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을 떠난다. 돌아옴을 목적으로 하는 여행은 피부로 스며드는 바람부터 감지해야 한다. 예정된 여행이 아니라면 느껴지는 감촉에 따라 어디로 갈 것인가 결정해도 늦지 않다. 이럴 땐 함께 길 떠날 도반이 없다 해도 섭섭하지 않다.
여행의 참맛은 홀로 떠나는 여행에서 발견한다. 약속 장소로 허겁지겁 달려가거나 오지 않은 사람 기다리다 보면 조인 신발끈이 오히려 여행의 발목을 죄는 경우 허다하다. 시끌벅적하게 떠나는 여행은 수학여행 한 번으로 족하다. 여행은 바람처럼 떠났다가 바람처럼 돌아와야 제 맛이다.
큰 스승을 만나러 가는 길, 그의 책 한 권 챙기는 건 예의
지난 23일(금) 아침, 피부로 느껴지는 바람의 감촉은 부드러웠다. 간헐적으로 옷깃을 파고드는 꽃바람도 마음에 들었다. 이런 날은 거친 산을 오르는 것보다 산책하듯 걸을 수 있는 여행지가 좋다. 그곳에 평온한 바람 불어주는 호수가 있으면 금상첨화다.
이번 길 떠남은 마현마을이다. 적어도 그 마을에 가면 기대하는 모든 것이 충족된다. 마현마을은 내 영혼의 쉼터와 같은 곳이다. 그 마을에 가면 느껴지는 바람조차 평화롭다. 훌쩍 떠났다가 언제든 돌아오고 싶은 시간 발길을 돌리면 되니 돌아오는 부담도 없다.
서울 도심의 언저리에 있는 마을인 마현마을은 남양주시 조안면 능내리에 있다. 마현마을은 실학자 다산 정약용(1762~1836)이 생(生), 거(居), 사(死)를 한 곳이라 하여 다산마을로 부르기도 한다.
여행자가 다산과 인연이 있다면 그동안 몇 차례 생가를 찾았던 일과 몇 해 전 마현마을에서 우연히 들렀던 집이 다산의 후손 집이었으며, 마침 그 집은 대학 후배의 처가집이었기도 했던 인연뿐이다.
오랜만에 만난 후배와 막걸리를 주고 받으며 밤을 보내고 있을 즈음 후배의 장모께서 다산의 후손이라며 어린 시절 책을 뜯어 도배를 했던 기억을 풀어 놓았다. 후배의 장모는 그 책이 아마 선조인 다산 선생께서 만든 것 같다며 아쉬움을 토로했지만, 막걸리잔을 비우더니 "에휴, 당시 사는 게 다 그랬어요"하고 말았다.
마현마을에 가려면 적어도 그의 저서인 <목민심서> 한 권쯤은 챙겨가야 한다. 그것이 마현마을을 찾는 예의이다. 흔히들 목민심서는 정치인이나 관료들이 읽는 책으로 알고 있지만 기실 이 책은 백성이 읽어야 한다.
백성으로서 '목민(牧民)'이란 게 어떤 것인지 알지 못하고서는 대통령이나 시장 군수를 향해 회초리를 들 수 없기 때문이다. 다산은 목민심서에 선비의 길 떠남을 이렇게 적고 있다.
행장 중에 갖출 의복이나 도구 같은 것은 옛 것을 그대로 쓰되 새로 만들지 말라. 수행하는 사람이 가진 것이 많아서는 안 된다. 선비가 길 떠남에 있어 이부자리와 속옷 그리고 고작해야 책 한 수레쯤 싣고 가면 될 것이다. - 목민심서 '치장(治裝)'
길 떠나는 것은 자신의 마음을 정(淨)하게 하는 데 목적이 있다는 것이다. 떠들썩한 여행은 귓전을 어지럽히는 바람만 느끼지만 홀로 떠난 여행에서는 바람에 마음을 씻을 줄 알아야 한다. 요란하게 치장하고 떠나는 여행보다는 책 몇 권을 챙겨가는 게 낫다는 것이다.
간혹 '여행지에까지 무슨 책이람'하고 투덜거리는 이도 있다. 그렇게 말하는 이 평소에도 책을 가까이 하지 않음은 자명한 사실이다. 길 떠나면서 먹을 것부터 챙기는 부모 밑엔 역시 군것질부터 하려는 자식 있기 마련인 이치다.
서울에서 덕소 방향으로 길 머리를 잡아 팔당댐을 지나면 마현마을 초입새가 나온다. 버스를 이용하면 그곳에서 내려 걷는다 해도 먼 거리는 아니다. 길을 따라 조금 가면 작은 고개가 나온다. 그곳이 마현고개다.
고개를 내려가면 다산의 생가가 있는 유적지가 먼저 객을 맞이한다. 유적지는 제법 규모를 자랑한다. 생가 인근에 공사중인 실학박물관까지 완공되면 여행길은 더 지체된다. 다산의 시작품으로 조성된 문화의 거리를 지나 다산문화관과 기념관을 둘러본다. 다산의 삶과 생애를 확인할 수 있는 곳이다.
기념관을 나서면 책을 펼쳐들고 앉아 있는 다산을 만날 수 있다. 펼쳐든 책이 어떤 책인지 알 수 없지만 여행자는 목민심서가 아닐까 추측해 본다. 다산의 체취를 느껴보기 위해 생가인 여유당(與猶堂)으로 간다.
당호를 '여유'라 지은 연유에 대해 다산은 그의 회고록인 <자찬묘지명>에 "겨울 내를 건너고 이웃이 두렵다는 의미를 따서 지었다"라고 적었다. 이웃이 두려웠다는 다산의 고백에서 여행자는 그의 내면에 드리운 그림자 하나를 발견한다.
당호를 지을 당시만 해도 다산은 마음의 평화를 찾지 못하고 있었던 듯싶다. 오랜 유배생활 끝에 고향으로 돌아왔지만 그를 바라보는 시선은 늘 차갑기만 했다. 개혁사상가에다 시절에 역행하는 '예수쟁이'라는 꼬리표가 그를 이웃까지 두렵게 했을 것이다.
아스라한 강변에 어촌이 보이고
위태로운 산머리엔 절간이 붙어있다
생각이 맑아지니 사물이 경쾌하게 여겨지고
몸이 높아지니 신선이 멀지 않구나
안타까움은 뜻 같은 길손이 없어
현묘한 도 찾는 토론 못함이로다
- 다산의 저서 여유당집 권2, 1782년
75년의 생애 중 22세에 진사에 합격하여 19년 동안 관직 생활을 하다 18년 동안 유배 생활을 했으니 그 세월이 장구하다. 그를 긴 유배길에 오르게 한 것은 그와 약전, 약종 형제를 비롯한 친인척이 천주교 교인이었기 때문이다. 이때 받은 다산의 세례명은 '요안'이다.
다산의 운명을 바꿔버린 천주교 입문
다산이 천주교와 연관을 맺은 것은 우연이 아니다. 형인 약전과 약종이 천주교인데다가 한국천주교의 창설자며 최초 영세자인 이승훈(세례명 베드로)이 다산의 매형이다. 또한 한국천주교 초기 역사를 만들어낸 황사영, 홍재영, 이벽, 정철상 등이 사위나 조카 관계이다. 다산으로서는 비켜갈 수 없는 인연들이다.
세월이 흐른 지금에야 다산의 실학사상이 평가 받지만 당시만 해도 다산의 행보는 반역에 지나지 않았다. 다산 스스로 "나는 외탁을 했다"라고 밝혔을 정도로 그의 사상은 외가인 해남 윤씨 가문과도 깊은 관련을 맺는다.
그의 외증조부인 공재 윤두서가 실학에 깊은 관심을 보였던 사실로 미루어 공재의 사상이 다산에게 큰 영향을 끼쳤을 것으로 짐작된다. 공재는 고산 윤선도의 증손으로 진사에 합격했으나 당쟁으로 벼슬길을 포기하고 문인화가로 이름을 떨쳤다. 또한 그는 다산이 그러하듯 경제·병법·천문·지리·산학·의학·음악 등 각 방면에 능통했다.
여유당에 서니 다산의 생가가 명당이라는 것을 입증이라도 하듯 마음이 고요해진다. 불어오는 바람마저 여유롭다. 여유당에서 다산의 체취를 맡으려 애써 보지만 어떤 것도 느껴지지 않는다.
그의 글 읽는 소리는 강바람에 실려간 지 오래고 다산의 흔적이 배어 있던 생가는 1925년 대홍수때 쓸려가고 말았다. 지금 생가 건물은 지난 1986년에 다시 지었다. 옛 건물에 대한 기록이나 사진이 없어 현 생가와 예전 건물은 차이가 있을 것으로 짐작한다.
아무려나 집을 다시 지었다고 하나 다산의 흔적이 없는 것은 아니다. 집 앞 개울인 소내(笑川)는 사라지고 없지만 그가 뛰어 놀았거나 거닐었던 마당은 그대로이다. 어릴적 아비로부터 '귀농'이라 불리기도 했던 다산의 가문은 아비가 관직을 받기 전까지 중인 신분이었다.
당시엔 비록 양반가문이라 해도 3대가 내리 관직에 나가지 않으면 중인 신분으로 살아가야 했다. 다산은 잠시 양반 가문이 되나 유배길에 오르면서 태어났을 때와 같이 중인 신분으로 삶을 마감한다. 중인으로 격하된 다산의 신분이 양반으로 신원되는 시기는 사후 74년 흐른 1910(순종 4년)년이다.
여유당 뒷산엔 다산의 묘소가 있다. 양지바른 언덕에 자리잡은 다산의 묘소는 그의 부인인 남양 홍씨와 합장묘다. 전면에 소나무만 없으면 강 건너 마을인 분원리까지 보일 것 같다. 막 피기 시작한 산수유꽃이 다산에게 봄소식을 알려주는 봄날, 묘소엔 그를 찾아온 손님들이 많다.
청주에서 온 대학생들이 단체로 다산에게 예를 올리는 모습을 보며 당시 견디기 어려운 고난의 시간을 보냈지만 후일 큰 스승으로 추앙받는 일이 부럽기만 했다. 죽어서 대접받지 못하는 이가 더 많은 것이 어제 오늘의 일이 아니기 때문이다.
다산을 찾아온 이들은 대학에서 한문을 전공하는 학생들이라 했다. 비석을 줄줄 읽는 학생들의 모습이 대견하여 한참을 지켜보았다. 다산을 모신 사당은 그의 시호를 딴 문도사(文度祠)로 지어졌으나 굳게 잠겨 있다. 기일인 음력 2월 22일이나 매년 10월 중순 다산문화제 때 와야 들여다 볼 수 있다.
다산유적지를 나서다 건물 하나가 자꾸만 눈에 거슬린다는 느낌이 들었다. 생가인 여유당에서도 그런 느낌을 주는 건물이었다. 다산의 집터가 명당이긴 하지만 앞에 버티고 있는 건물이 시야를 가려 한강을 바라볼 수 없었다.
다산의 심기를 불편하게 했던 어사 박문수
한옥풍으로 새로 지은 건물이라 굳이 신경쓰지 않아도 될 것이지만 그래도 뭔가 사연이 있어 보였다. 마침 곁을 지나는 문화유산해설사에게 무슨 집이냐고 물었다.
"옛날 암행어사 박문수가 살았던 집인데 다시 지었다고 합니다. 당시 규모가 99칸이었다니 대가집이었지요. 다산 선생께서 저 집이 불편했던지 기록으로 남기기도 했더군요."
다산은 자신의 집에서 넘어지면 닿을 거리에 있는 집이 못마땅했다고 한다. 요즘말로 조망권 문제인지 사상이 달라서인지 확인할 수는 없지만 이웃사촌과 불편하게 지냈음은 확실하다. 해설사가 다산의 영정에 대해 한 마디 덧붙인다.
"몇 해 전 초의선사께서 그렸다는 다산의 초상화를 본 적이 있었어요. 지금의 영정 사진과는 전혀 다른 모습이었습니다. 다산 선생께서 외탁을 했다고 스스로 밝혔듯 공재 윤듀서 선생과 비슷한 풍모더라구요. 그 사실에 놀랐죠."
현재 다산의 표준 영정이라는 것이 실제 다산의 모습과는 다르다는 게 해설사의 증언이다. 그는 당시 그림을 카메라에 담아 왔다고 했지만 집에 있다고 했다. 그가 그림을 처음 본 곳이 절두산 천주교 성지라고 하니 사실이라고 믿어야 할 것 같다.
박문수가 세상을 뜬 지 8년 째 되던 해 다산이 태어났으니 둘은 단 한 번이라도 만나지 못했다. 하지만 어린 시절 중인 신분으로 살아야 했던 다산으로서는 대가집을 바라보는 마음 편치만은 않았을 것 같다. 어쩌면 어사 박문수의 또 다른 모습을 엿보았기에 고개를 돌렸을 수도 있겠다.
어사 박문수라면 청렴하기로 소문난 사람인데, 어찌 당시 소유할 수 있는 최대 규모인 99칸 집에서 살았을까 하는 궁금증이 일었다. 다산 유적지를 나와 박문수가 살았던 집으로 갔다. '대가농원'이란 간판이 붙은 집은 체험농장과 음식점을 겸하고 있었다. 정원을 가꾸고 있는 안주인에게 어서 박문수에 얽힌 사연을 물어 보았다.
"마현마을은 예로부터 청주 한씨가 거세하던 마을인데, 이 집도 청주 한씨 집이었다고 합니다. 원래는 어사 박문수 누나 집인데 후에 박문수 대감이 샀다고 하더군요."
300여년 전의 일이니 자세한 것까지야 알 수 없지만 어사 박문수가 살았던 집은 분명했다. 다산에 비해 탄탄대로의 길을 걸었던 박문수였으니 대가집을 소유할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도 한성판윤을 거쳐 예조판서와 우참찬에 올랐던 박문수이지만 어쩐지 옛날이야기처럼 전해지는 그의 청렴도와는 어울리지 않았다.
살아오면서 99칸 양반집 이야기는 들었지만 실제 만나본 적은 없었다. 강릉의 선교장이 꼭 그만했다고 하지만 지금은 절반 정도만 남아 있는 실정이고 보면 주춧돌만이라도 구경하고 싶었다.
"주춧돌이 있다고 들었습니다. 구경할 수 있나요?"
"전 주인이 집을 팔면서 주춧돌을 다 가지고 갔어요."
아쉽다는 듯 탄식을 내뱉는데 안주인이 호수가에 가면 볼 수 있다는 말을 덧붙인다. 안주인이 일러준 길을 따라 팔당호로 나갔다. 가는 중에 대가농원으로 가는 길을 '어사길'이라고 명한 팻말을 발견했다. 지금까지 들었던 모든 것이 사실이라는 것에 여행자의 마음이 들뜨기 시작했다.
다산을 만나러 왔던 여행길에서 우연이지만 어사 박문수의 흔적을 발견했다는 것만으로도 큰 수확인 것이었다. 그동안 수차례 마현마을에 왔었지만 무심코 지나쳤던 역사적 사실을 오늘에서야 찾아낸 것이니 흥분할만도 했다.
오래 전 다산이 거닐었던 강변은 팔당댐이 생기면서 물에 잠기고 말았다. 댐은 강변 마을을 호반 마을로 만들었다. 능수버들이 낭창거리던 옛날 겸재 정선의 화폭에 담기기도 했던 강변은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평일임에도 마현마을은 나들이 나온 이들이 많다. 호수변을 거니는 사람들의 표정에서 봄향기가 묻어 나온다. 나들이 객들의 걸음은 바쁠 것 없다는 듯 여유롭다. 호수 건너편 마을은 분원마을이다. 조선조 궁궐에서 쓰는 도자기를 굽던 곳으로 가마터는 지금도 발굴 중이다.
대가집에 사는 안주인이 일러준 '호반' 집은 호수변 언덕에 있었다. 어사 박문수가 살았던 집의 주춧돌은 정원 인테리어용으로 쓰이고 있었다. 호수가에 놓여진 주춧돌은 나들객들의 의자가 되기도 하고 고인돌의 밑받침이 되기도 했다.
다산 정약용과 어사 박문수의 흔적이 녹아 있는 마현마을은 연인뿐 아니라 가족들과 함께 와도 좋다. 마을은 학생들의 M.T 장소로도 알려졌다. 안동의 하회마을을 연상케하는 마을이지만 호수가 만들어내는 아름다운 풍경은 어디서도 볼 수 없다.
여행자는 그들이 걸었던 길을 되짚어 가면서 마현마을을 한 바퀴 돈 후 다산의 흔적이 있는 운길산 수종사로 향한다. 수종사는 마현마을에서 대성리가는 강변길을 달리다 송촌리에서 좌회전하여 급한 산길을 올라야 한다. 걸어서 30분, 차로는 5분 남짓이면 불이문에 이른다.
다산이 즐겨 찾았던 수종사는 그의 해방구
수종사(水鐘寺)는 창건연대가 확실하지 않다. 세조의 창건설화가 전해지고 있으나 1439년(세종 21)에 세워진 정의옹주(貞懿翁主)의 부도가 있는 것으로 미루어 창건연대는 훨씬 이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수종사는 한국전쟁 때 소실되었으며 현재의 절집은 1974년부터 오늘에 이르기까지 신축한 건물들이다. 단청 색이 바라진 않았지만 서울 근교 절터로서는 수종사만한 곳도 없다. 운길산 중턱에 꼭 필요한 집만 들어선 수종사의 백미는 절 마당에서 바라보는 양수리의 물길이다.
북한강과 남한강이 만나는 두물머리인 양수리의 풍경이 아스라하다. 절집에 들어서면서 탄성을 지르는 이유들이다. 탁트인 양수리 풍경을 느긋하게 즐기려면 다원인 삼정헌에 들러볼 일이다.
부처님의 자비로 운영되는 다원은 차값을 따로 받지 않는다. 몇 시간이고 죽치며 창 밖의 풍경을 감상하기엔 그만인 곳이다. 앉아 있는 시간이 오래라 염치없다 생각하면 준비된 모금함에 성의껏 넣으면 된다.
다원에서 바라보는 양수리 풍경은 또 다른 세계이다. 어떤 계절 어느 시간에 가도 좋은 곳이다. 그것도 지루하다 싶으면 수종사를 즐겨 찾았던 당대의 인물들과 대화를 나눠보는 일도 즐겁다. 수종사는 예로부터 풍광이 아름다워 시인묵객들과 운수납자들이 즐겨 찾았다.
수종사를 천하제일의 명당이라고 노래했던 서거정을 비롯해 홍언필, 송인, 이이, 이덕형, 정백창, 이명한, 홍만종, 목만중, 이만용, 김종직, 김집, 송익필, 김안국, 이춘원 등과 삼당시인이었던 최경창과 다성 초의선사, 방랑시인 김병연, 다산 정약용 등이 수종사의 아름다움을 노래했다.
이들의 면면만 봐도 수종사가 어떤 절집이었는지 알 수 있다. 이들은 수종사의 아름다운 풍광을 노래하였으며 그 시들은 아직까지 전해진다. 다산도 수종사를 찾아 많은 시편을 낳았다.
어린 시절에 노닐던 곳을
어른이 되어 오니 한 가지 즐거움이고
곤궁할 때 지나갔던 곳을
뜻을 얻어 이르메
한 가지 즐거움이며
혼자서 갔던 곳을
좋은 손님들과
좋은 벗을 이끌고 이르니
한 가지 즐거움이다
- 다산 정약용 시 '유수종사기(游水鐘寺記)' 전문
한편의 시에 다산의 생애가 다 담겨 있는 듯하다. 그는 말년에 여유당을 찾아온 벗들과 수종사에 자주 올랐던 것으로 보인다. 유배생활로 인해 오랜 세월 집을 떠났다가 돌아온 다산이 회한에 젖어 쓴 시도 있다.
수종사 절집은 아스라한데
이내 속에 기와 홈통 알아보겠네
호남 땅 사백개의 많은 사찰도
이 나는 누각보단 크지 못하리
- 다산 정약용 시 '효전기강행절구(效錢起江行絶句)' 전문
유배생활을 하면서 만났던 남도 땅의 많은 절집 누각도 수종사만 못하다고 노래한 다산의 심정이 이해되는 작품이다. 다산은 만년을 저술활동으로 보냈으며 그가 남긴 책이 500여 권에 이른다. 분야도 다양하여 그를 부를 때 과학자이자 사상가요, 타고난 예술가이다.
모든 혁명가가 예술가였듯 다산도 당시의 혁명가였다. 그가 꿈꾸는 세상이나 사상을 담아낼 그릇이 부족했던 당시 그의 삶은 핍박받고 곤궁할 수밖에 없었다. 모든 예술가가 혁명가를 꿈꾸듯 그의 삶 역시 당시의 부조리한 세상을 뒤집는 일이었다.
다산 정약용의 흔적을 찾아 떠난 여행은 수종사에서 마무리된다. 햇살이 비켜드는 시간 양수리는 뿌연 안개로 덮였고 여행객은 다산이 걸었던 길을 따라 운길산을 내려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