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농촌은 60~70대 노인들의 마을이 되어버린 지 오래다. 그래서 젊은 사람이 들어오면 이일 저일 맡게 되는데 올해 내게도 임무가 주어졌다. 동네사람으로 조금은 인정받은 것 같아 기쁜 마음이 들기도 했다.

새마을 지도자(새마을 운동이 아직도 진행 중인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와 농협 대의원(우리 마을은 2명 배정)이 그것이다. 무슨 일을 하는지 구체적으로는 모르겠으나 마을 회의에서 하라고 하니 '예' 하고 맡을 수밖에 없었다.

2주전인가 흥겨운 노랫소리에 이어 이장님의 방송목소리가 온 마을에 쩌렁쩌렁 울려 퍼졌다.

"오늘 마을 진입로에 사과나무를 심으려고 합니다. 그러니만큼(우리 이장님 꼭 쓰시는 말씀) 아침밥을 일~찍 잡숫고 삽을 가지고 나오시기 바랍니다."

동네 부역이 잡힌 것이다. '갑자기 웬 사과나무?'라고 생각하면서 삽을 들고 나갔다. 사정을 들어보니 동네 아저씨들(대부분 60대 후반에서 70대) 몇 분이 마을회관에서 농담을 나누시다가 마을 진입로가 너무 썰렁하니 사과나무를 심으면 어떻겠냐는 의견이 나왔고 그날로 충주로 가서 사과나무를 사 온 것이다. 어찌 보면 재미있고 어찌 보면 황당하기도 한 사건이다.

농촌에는 도시나 사회의 조직과는 다른 의사결정 구조가 있다. 쉽게 얘기하면 성문법 보다는 불문법이 아직도 곳곳에 남아 있는 것이다. 마을에도 공식적인 구조가 있긴 하다. 이장과 반장(3인), 새마을 지도자, 개발위원(2인) 등 긴급하거나 작은 일들은 이들이 모여 논의하고 마을의 큰일은 주민 전체 회의를 거쳐 결정한다. 그러나 사과나무 사건처럼 동네 유지(?)분들의 사랑방 의견은 절대적이다.

농담으로 심어진 사과나무

사과나무 몇 그루 심는데 동네 회의를 통하지 않아 문제가 있다 뭐 이런 얘기를 하려는 건 아니다. 이 정도는 시골에 살면서 재미있는 얘기꺼리 중에 하나일 뿐이다. 그렇지만 농협이라는 거대 금융조직에서 그런다면 얘기는 전혀 달라진다. 농협에 문제가 많다는 얘기는 심심찮게 들려왔지만 깊숙이 알지는 못했다. 그런데 이번 농협 대의원이 되면서부터 몇 가지 이해할 수 없는 경험을 하게 되었다.

앞에서도 얘기했지만 내가 농협 대의원이 된 것은 마을 전체 회의를 통해서였다. 2년 임기가 끝나는 우리 마을 대의원이셨던 어른 두 분이 젊은 사람들이 하는 게 좋겠다며 나와 먼저 귀농한 형님을 추천하셨고 동네 분들의 만장일치로 당선(?)되어 대의원을 하게 된 것이다.

그런데 그 마을회의가 있고 다음날부터 조합장, 전무, 지소장, 이사 등 무지 바쁘실 분들이 우리 이장님께 전화를 하기 시작한 것이다. 내용인즉슨 "왜 젊은 사람들을 시켰냐?", "젊은 사람들이 농협 발전에 저해가 되는데 지금이라도 바꿔야 하지 않겠냐"는 등의 내용이었다. 기가 막힐 노릇이었다. 옆 동네에서는 자체 선관위원 입회하에 조합원 투표까지 했을 정도로 엄연히 '작은 선거'다.

그러니 조합장 등의 이런 행위는 명백한 선거 개입이다. 우리 조합원 손으로 뽑힌 조합장이 일개 마을 대의원 선출에 압력을 행사하고 있었던 것이다. 옆 동네에서 2년간 대의원을 하셨던 형님은 대의원 총회에서 예산안 등 문제제기를 몇 번 하자 농협 측에서 사전작업(?)을 해 이번에 대의원에서 떨어지셨다고도 한다.

얘기를 들어보니 머지않아 조합장 선거가 있다고 했다. 조합장 입장에서는 젊은 사람들은 자기편이 아니니 싫어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농협의 부실과 존폐위기는 공공연한 비밀이 된 지 오래다. 그런데도 일부 자리를 지키고 있는 분들은 제 밥그릇 챙기기에만 급급하고 있으니 큰일이다.

농협 운영도 사과나무 심듯이?

또 한 번은 조금 먼 옆 동네 형님이 전화를 하셔서 농협본소로 나오라기에 부랴부랴 달려갔다. 지난해 대의원 총회 때 예ㆍ결산이 공식적으로 통과되지 않고 일방적 날치기로 통과되었기에 농림부에 질의하였더니 관계 자료를 농협에 요구하여 보내달라고 하였다는 것이다. 조합 정관에 대의원 3%의 요구가 있을 때는 자료공개 요청을 '접수'할 수 있었기에 자료요청서에 동의하고 사인을 했다.

총무부에 접수를 하려고 들어갔더니 조합장은 접수를 받을 수 없다 한다. 이유는 없다. 무조건 안 된다고 한다. 자료를 주고 안주고는 다음 문제니 접수라도 받아 달라고 해도 안 된단다. 이건 또 무슨 경우인가?

그 형님 얘기가 조합 정관을 보자고 해도 안 보여 준단다. 역시 이유는 없다. 조합원이, 대의원이 자기 조직의 정관도 볼 수 없다? 세상에 이런 조직이 또 있을까 싶다. 그래서 문제제기를 할 만한 우리가 대의원이 되는 것을 막고자 했는지도 모르겠다.

혹시 조합장은 농협을 작은 마을정도로 생각하고 있는 건 아닐까? 우리 마을에서 사과나무 심듯이 조합을 운영하고 있는 건 아닐까? 농민들의 피와 땀의 대가가 농협 대출이자 갚고 조합장 등 몇 분의 1억에 가까운 월급을 채우는데 쓰이고 있는 것을 모르지 않을 것인데….

땅을 일구고 땀의 가치를 느끼며 조금은 여유롭게 살고자 했던 귀농의 꿈이 조금씩 뒤로 미뤄지는 것 같아 씁쓸하다.

덧붙이는 글 | 이 기사를 쓴 윤요왕씨는 농사꾼으로, 마을 공부방 교사로, 지역문제와 관련한 활동가로 바쁘게 살고 있습니다. 이 기사는 인권연대 웹진 주간 <사람소리>에도 실렸습니다. 오마이뉴스는 직접 작성한 글에 한해 중복 게재를 허용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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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권연대는 1999년 7월 2일 창립이후 세계인권선언의 정신에 따라 국내외 인권현실을 개선하기 위해 노력하고 있는 인권단체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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