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마이뉴스의 모토는 '모든 시민은 기자다'입니다. 시민 개인의 일상을 소재로 한 '사는 이야기'도 뉴스로 싣고 있습니다. 당신의 살아가는 이야기가 오마이뉴스에 오면 뉴스가 됩니다. 당신의 이야기를 들려주세요.】
어릴 때
내가 살던 고향집 곁에는
미나리꽝 두 개가 나란히 나란히
어깨동무를 끼고 있었다
해마다 땡겨울이 다가오면
나와 동무들은 미나리꽝을 학교운동장 삼아
앉은뱅이 스케이트를 타고 팽이를 치며 놀았다
간혹 꽁꽁 언 미나리꽝이 깨져 메거지를 잡는 아이들도 있었다
기다리던 봄이 다가오면
미나리꽝은 거머리와 마을 아낙네들의 차지였다
아버지는 금방 베낸 그 싱싱한 미나리를 안주 삼아
미나리빛 댓병 속에 든 소주를 홀짝홀짝 비워냈다
어머니는 빛깔 좋고 통통한 생미나리는
식초에 잠시 담궜다가 저녁 밥상에 쌈으로 올리고
떨거지 미나리는 살짝 삶아 조물조물 나물로 무쳤다
고향집의 봄은 늘 미나리와 함께 다가왔다
벚꽃이 살짜기 피어나는 오늘은 미나리가 몹시 그립다
향긋한 생미나리를 된장에 콕 찍어 먹으면
겨우 내내 찬바람만 쌩쌩 날리던
그 가시나와의 사랑도 금방 이루어질 것 같다
봄미나리, 너를 쌈으로 싸서 먹으면
나보다 더 힘들고 가난하게 사는 사람들
이리저리 찌그러진 수많은 꿈이
여기저기 파랗게 돋아날 것만 같다
- 이소리, '미나리꽝 앞에 서면' 모두
저만치 미나리꽝에 연초록빛 봄이 쑥쑥 자란다
봄이 점점 깊어가고 있다. 길거리에 선 벚나무가 하얀 꽃망울을 터뜨리기 시작하면서 들녘 한 귀퉁이에 있는 미나리꽝에도 연초록빛 봄이 쑥쑥 자라고 있다. 상큼한 봄 내음이 묻어나는 미나리꽝에서 봄 햇살에 날을 번득이는 조선낫을 들고 싱싱한 미나리를 베고 있는 아낙네들의 손길도 더없이 바쁘다.
저만치 미나리꽝 옆에도 온통 봄 내음으로 가득하다. 졸졸졸 흘러내리는 맑은 도랑물에 금방 베낸 미나리를 씻고 있는 아낙네들의 잽싼 손놀림에서도 향긋한 봄빛이 묻어난다. 연초록빛 미나리물이 흠뻑 배인 아낙네들의 손끝에서 풍기는 향긋하고도 달착지근한 미나리 내음, 그 상큼한 미나리 내음을 맡고 있으면 어느새 봄이 되어버린 것만 같다.
독특한 향과 아삭아삭 씹히는 달착지근한 깊은 맛이 으뜸인 미나리. 미나리는 봄이 제철이다. 미나리는 피를 맑게 할 뿐만 아니라 비타민A와 C, 칼슘, 철분 등 무기질이 듬뿍 들어 있어 춘곤증에도 그만이다. 게다가 미나리는 감기, 냉증, 고혈압, 동맥경화, 해독작용 등 환절기 건강을 되찾아주는 보약과 같은 알칼리성 채소이다.
예로부터 궁중에 바칠 정도로 귀한 대접을 받은 미나리의 역사도 깊다. 중국 진(秦)나라 때 여불위(呂不韋)가 지은 사론서(史論書)에는 "살진 미나리를 임금께 바치고 싶네"라는 노래가 있다. '헌근(獻芹, 변변치 못한 미나리를 바친다는 뜻)'이란 말도 이 때문에 생겨났다. 고려 때는 '근저'라는 미나리 김치를 제상에도 올리기도 했다.
만병을 다스리는 약용식물 미나리
조선 중기 의학자 허준(許浚, 1546∼1615)이 지은 <동의보감>에 따르면 미나리는 달고 평온하여 정수(뼈 속에 있는 골수)를 돕고 대장, 소장을 통하게 하고 번갈(가슴이 답답하고 열이 나며 목이 마르는 증상)을 그치게 한다. 또 미나리는 몸에 열을 없애며 살균을 하고 소변에 피 섞이는 것, 임질, 황달을 다스리며 간을 좋게 한다.
그뿐만이 아니다. 독특한 향과 맛과 뛰어난 미나리는 보온, 발한 작용을 하는 특유의 방향성분을 지니고 있어 감기, 냉증, 혈압 등에 효과가 있다. 미나리는 해독작용 또한 뛰어나 숙취 제거에 도움을 주는 것은 물론 고혈압, 변비 해소, 동맥경화, 땀띠, 동상, 여성의 월경과다증 등에도 그만이다.
당나라 진장기(陳莊器)가 쓴 <본초습유(本草拾遺)>에 따르면 미나리 생즙은 어린아이들의 고열을 내려주고 두풍열(頭風熱, 머리가 항상 아프거나 부스럼이 나는 병)을 치료한다. 게다가 <약용식물사전>에는 "미나리잎을 매일 섭취하면 류머티즘에 유효하고 여러 가지 병의 증세에 효과적"이라고 쓰여 있다.
봄철 잃어버린 입맛을 되찾게 해주고 주독까지 빠지게 하는 약용식물 미나리. 미나리는 복국을 끓일 때에도 복어의 독성을 약하게 하기 위해 반드시 들어간다. 요즈음 들어 고혈압 환자들이 틈틈이 생미나리즙을 짜내 먹는 것도 미나리가 혈압을 내리게 하는 뛰어난 효능까지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싱싱한 생미나리를 된장에 찍어 먹거나 쌈을 싸서 먹어보라
나그네는 어릴 때부터 이른 봄철 미나리꽝에서 갓 베낸 생미나리를 된장에 찍어 먹거나 쌈을 싸서 먹는 것을 참 좋아했다. 특히 입맛이 없을 때 생미나리를 식초에 잠시 담가뒀다가 흐르는 물에 깨끗이 씻어낸 뒤 곧바로 밥상 위에 올리기만 해도 금세 집안 곳곳에 미나리의 향긋한 내음이 폴폴 묻어나곤 했다.
미나리로 만드는 음식은 참 많다. 굴과 함께 식초로 무친 미나리 생채에서부터 미나리 대만 짤막하게 잘라 갖은 양념을 넣어 볶아내는 미나리볶음, 생미나리를 살짝 데쳐 제육이나 편육에 돌돌 감아 초고추장에 찍어 먹는 미나리강회, 소금에 살짝 절였다가 밀가루와 달걀을 입혀 노릇하게 지져내는 미나리전 등.
하지만 미나리를 잘못 고르면 아무리 조리를 잘해도 미나리 특유의 상큼한 맛이 나지 않는다. 줄기가 길고 가는 것은 그리 좋은 미나리가 아니다. 향과 맛이 뛰어난 미나리는 줄기가 통통하면서도 짧다. 그리고 미나리 잎사귀가 부드러우면서도 빽빽하게 붙어 있는 것을 골라 조리를 하면 맛도 훨씬 더 좋아진다.
미나리의 색깔은 줄기 아랫부분이 불그스름하고 물기가 많은 것이 특히 좋다. 요즈음 사람들은 대부분 미나리를 조리할 때 줄기만 이용하고 잎과 뿌리는 버린다. 이는 좋은 조리법이 아니다. 미나리의 잎과 뿌리에도 향기가 많고, 영양분이 듬뿍 들어 있다. 하지만 비위(소화기계통)가 약한 사람들은 미나리를 많이 먹지 않는 것이 좋다.
향긋하고 달착지근한 미나리가 입맛을 돋우는 봄날 저녁
"미나리 이거 한 다발에 얼마씩 해요?"
"이천 원만 주이소. 자연산 미나리 이거 사먹는 것도 올해가 마지막입니더."
"쪼매 남은 미나리꽝 이것마저도 축구센터로 편입된단 말입니까?"
"우짜겠능교. 우리가 아무리 이 미나리꽝을 지키려고 해도 시에서 하는 일을 우째 막을 수 있을 낍니꺼."
지난 25일(일) 오후 5시, 창원 영남권축구센터를 짓는 공사 때문에 무르팍이 반쯤 잘려나간 비음산(510m)을 쓸쓸하게 바라보며, 축구센터 공사장 곁에 있는 미나리꽝을 찾았다.
비음산 들녘 한 귀퉁이에 세 개 있었던 미나리꽝. 그 미나리꽝은 나그네가 산책을 나갈 때마다 지나치며 눈여겨보는 곳이다. 하지만 지금은 미나리꽝이 두 개밖에 없다. 창원 영남권축구센터 공사가 시작될 때 미나리꽝 하나가 순식간에 굴착기의 삽날 아래 사라지고 말았기 때문이다. 게다가 두 개 남은 미나리꽝마저도 곧 사라질 위기에 놓여 있다.
그래서일까. 저만치 연초록빛 미나리꽝에서 미나리를 베는 아낙네의 손길이 어쩐지 힘이 없어 보인다. 미나리꽝 곁에 쪼그리고 앉아 미나리를 다듬어 맑은 도랑물에 씻고 있는 아낙네의 눈빛에도 무언지 모르는 쓸쓸함이 깃들어 있다. "인자 내년부터 미나리도 사먹어야 할 판"이라는 아낙네의 말투에도 물기가 배어 있다.
미나리 한 다발을 들고 집으로 천천히 걸어오는 나그네의 마음 또한 꽤 무겁다. 미나리를 들고 집으로 들어서자 작은딸 빛나(14)가 눈을 휘둥그레 뜨며 반긴다. 얼른 씻어달라는 투다. 까만 비닐봉지에 든 미나리를 꺼내 씻기 시작하자 순식간에 부엌 가득 향긋한 미나리 내음으로 가득하다. 향긋하고 달착지근한 미나리가 입맛을 돋우는 봄날 저녁이다.
"앗, 내가 좋아하는 생미나리다."
"빛나 너가 미나리 맛을 어떻게 알아?"
"작년 이맘때 아빠가 생미나리를 된장에 찍어 줬잖아."
"그으래? 그럼 오늘도 그렇게 먹을 거야?"
"아빠! 된장을 듬뿍 찍어서 줘. 된장을 많이 찍어야 미나리 맛이 훨씬 더 좋거든."
"맛이 어때?"
"상큼하고 달콤해."
"아삭아삭 씹히는 미나리는 씹으면 씹을수록 깊은맛이 우러나지."
"아빠, 또 줘."
덧붙이는 글 | ※이 기사는 <유포터>에도 보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