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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드킬 조사를 하는 모습.
로드킬 조사를 하는 모습. ⓒ 손상호
이처럼 도로교통으로 동물이 살해되는 이른바 '로드킬(road kill)'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방안이 얼마 전에 발표된 적이 있다. 아예 도로 양편을 막는 해결방법이다. 도로에 동물이 진입할 수 없도록 한다면 차에 치이는 일이 없을 테니 방법은 방법이다.

그러나 문제는 단지 도로 위에서 동물들이 죽는 것만은 아니다. 이 땅이 사람만 사는 곳이 아니라 동물들도 함께 살아갈 터전임을 생각한다면 그런 방법을 해결책이라고 제시하기는 어려울 것이다. 동물들이 죽는 것은 도로가 동물들의 생활을 위한 이동경로를 단절시키기 때문이다.

지난달 모 일간지에 실렸던 사진기사는 참으로 많은 것을 가르쳤다. 기사에는 도로를 건너던 개가 차에 치어죽자 같이 가던 개가 차에 달려들어 범퍼를 물고, 같은 모양의 차량이 지나가면 짖어대는 모습을 모두 다섯 장의 사진을 통해 보여주었다. 그 모습이 마치 거세게 차를 몰고 문명의 이기를 누리는 잘난 '사람'을 향한 시위로 보였다.

인간 이외의 자연을 '정복' '지배'의 대상으로 대하는 사람들의 태도는 근대 과학적인 세계관에서 비롯된다.

이 세계관에서는 자연은 인간에게 정복과 개발의 대상일 뿐이다. 사람을 품어주는 어머니도 아니고 신비한 그 무엇도 아닌 다만 무생물인 지질일 뿐이다. 동물들은 함께 살아가는 생명이라기보다는 이용할 물건에 불과하다.

그리하여 자연은 무참히 파헤쳐지고 잘리고 말못하는 짐승은 상품으로 거래된다. 물건은 값어치가 없어지면 과감하게 버려지는 법이다. 철저히 개발의 대상이 되고 상품이 된 자연은 인간에게 무엇을 주고 있는가?

이러한 자연관은 현대의 과학세계를 가능하게 하였지만 또한 이 세계에서 발생하는 위험은 그로부터 오는 것은 아닌가? 동물들의 생명을 가볍게 여기는 생각은 사람들의 생명마저도 가볍게 여기는 것으로 나타나고 있는 것은 아닐까? 오로지 강자인 인간의 편의만을 위주로 한 삶은 가능할까?

쥐를 위해 밥을 남기던 어진 마음 어디로 갔나

예로부터 '감을 딸 때도 몇 개를 남겨 두었고 흘린 이삭도 샅샅이 거두지 않는다' 하였다. '쥐를 위하여 밥 한 덩이 남겨두고 나방을 불쌍히 여겨 불을 켜지 아니한다'고도 하였다.

'콩을 심으면 하나는 하늘 나는 새를 위해서, 하나는 땅에 사는 벌레를 위해서, 하나는 사람을 위해서'라는 가르침을 떠올린다. '뜨거운 물을 함부로 버리지 말라'는 말도 떠올린다. 사람으로 인하여 다른 생명들이 죽어서는 안 된다는 어진 마음이 담긴 가르침이라 생각된다.

그러나 요즘은 까치 때문에 귀한 과실 농사 망치지 않을까 염려하여 과수원에 철망을 씌우고 폭발음을 낸다. 쥐는 퇴치하고 나방은 전기그물망로 태운다.

이런 형편에서 앞의 얘기들은 한가로운 소리처럼 들릴지 모르겠지만, 세상에 사는 온갖 생명들에 대해 측은히 여기는 마음이 얼마나 중요한 것인지 깨우쳐주고 있다.

법률상 소유자는 물건의 사용·수익·처분의 권능을 가진다. 하지만 이 세상이 오로지 인간만 살아가는 곳이 아니라 여러 생명이 함께 어우러져 살아가는 곳이다.

어쩌면 인간이 살아가는 것 자체가 다른 생명 위에서 가능한 것인지 모른다. 선인들이 발걸음 무겁게 하라는 말씀도 단지 의젓한 걸음걸이만을 가르친 것으로는 보이지 않는다. 신발 아래 깔리는 생명을 걱정하였던 것은 아닐까.

동물의 삶은 인간의 문제

살아있는 것에 대한 존중과 연약한 생명을 측은히 여기는 마음이 사람의 어진 바탕의 시작이 아닌가? 우리는 어느덧 이 본성을 잃어버리고 있는 것은 아닐까? 인간 이외의 생명에 대한 연민을 잃어버리는 것은 그것은 결국 인간에 대한 경시로 이어지는 것은 아닐까?

노예를 인간으로 취급하지 않거나 여자를 남자와 동등한 권리를 가지는 사람으로 취급하지 않았던 것도 결국은 모두 같은 맥락이 아닐까? 인간이 인간 이외의 생명에 대해 가지는 마음과 사람 사이에서 나타나는 이러한 마음에 무슨 질적인 차이가 있을까? 차를 운전하는 사람이 보행자를 보호하려 하지 않는 것도 근본적으로는 생명에 대한 경시에서 비롯되는 것은 아닌가?

생명에 대한 존중은 사람에 대한 존중으로 이어진다고 믿는다. 사람이 편하자고 파헤치고 깎고 다듬는 일이 인간의 삶을 파헤치지 않으려면, 적어도 모든 살아있는 것들에 대한 배려와 존중에 바탕을 두어야 한다. 인간의 풍요를 위하여 알지 못하는 사이에 희생되는 이름모를 생명의 죽음 앞에서 경건하여야 한다.

이 땅에는 지배자만 사는 것은 아니다. 동물의 삶의 환경은 인간의 문제이다.

덧붙이는 글 | 이 기사를 쓴 송기춘 교수는 전북대에서 헌법을 가르치고 있습니다. 이 기사는 인권연대 웹진 주간 <사람소리>에도 실렸습니다. 오마이뉴스는 직접 작성한 글에 한해 중복 게재를 허용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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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권연대는 1999년 7월 2일 창립이후 세계인권선언의 정신에 따라 국내외 인권현실을 개선하기 위해 노력하고 있는 인권단체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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