현대 한국인들이 더 이상 자유롭게 살 수 없을 뿐만 아니라 돈도 제대로 벌 수 없기 때문이다.
한편, 원세개는 한번 꾼 황제의 꿈에서 쉽게 헤어나지 못했다. 1914년 5월 중화민국 임시약법을 폐지한 그는 스스로 봉건적인 대총통의 지위에 올랐다. 표현만 대총통이었지 사실상 황제나 마찬가지인 자리였다. 그는 여기서 그치지 않고 그야말로 명실상부한 황제가 되고자 하였다. 대총통의 타이틀을 아예 황제로 바꾸려 한 것이다. 황제 타이틀을 얻기 위해 원세개가 벌인 일련의 정치활동이 바로 그 유명한 제제운동(帝制運動)이다.
제재운동이 활발히 전개되기 시작한 때는 1915년 8월부터였다. 원세개는 대총통 고문인 프랑크 굿나우 및 아리가 나가오 등과 어용학자들을 동원하여 “공화제는 민도가 낮은 중국의 실정에 맞지 않는다”는 이론을 유포하면서 언론 등을 앞세워 제제(帝制) 복원을 밀어붙였다.
오로지 황제가 되어 보겠다는 일념 하에 원세개는 외세와 결탁하는 어리석음까지 범하였다. 국내 세력만 갖고는 황제가 되기 힘들다고 판단한 그는 일본·영국·러시아·프랑스에게 손을 내밀었을 뿐만 아니라, 1915년에는 그 유명한 일본의 21개조 요구까지 들어주고 말았다. 자기 자신의 꿈을 이루기 위해 중국 일부를 팔아버린 것이다.
결국 1915년 12월 11일 열린 참정원(국회) 회의에서 1993명의 대표가 참석한 가운데 만장일치로 원세개가 황제로 추대되었다. 다음 날인 12월 12일에 원세개는 이를 수락하였으며, 국호를 홍헌(洪憲)이라 하고 1916년을 홍헌 원년으로 정했다.
원세개가 그의 꿈을 이룬 것 같았지만, 이것은 일시적인 것에 불과했다. 왜냐하면, 수억 명의 중국인들은 원세개 개인의 야망을 위해 과거로 회귀할 생각이 없었기 때문이다.
중국 전역에서 원세개의 야망을 꺾기 위한 반원운동(反袁運動)·반제제운동(反帝制運動)이 폭발했다. 일부 성에서는 독립을 선포하고 호국군(護國軍)을 조직하여 정부군에 대항했다. 그리고 원세개의 여당이었던 양계초의 진보당마저 반원(反袁) 세력에 가담하였다. 소위 제3혁명이 발생한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 원세개를 더욱 더 불리하게 만든 것은 열강의 태도였다. 처음에는 원세개를 지지했던 서양 열강들은 정세가 뒤바뀌자 원세개에 대한 반대 입장으로 돌아서기 시작하였다. 원세개를 계속 지지했다가는 중국 내 이권을 획득하기 힘들다는 판단 때문이었다.
사방에서 포위하고 들어오는 거센 압박을 견디다 못한 원세개는 1916년 1월로 예정된 황제즉위식을 취소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때 정신적 충격을 받은 원세개는 1916년 3월 22일에는 스스로 황제 자리를 포기하고 말았다. 역사가 그에게 내린 형벌은 이것으로 끝이 아니었다. 6월 6일 급사(急死)라는 또 다른 형벌이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신경성 피로와 요독증이 그를 급사로 내몬 것이다.
이홍장의 적극 지원 하에 변신과 배신을 거듭하면서 고속 출세가도를 달리다가 끝내는 시대적 흐름을 거역하고 황제까지 되어 보려 했던 군벌 지도자 원세개는 결국 신경성 피로와 요독증에 걸려 '황제 즉위'는 고사하고 비참한 '인생 퇴위'로 결말을 맺고 말았다. 구체제 청산이라는 중국 사회의 도도한 흐름에 맨몸으로 거역하다가 결국에는 비극의 주인공이 되고 만 것이다.
앞에서 언급한 바와 같이, 오늘날 한국에도 원세개처럼 과거의 개발독재체제를 부활시키려는 허황된 꿈을 품고 있는 사람들이 있다.
한국 사회의 도도한 흐름은 정치적 자유와 경제적 평등 그리고 한반도 평화다. 또한 한국 사회는 경제적 패러다임으로서 성장을 이미 포기하고 이제는 분배를 선택했다.
그런데도 수구세력은 모든 것을 과거로 되돌리려는 불순하고도 허망한 꿈을 꾸고 있다. 그들이 자신들의 과욕을 제어하지 못할 경우 어떤 말로를 맞이하게 될 것인가는 원세개의 사례를 통해서 명백하게 확인할 수 있을 것이다.
정지용의 시 '향수'는 아름답고 포근하지만, 개발독재에 대한 수구세력의 '향수'는 추악하고 차디찰 뿐이다. 단순히 향수를 느끼는 것에 만족하지 못하고 아예 과거체제를 부활시키려고까지 한다면, 이는 스스로 원세개의 전철을 밟는 행위나 다름없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