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대중(DJ) 전 대통령이 자신의 차남 홍업(57·전 아태평화재단 부이사장)씨의 출마와 관련해 처음으로 속내를 털어놓았다. <매일경제> 신문에 따르면 김 전 대통령은 지난 22일 이 신문과 가진 특별대담에서 차남의 출마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주변에서 좋은 말을 안 하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다. 그러나 유죄를 증언한 사람이 나와 허위진술이었음을 고백한 데다 자식에게 고생만 시킨 아버지로서 자식이 명예회복하겠다는데 솔직히 하지 말라고 하기 어려웠다."
여론이 좋지 않다는 것을 알고 있지만 고생만 시킨 아버지로서 '명예회복'을 하려는 아들을 말릴 수 없었다는 얘기다. 정치인 김대중과 아버지 김대중은 다르다는 '인간적인 호소'이다.
아버지 DJ "홍업이 말릴 수 없었다"
김 전 대통령 비서실의 한 관계자도 비슷한 얘기를 했다. 김홍업씨 출마 건에 대한 김 전 대통령의 입장을 묻자 "그 문제에 대해서는 미 CNN과의 인터뷰(토크 아시아)에서 오간 15번째 답변을 보면 김 전 대통령의 심경을 유추할 수 있다"고 귀띔했다.
지난해 10월에 방영된 토크 아시아 인터뷰에서의 관련 문답은 다음과 같다.
- 대통령님의 가장 어려운 시기라고 할 수 있는 것이 대통령님의 자제분들이 사법적으로 곤란을 겪었던 그 때가 아닌가 생각됩니다. 그 때 당시 대통령님은 위대한 정치지도자로서 존경받고 있었습니다만 아버지로서 이런 것에 어떠한 영향을 받으셨습니까?
"한마디로 말해서 국민에게 굉장히 죄송했고 큰 고통을 받았습니다. 동시에 그 사건들은 많은 부분이 조작된 사건이었습니다. 거기에 대해서는 말하자면 여러 가지 많지만 진실을 얘기하는 자체가 옳고 그름이 있기 때문에 여하튼 제가 자식들 교육을 잘못한 점 지금도 그렇게 생각하고 또 아버지 때문에 어떤 면에서는 희생된 자식들에 대해서도 미안하게 생각합니다."
자식 교육을 잘못한 점은 인정하면서도 한편으로는 아버지 때문에 희생된 자식들에 대해서도 미안하게 생각한다는 것이다. 많은 부분이 조작된 사건이었다는 얘기도 했다.
지난 2002년 6월 알선수재와 변호사법 위반 혐의로 구속 수감된 김홍업씨는 2003년 5월 대법원에서 기업체로부터 청탁 명목 등으로 금품을 받고 증여세를 포탈한 혐의로 징역 2년에 추징금 2억 6000만원, 벌금 4억원을 확정 선고받고 형집행정지로 풀려났다가 재수감돼 1년 6개월 10일을 복역한 바 있다. 그후 김씨는 사면복권되었기 때문에 그의 출마에 법적인 제약은 없다.
김씨가 말한 '명예회복'은 지난 2002년 대통령 아버지로 둔 덕분에 겪은 '불명예'를 씻겠다는 것이다. 김씨는 그동안 대통령의 아들을 팔아 알선수재한 '친구를 잘못 둔 죄'는 인정하지만 자신이 검은돈을 받은 적은 없다며 억울함을 호소해왔다.
김홍업의 출마 명분 "명예회복·지역발전·민주평화세력 통합"
앞서의 비서실 관계자에 따르면, 김홍업씨는 무소속 출마를 결심하며 아버지에게 세 가지 명분을 내세웠다. 그중의 첫 번째가 본인의 '명예회복'이었다. 다른 두 가지 명분은 낙후된 지역(서남해안) 발전과 민주평화세력 통합에의 역할론이다.
김씨는 지난 23일 민주당으로부터 공천장을 받는 자리에서 명예회복 얘기는 꺼내지 않았다. 김씨는 이날 출마 선언에서 "이번 선거가 무안·신안의 지역발전과 민주평화세력의 통합에 새로운 출발점이자 전환점이 되기를 바란다"면서 "이를 위해 미력하나마 저의 모든 것을 다 바칠 것을 다짐한다"고 밝혔다.
그러나 김씨의 핵심 측근에 따르면, 김씨는 이번 보궐선거 출마 자체를 자신의 억울함을 호소하는 기회로 삼고 유권자의 심판을 받아 명예를 회복하겠다는 의지가 매우 강하다. 이 측근은 김씨의 무소속 출마 의사를 밝히면서 "김씨가 설령 떨어지는 한이 있더라도 선거유세를 하면서 유권자들에게 자신의 억울함을 직접 호소하겠다는 의지가 강하다"고 말했다.
알다시피 이 지역은 민주당 지지도가 높은 편이다. 현재 민주당의 전신인 새천년민주당 총재를 지낸 김대중 전 대통령의 고향이자, 한화갑 전 민주당 대표의 선거구이다. 민주당은 23일 김씨를 공식적으로 '전략공천' 했다.
김씨의 출마에 대한 이 지역 시민단체의 반발이 거세다. 그러나 재보궐 선거는 투표율이 낮아 정당을 업은 조직표가 당락을 좌우한다. 투표 성향도 젊은층보다는 장·노년층 중심으로 이뤄진다. 인정에 따른 정서적 투표가 이뤄질 가능성이 크다는 얘기다. 따라서 시민단체의 낙선운동 같은 변수가 남아있지만, 그가 '민주당 간판을 달고 출마한 이상 당선은 어렵지 않을 것으로 보인다.
3월초 고향 방문 때만 해도 '무소속 출마' 공언
김홍업씨는 지난 3월초 처음으로 3박4일 일정으로 아버지의 고향 땅을 찾았다. 그의 출마설이 심심찮게 나올 때였다. 그의 한 참모는 "공식 출마 선언을 하기 전에 고향 어르신들에게 먼저 인사를 드리는 것이 도리라는 판단에서 무안·신안을 방문하게 되었다"고 배경을 설명했다.
그때만 해도 그의 40년 지기이자 정치적 후원자인 윤흥렬(58) EtN TV 대표는 필자에게 김씨의 무소속 출마를 공언했다. 윤 대표는 "홍업씨가 민주당 출마는 당에도 부담이고 통합에도 보탬이 안된다는 판단에 따라 무소속으로 나선다는 생각"이라고 밝혔다.
윤 대표는 김홍업씨의 경희대 ROTC(학군단) 동기(10기)이자 둘도 없는 친구이고 사돈지간이다. 김씨는 친구인 윤 대표 집을 제집처럼 드나들다가 형수감으로 점찍어둔 윤 대표의 누이 혜라씨를 형(김홍일 전 의원)과 묶어준 중매쟁이다.
72년 경희대 법대를 졸업한 윤 대표는 ROTC 중위로 전역후 LG애드의 전신인 금성사와 동방기획 등에서 상업광고 제작 CD(creative director) 일을 하다가 86년에 광고기획사를 차려 독립했다.
대신고를 졸업한 김씨는 당초 경희대 의예과에 입학했다. 그러나 2년 만에 경영학과로 과를 옮겨 윤 대표와 함께 72년 졸업과 동시에 ROTC 소위로 임관했다. 의사 공부를 감당할 가정형편이 아니었기 때문이었다고 한다. 그러나 71년 대통령 선거에 출마해 박정희 대통령의 간담을 서늘케 한 아버지를 둔 탓에 엄혹한 철권통치의 유신 치하에서 그가 선택할 수 있는 길은 극히 제한된 것이었다.
한때 출판사와 한약재 수입상을 하면서 돈을 벌기도 했으나, 80년 이른바 '김대중 내란 음모 사건' 때 형과 함께 남산(당시 중앙정보부)에 끌려가 모진 고초를 겪었다. 그후 사실상 미국 망명길에 오른 아버지를 따라가 미국에서 반정부·인권운동을 하다가 다시 귀국하는 아버지의 뒤를 따랐다. 87년 대선을 앞두고 '평화기획'이라는 정치광고 대행사를 만들어 아버지의 선거를 도왔다.
이런 인연으로 윤 대표는 김씨와 한 몸이 되어 ▲평민당 대통령선거본부 홍보팀장(87년) ▲민주당 대통령선거본부 미디어대책실장(92년) ▲국민회의 대통령선거본부 메시지총괄팀장(97년)으로 대선을 세 번이나 치렀다. 아버지를 돕기 위해 정치광고 기획사를 차린 김씨와 광고판에서 잔뼈가 굵은 윤 대표가 자연스레 의기투합한 결과였다.
"음지에서 활동한 홍업씨, 공직 나설 마지막 기회"
김씨는 지난 95년에 윤 대표와 함께 '동교동계' 중에서 맨 먼저 대선캠프를 만들어 활동했다. 그런 점에서 김씨와 윤 대표는 김대중 정부 출범의 일등공신이다. 친구인 윤 대표는 김대중 정부 출범후 <서울신문(당시 <대한매일>)> 전무·부사장을 거쳐 <스포츠서울21> 대표이사를 지냈다.
그러나 아버지가 대통령이 되자 홍업씨는 '할 일'이 없었다. 대통령 재임중에는 선출직이 아닌 공직을 맡지 않기로 선언한 동교동계의 대선공약은 홍업씨에게도 예외없이 적용됐다. 오해의 소지가 있다는 지적에 따라 광고기획사 '밝은세상'도 해체했다.
그래서 그에게는 아무런 공직경력이 없다. 그의 이력을 보면 유일한 기관경력은 '아태평화재단 부이사장' 직함뿐이다. 그 재단도 아버지가 만든 것이다. 이사장인 아버지가 대통령이 되면서 그에게 맡긴 것이다.
'DJ의 아들'이란 점 빼놓고는 선거홍보물에 호소할 마땅한 이력이 없다는 지적에 윤 대표는 아버지와 함께 한 30년 동안의 민주화·인권운동 경력을 들었다.
"김홍업씨는 80년대 미국에서 재시 잭슨 목사와 교감하면서 인권운동가로 활동했다. 김근태 구명운동을 펼쳐 그를 살려낸 것도 그이다. 그밖에도 홍업씨는 주로 '음지'에서 활동했다. 묵묵히 아버지 뒷바라지 등 주로 뒤처리와 욕을 얻어먹는 일을 도맡아 해왔다. 그래서 곁에서 지켜본 나는 친구이지만 존경한다."
김홍업씨가 음지에서 고생한 것은 사실이지만 일반국민은 모른다는 지적에 윤 대표는 "그의 나이가 어느덧 58살이다. 그래서 이번이 마지막 기회라고 여겨서 출마를 권유한 것"이라며 "그는 대통령의 아들이기도 하지만 두 아들의 아버지이기도 하다"고 강조했다. 그로서는 회갑을 맞이하기 전에 공직경력을 남길 수 있는 마지막 기회로 여긴 듯하다.
권노갑·한화갑·윤흥렬씨가 '민주당적 출마' 적극 권유
그래서 김홍업씨에게 '민주당적 출마'를 적극 권유한 것도 윤 대표다. 또 무소속 출마에서 민주당 출마로 선회한 김씨의 심경 변화에는 DJ의 장남(김홍일 전 의원)에게 지역구를 물려준 권노갑 전 민주당 고문과 이 지역 의원이었던 한화갑 전 민주당 대표의 적극적 권유가 크게 작용한 것으로 보인다.
이에 대해서는 지역구 대물림이라는 비판도 있지만, 대통령의 아들이 아니라 동교동계의 일원으로서 오랫동안 고초를 함께 한 '동지적 관계'이기 때문이라는 반론도 있다.
이 사안에 대한 그의 심경과 김 전 대통령의 속내는 DJ의 분신으로 통하는 박지원 비서실장을 통해 간접으로 전달된 메시지에 잘 드러나 있다. 박 실장은 21일 출소 이후 공개적인 첫 언론 접촉에서 김홍업씨의 무안·신안 보궐선거 출마에 대한 입장을 묻는 <연합뉴스> 기자의 질문에 이렇게 답변했다.
"홍업씨는 억울한 면이 있다고 생각한다. (홍업씨가 지난 2002년 이권청탁 사건으로 실형을 선고받은 것과 관련돼) 그 사건에 대해 진술을 했던 분이 작년에 만기출소해 양심선언적 내용의 편지를 보냈다. 그래서 김 전 대통령은 홍업씨에게 재심을 청구하라고 했지만 서초동에 갔다온 사람은 서초동에 다시 가기 싫어한다"
'서초동에 다시 가기를 싫어한다'는 것은 한번 재판을 겪은 사람은 다시는 재판에 휘말리기를 싫어한다는 뜻이다. 그래서 아버지는 재심을 청구하라고 했지만 선거를 통해 명예회복을 하겠다는 아들의 뜻을 막을 수 없었다는 것이다. "품안에 자식"이고 "자식 이기는 부모 없다"는 인정에의 호소다. "정치인 김대중과 아버지 김대중은 다르다"는 얘기다. "김홍업씨는 대통령의 아들이기도 하지만 두 아들의 아버지이기도 하다"는 얘기와 같은 맥락이다.
그러나 명예회복은 재심 청구를 통해서 되는 것이지 선거를 통해서 되는 것이 아니다. 설령 그가 국회의원에 당선된다고 해도 그것으로 그의 '불명예'가 씻어지는 것은 아니다. 다만 공직경력 한 줄을 남길 수 있을 뿐이다. 그것도 '홀로서기'(무소속)가 아닌 '아버지의 후광'(민주당)을 통해서.
번지수 잘못 찾은 김홍업
따라서 자신의 억울함을 널리 호소할 수 있는 기회로 삼기 위한 출마라면 모르지만 그것이 국회의원이 되기 위한 방편이라면 김홍업씨는 번지수를 잘못 짚은 것이다. 그런 상황에서 그의 당선은 역대 선거에서 진보적 성향으로 해석되어온 호남지역의 정치행위를 지역주의로 가두는 것이다. 그것은 한국 정치의 퇴행이자 DJ가 평생 강조해온 민주주의의 기본 원리와 민심에도 반하는 것이다.
더욱이 김 전 대통령은 남북한의 화해협력이 완전히 정착되지 않은 상황에서 사실상 국내외에서 존경받는 유일한 전직 대통령이다. 노벨평화상 수상자이기도 하다. 전직 대통령은 많지만 남북 화해협력과 동북아 평화체제를 구축하는 데 그의 경륜은 '원 오드 뎀'이 아니다.
김홍업씨가 선택할 수 있는 길은 아직 열려 있다. 당초의 결심대로 무소속으로 출마해 유권자의 심판을 받는 길도 있지만, 그보다는 올해 대선에서 아버지 지론대로 '범여권 통합'의 길에 백의종군 한 뒤에 공직 경력과 실적을 갖고 내년 총선에 출마하는 것이 더 당당하다. 내년이면 회갑이 코앞이지만 "내가 죽으면 다른 것은 다 놔두고 비석에 '김대중 선생 비서실장'이라고 새겨주면 영광이여"라고 말해온 권노갑 전 고문도 59세에 초선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