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에서는 1960년대부터 군부 주도 하에 산업근대화가 본격화되었다. 그리고 이 시기의 산업근대화는 그 부정적 측면에도 불구하고 한국의 경제성장에 일정한 기여를 한 것이 사실이다.
그런데 산업근대화의 원동력이 무엇인가와 관련하여 이를 일제식민통치의 유산으로 설명하는 견해가 상당한 설득력을 얻고 있다. 이는 일본에서 이식된 '위로부터의 군사문화'가 없었다면 1960년대 이후에 한국 지배집단이 국민을 그처럼 강력하게 동원할 수 없었을 것이라는 견해다.
이러한 견해는 '위로부터의 혁명'인 메이지유신의 전통이 일제식민통치를 거쳐 한국의 산업근대화에까지 영향을 주었다는 논리를 담고 있다. 또한 이러한 견해는 동아시아에는 아래로부터의 원동력이 미약하다는 함의를 저변에 깔고 있는 것이기도 하다.
위와 같은 견해가 설득력을 가지려면, 그 전제가 되는 '메이지유신은 위로부터의 혁명이었다'는 명제가 역사적 타당성을 갖고 있어야 할 것이다. 만일 메이지유신이 오늘날 한국인들의 상식대로 위로부터의 혁명이 아니었다면, 위의 견해는 그 근저에서부터 설득력을 상실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이 문제에 관한 시사점을 얻기 위하여, 일본 근현대 노동운동사를 전공하는 미국 하버드대학 앤드루 고든 교수의 <현대 일본의 역사>(2005년, 도서출판 이산)를 살펴보기로 한다.
기존의 상식에 따르면, 메이지유신은 '위로부터의 혁명'으로 인식되고 있다. 이것은 아래로부터의 혁명인 서양 근대의 혁명들과 대비되어 사용되고 있다. 메이지유신을 '위로부터의 혁명'이라고 말한 것은 유신의 주역들이 무사였기 때문이다.
참고로, 한국인들은 '사무라이'라는 용어를 즐겨 사용하고 있지만, 사무라이는 하급 무사의 일종에 불과했으므로 사무라이 대신 무사를 사용하는 것이 정확하다는 게 일본 사학자들의 대체적인 입장이다.
메이지유신이 정말로 위로부터의 혁명이었다면, 이 혁명의 주역들은 이전 시대에 봉건적 특권을 누리던 귀족계급이었어야 한다. 그러나 앤드루 고든은 이 점에 대해 반기를 들고 있다.
그는 메이지유신이 '중하급' 무사들에 의해 주도되었으며 그들은 하층 엘리트에 불과했다는 점을 강조하고 있다. 또한 그는 '메이지 반란군'들은 혁명적 에너지를 보유한 매개자(중간계층)들이었으며 좌절된 야망과 지배욕의 소유자들이었다고 강조하고 있다. 실제로도, 메이지유신 이전의 하급 무사들은 그 생활 수준이 일반 서민과 별로 다를 게 없는 사람들이었다.
이러한 이유 때문에 앤드루 고든은 메이지유신을 '좌절한 하위 엘리트층의 혁명'이라고 규정하고 있다. 그는 무사 중에서도 중하급 무사가 주도했기 때문에 이것을 상위 엘리트층의 혁명이라고 볼 수 없으며, 그렇기 때문에 메이지유신은 아래로부터의 혁명이라는 입장을 취하고 있다.
앤드루 고든의 시각은 다음과 같은 두 가지 이유에서 타당성을 갖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첫째, 메이지유신의 주역들은 '무사'라는 측면에서는 에도시대(江戶時代, 1603~1867년)의 지배층이라고 오해될 여지가 있으나, '하급' 무사라는 측면에서는 분명히 상층 엘리트에 포함될 수 없는 사람들이었다.
'아래로부터의 혁명'을 주도한 서양의 부르주아도 어떤 측면에서 보면 사회의 '지도층'이라고 할 수 있는 사람들이었다. 그들은 교양과 재산을 바탕으로 대중에 대해 일정한 지도력을 갖고 있는 사람들이었다. 하지만, 그들은 분명히 봉건시대의 지배층은 아니었다. 그들은 봉건시대의 '중간계층'에 불과한 사람들이었다.
현대 한국의 경우, 고등교육을 받고 중소기업을 운영하는 기업가나 중소 규모의 교회를 이끄는 목사는 서민들의 입장에서는 사회 지도층이라고 할 수 있으나, 거시적인 측면에서 볼 때에는 사회의 중간계층 혹은 중간계층의 리더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이 점은 메이지유신의 주역들인 하급 무사들에 대해서도 동일하게 적용될 수 있을 것이다.
둘째, 메이지유신들의 주역들은 사회변혁을 주도할 만한 역량을 보유하고 있었다. 그들은 합법적으로 '검'을 보유했고 하층 서민들에 대해 일정한 지도력을 갖고 있었다. 물론 그들이 서양 부르주아처럼 높은 수준의 경제력을 보유하고 있었던 것은 아니지만, 그들은 '검'이라는 무력의 보유·행사를 통해 사회 변화를 주도할 만한 가능성을 갖고 있던 사람들이었다.
이러한 점들을 볼 때, 일본의 하급 무사들은 이전 사회의 중간계층으로서 다음 세대를 주도할 만한 역량을 보유한 서양 부르주아와 유사한 측면을 갖고 있었다고 할 수 있다. 메이지유신을 아래로부터의 혁명이라고 인식하는 앤드루 고든의 시각에 힘을 실어주는 측면이다. 이 말은 물론 경제적 측면을 배제한 상태에서 하는 말이다.
서양의 부르주아와 유사하든 아니든 간에, 확실한 것은 일본의 하급 무사들은 분명히 봉건시대의 지배층이 아니었다는 점이다. 이는 군부독재시기(1961~1992년)의 한국에서 군부가 사회지배층이긴 했지만, 그렇다고 하급 장교나 하사관까지 지배층에 포함시킬 수 없는 것과 마찬가지일 것이다.
지금까지 살펴본 바와 같이, 기존 사회에 대해 불만을 품고 있는 하급 무사들이 주도한 혁명이라는 점에서 메이지유신은 분명 '위로부터의 혁명'은 아니었다. 오히려 그것은 아래로부터의 혁명에 보다 더 가까운 것이었다.
그러므로 메이지유신을 위로부터의 혁명으로 규정하는 전제에서, 그와 같은 '위로부터의 군사문화'가 일제식민통치를 통해 한국에 유입되었고 또 그러한 일제의 유산이 한국 산업근대화의 원동력이 되었다고 하는 주장은 위와 같은 이유에서 설득력을 갖기 힘들 것이다.
따라서 한국 산업근대화의 진정한 원동력이 무엇이었는가에 관한 탐구는 전면적으로 다시 시도되어야 할 것이다. 또한 차제에 동아시아 사회의 원동력을 위로부터가 아닌 아래로부터 규명하기 위한 지적 노력 역시 적극적 평가를 받을 필요가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