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랜트 해켓(26) 선수는 지금 슬프다. 그렇다고 197㎝의 큰 덩치에 울고다닐 수도 없는 노릇.
앞으로 남은 종목에서 그동안의 부진을 만회하겠다면서, 자기 스스로에게 다음과 말하고 있다. "어떻게 해서라도 이 힘든 상황을 극복해야 한다. 미소를 잃지 말고, 앞으로 나아가야 한다(You've got to put up with these situations and keep a smile on your face and move forward). <시드니모닝헤럴드>" 지난 10년 동안, 세계 수영 중장거리 종목을 석권해온 챔피언다운 듬직한 모습이다.
그러나 해켓은 이미 상처를 깊게 입은 영웅의 모습을 떨쳐내지 못하고 있다. 지난 3월 25일 400m 경기에서 박태환(17) 선수에게 패배한 후 페이스를 완전히 잃어버린 것.
이렇듯 해켓이 흔들리면서, 멜버른 세계수영선수권대회 폐막 직전에 열리는 수영경기의 마라톤격인 1500m의 경기결과가 초미의 관심사로 떠오르고 있다. '떠오르는 별' 박태환일까? '중장거리의 지존' 그랜트 해켓일까?
희망없는 해켓 "이보다 더 나쁠 순 없다"
그랜트 해켓은 28일에 열린 800m에 출전해서 자신의 최고기록에서 17초나 뒤지는 부진 끝에 7위(꼴찌에서 둘째)를 마크했다. 호주 수영계는 경악했고, 언론들도 그의 1500m 우승은 전혀 가망이 없어 보인다고 보도했다.
28일자 <시드니모닝헤럴드>는 '허둥대고 있는 해켓이 1500m 타이틀을 지켜내겠다고 다짐했지만, 과연 가능할까?(Can he Hackett? Floundering Grant vows to defend 1500m)'라는 제목의 기사를 통해서 '희망 없음'이라고 전망했다.
같은 신문은 박태환을 '한국의 떠오르는 별(Korean rising star)'이라고 지칭하면서, 그를 비롯한 1500m 메인 라이벌들을 소개했다. 올림픽에서 은메달과 동메달을 획득한 미국의 라슨 잰센, 영국의 데이비드 데이비스, 러시아의 유리 프릴루코프 등이 그들이다.
28일자 <데일리텔레그래프>도 '이제 해켓은 끝났는가?(Is this the end for Hackett?)'라는 제목의 기사를 통해서, "적어도 이번 세계선수권대회에서 해켓이 우승하는 기적은 일어나지 않을 것"이라고 보도했다.
한편 그랜트 해켓은 채널9과의 인터뷰에서 "나의 몸 상태(fitness)가 최악이다. 2006년 초에 받은 어깨수술에서 완전하게 회복된 것 같지 않다. 1500m도 아주 힘든 경기가 될 것"이라고 토로했다.
월드스타로 성장한 '마린보이' 박태환
반면에, 호주언론의 찬사를 한 몸에 받고 있는 박태환 선수는 내친 김에 1500m 우승까지 거머쥐어 멜버른 세계수영선수권대회의 대미를 장식하기 위해서 만반의 대비를 하고 있다.
28일 저녁, 남자 800m 자유형 경기를 중계한 <채널9인>의 데릴 워렌은 "박태환이 출전하지 않는 게 뜻밖이다, 한 수 아래인 튀니지아의 멜로우리가 우승한 걸 감안하면, 만약에 박태환이 출전했다면 우승했을 것"이라고 코멘트 했다.
그러나 박태환은 1500m에 집중하고 있다. 해켓 이전에 1500m 올림픽 2연패를 달성한 바 있는 키에른 퍼킨슨조차 채널9의 '커렌트 어페어스' 프로그램에 출연해서 "박태환이 400m에 출전한 것도 1500m를 위한 전초전으로 보인다"고 분석할 정도다.
퍼킨슨은 이어서 "예상 밖으로 박태환이 400m에서 우승하자 해켓이 정신적으로 흔들리기 시작했다, 그런 측면에서 박태환의 400m 우승은 1500m에까지 영향을 미치고 있다"면서 "해켓의 우승은 거의 불가능해 보인다"고 예상했다.
이제 박태환은 '아시아의 마린보이'가 아니다. 역대 올림픽 챔피언이 우승후보로 꼽을 뿐만 아니라, 호주 수영의 대들보이면서 자신의 오랜 우상이었던 그랜트 해켓이 버겁게 느낄 정도로 당당한 '월드스타'로 발돋움했다.
박태환을 바라보는 호주인들의 두 가지 시선
1980년대 이후, 극히 예외적인 경우를 제외하고는 호주에서 '백호주의'는 흔적조차 찾아볼 수 없다. 그러나 일부 백인들 중에는 아직도 백인우월주의를 떨쳐버리지 못하고 사회적인 물의를 일으키는 경우가 종종 있다.
바로 그 백인 우월주의자들이 시선으로 본다면 박태환의 쾌거는 하나의 재앙이다. 골프와 수영에서 이미 백인의 아성이 무너진 지 오래이지만, 수영의 중장거리 종목만은 백인들의 독무대를 지켜왔는데 그것마저 박태환이 무너트렸기 때문이다.
그러나 대부분의 호주국민들은 수영불모지로 알려진 한국에서 걸출한 수영스타가 탄생한 것을 기꺼이 환영하면서 박수갈채를 보내고 있다. 이번 대회의 경기장 명칭이 '수지 오닐 수영장'인데, 바로 그 수지 오닐이 채널9과의 인터뷰에서 "박태환의 등장은 세계 수영의 발전을 위해서 너무나 반가운 일"이라고 말한 것도 같은 맥락이다.
또한 박태환이 멜버른 세계수영선수권대회를 대비하기 위해 2개월 전에 호주로 입국해서 호주출신 웨인 로스 코치의 지도를 받으면서 전지훈련을 한 것도 호주국민들이 친근감을 갖게 만든 요인이 됐다.
지난 25일 박태환이 호주의 대들보인 그랜트 해켓을 따돌리고 금메달을 목에 건 이후, 호주언론들은 하나같이 호의적인 반응을 보였다. 또한 호주 관중들도 걸출한 신인탄생을 환영하는 모습 일색이다.
이를 감안하면, 오는 4월 1일에 박태환이 1500m에서 우승하면 호주국민들은 아낌없는 박수갈채를 보낼 것으로 보인다.
'박태환 변수'로 골머리 앓는 호주 팀
다만 한 가지, 호주와 미국이 수영 자존심 대결을 벌이는 과정에서 '박태환 변수'가 불리하게 작용한다는 점이 호주팀의 고민거리다. 박태환이 마이클 펠프스의 메달을 빼앗으면 좋으련만, 오히려 해켓이 예약한 메달을 가져가는 형국이 된 것.
지금 세계수영선수권대회가 열리고 있는 멜버른은 자타가 공인하는 '호주 스포츠의 수도'이다. 게다가 호주는 전통적으로 수영강국으로서의 자존심이 아주 강하다. 더욱이 미국과의 라이벌 의식은 다른 나라 사람들의 상상을 초월할 정도다.
어디 그뿐인가, 최근 호주수영의 간판스타인 이안 소프가 은퇴한 뒤 그랜트 해켓은 호주수영의 대들보가 됐다. 그래서 이번 호주대표팀의 주장을 맡고 있다. 결국 호주 스포츠의 심장부에서 수영강국의 대들보가 무너진 꼴이 된 것이다.
그런 연유로, 그랜트 해켓은 수영 중장거리 종목(400m, 800m, 1500m)에서 지난 10년 동안 쌓아온 아성이 무너지는 것도 가슴 아프지만, 자신이 주장을 맡고 있는 호주 팀이 미국 팀에게 형편없이 뒤지고 있는 것에 대해 크게 자책감을 느끼고 있다.
더욱이 이안 소프가 은퇴한 후유증으로 남자선수의 노 골드메달이 거의 확실시되는 것도 해켓의 마음을 아프게 만드는 요인이다. 그러나 호주의 입장에선 천만다행으로, 호주 여자선수들이 6개의 금메달을 획득해서 29일 현재 미국과의 금메달 경쟁에서 9대6의 스코어를 기록하고 있다.(다이빙, 옥외수영, 싱크로나이즈 제외)
멜버른 세계수영선수권대회 최고스타는 박태환
오는 4월 1일, 박태환이 대망의 1500m 금메달을 따낸다면 2007년 멜버른 세계수영선수권대회의 최고 스타가 될 가능성이 아주 높다. 미국의 마이클 펠프스가 연거푸 세계신기록 갱신하면서 쾌속질주를 하고 있지만, 그는 이미 정평이 난 선수인 반면에 박태환은 그야말로 떠오르는 별이기 때문이다.
게다가 백인들의 독무대인 중장거리에서 황색돌풍을 일으키면서 세계 수영역사의 새로운 장을 열었다는 점도 박태환을 돋보이게 만드는 대목이다.
멜버른 세계수영선수권대회 주관 방송사 채널9의 스포츠기자 커맨 로렌스의 다음과 같은 코멘트가 꼭 실현되기를 빌어본다.
"박태환은 상승세의 탄력(momentum)을 강하게 받고 있다. 게다가 전체적인 무드가 박태환에게 유리한 흐름이다. 새로운 스타의 탄생을 위해 축배를 들 일만 남은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