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인들의 입장에서 임진왜란(1592∼1599년)은 치가 떨리는 역사적 사건일 수 있다. 그런데 동아시아 국제관계의 관점에서 보면, 임진왜란은 17세기부터 19세기 중반까지 동아시아의 평화를 가능하게 하는 중대한 계기가 되었다. 임진왜란에 대한 한국인으로서의 불편한 감정을 배제한 상태에서 이 사건과 동아시아 국제질서의 상호 관계를 생각해 보기로 한다. <필자 주>
'임진왜란'이 동아시아 국제정치에서 갖는 최대 의의는 기존에는 동아시아의 변방에 불과했던 일본이 임진왜란을 계기로 동아시아의 주요 행위자로 인식되기 시작했다는 점이다. 비록 조선 관군과 의병에게 밀리긴 했지만, 일본군은 벽제전투 등에서 당대 동아시아 최강인 명나라 군대를 격파하는 등 누구도 '무시 못할' 군사력을 과시하였다.
일본은 비록 전쟁에서는 실패했지만, 예전과 달라진 자신들의 역량을 과시함으로써 동아시아의 주요 행위자로 새롭게 부각 될 수 있었던 것이다.
일본이 주요 행위자로 부각 됨에 따라 17세기 중반 이후의 동아시아에서는 조선-청나라-일본 간에 새로운 세력균형이 형성되었다. 이 시기의 동아시아 3국이 한결같이 쇄국을 표방한 데에는 여러 가지 국내외적 요인이 있겠지만, 3국의 어느 쪽도 다른 행위자를 완전히 정복할 수 없는 세력구도가 중요한 요인으로 작용했음을 간과해서는 안 될 것이다.
병자호란(1636년) 때에는 조선국왕 인조에게 삼전도의 굴욕을 안겨준 청나라가 막상 입관(1644년; 入關, 중원 장악) 이후에는 도리어 조선의 비위를 건드리지 않기 위하여 태도를 바꾼 이유 중의 한 가지는 바로 일본이라는 새로운 행위자 때문이었다. 일본이라는 존재가 청나라의 조선 압박을 억제하는 요인으로 작용한 것이다.
청나라에 패전한 조선 내부에서 형식적으로나마 북벌론이 제기될 수 있었던 것은, 조선-청나라-일본의 세력균형 하에서 청나라가 북벌론을 이유로 조선을 재차 침략할 수 없을 것이라는 점에 대한 정세인식이 있었기 때문이기도 하다.
일본이 주요 행위자로 부각 되지 않은 상태에서 청나라가 요동과 중원을 동시에 장악했다면, 조선은 청나라에 대해 훨씬 더 수세적인 자세를 취해야 했을 뿐만 아니라 항상 청나라의 침략 위협에 시달려야만 했을 것이다. 왜냐하면, 전통적으로 동아시아에서는 중원-요동-한반도가 각각의 세력에 의해 분점 될 경우에 역내 평화가 가능했기 때문이다.
이러한 동아시아 세력균형의 모범 사례로는 고려-북송-요나라 및 고려-남송-금나라 시대를 들 수 있을 것이다. 이 시기에는 세 지역 간의 세력균형 때문에 어느 쪽도 다른 나라를 완전 정복할 수 없는 형세가 조성되어 있었다. 칭기즈칸이라는 돌발변수의 출현 이전까지는 계속 그러했다.
그런데 청나라의 중원·요동 통일(1644년)로 인해 중원-요동-한반도의 세력균형은 다시는 기대될 수 없었다. 종래대로라면, 압도적 우위에 있는 청나라가 조선을 항시 위협하거나 혹은 한무제 때처럼 조선을 아예 삼키려 하는 형세가 조성되었을 것이다.
하지만, 17세기 중반 이후 청나라는 중원과 요동을 동시에 장악하고도 병자호란 때와 달리 조선에 대해 소극적인 자세를 취했다. 그리고 조선을 존중하는 태도를 취했다.
앞서 언급한 바와 같이 그 이유 중의 한 가지는 바로 일본이라는 새로운 행위자의 등장이었다. 일본이 새로운 동북아 3각 균형의 한 축으로 떠올랐기 때문에 요동·중원의 통일에도 동북아에는 새로운 세력균형이 조성될 수 있었던 것이다.
한편, 17세기 이후의 세력균형은 그 이전 시기의 세력균형과 양상을 달리하는 것이었다. 종전에는 중원-요동-한반도 3자 사이의 균형이었지만, 17세기 이후에는 중국-한반도-일본 3자 사이의 균형이었다.
위와 같이, 임진왜란은 일본이라는 새로운 주요 행위자를 출현시킴으로써 17세기 이후 동아시아에 새로운 양상의 세력균형과 평화가 가능하도록 만드는 데에 중요한 계기로 작용했다. 물론 한민족이 이 전쟁으로 인해 인적·물적 피해를 입은 점은 이 전쟁의 부정적 측면일 것이다.
그런데 19세기 후반부터 1945년까지 동아시아에서는 이러한 세력균형이 사라지고 말았다. 이 시기에 동아시아가 침략과 전쟁의 소용돌이로 휘말려 들어간 원인은 바로 세력균형의 파괴 때문이었다. 흔히 서세동점(西勢東漸)이 19세기의 동아시아를 위협한 최대 요인으로 인식되고 있지만, 실제로는 동아시아 세력균형의 파괴가 보다 더 중요한 요인으로 작용했다.
말로는 서세동점이라 하지만, 이 시기에 가장 두드러진 양상은 무엇보다도 일본의 갑작스러운 대두였다. 유구가 일본에 합병(1879년)되어 오키나와로 개칭되고, 청나라의 정예 북양함대가 일본 연합함대에 의해 서해에서 침몰되고(청일전쟁, 1894년), 대만이 일본에 할양되고(1895년), 대한제국이 사실상 일본의 수중 하에 떨어지고(1899년), 러시아가 일본에 패배(1905년)를 당한 역사적 사실에서 드러나듯이, 19세기에 동아시아에 대한 위협은 서양에서 나온 것이 아니라 바로 일본에서 나온 것이었다.
힘의 중심이 3분(分) 되지 않고 힘이 온통 일본으로 집중된 것이 이 시기 동아시아 재앙의 최대 원인이었던 것이다.
그런데 동아시아 세력균형의 파괴는 흥미 있는 역사적 아이러니를 낳았다. 19세기 말 동아시아 세력균형의 파괴와 일본의 대외팽창이 조선·청나라·오키나와 등 동아시아 국가들에게만 재앙을 준 것이 아니라 결국에는 일본 자신에게도 재앙이 되고 말았다는 점이다. 열도를 지키지 못하고 넘쳐나는 욕구를 제어하지 못한 일본은 결국에는 한국·중국의 항일전쟁과 미국의 원폭 투하를 자초하고 말았다.
이 점에서 알 수 있는 바와 같이, 17세기 때부터 형성된 한·중·일 3국 간의 세력균형은 동아시아 평화를 위한 중요한 전제조건이다. 세 지역 중 어느 한쪽의 힘이 지나치게 팽창할 경우에 동아시아는 전쟁과 혼란의 소용돌이에 휩쓸릴 가능성이 크다. 그리고 일본의 패전에서 알 수 있는 바와 같이, 세력균형의 파괴는 세력균형을 파괴한 장본인 자신에게도 결코 이롭지 않은 일이다.
그런데 60년 전 '무조건 항복'의 악몽을 잊은 것인지, 오늘날의 일본에서는 또다시 대외팽창의 기운이 달아오르고 있다. 그러한 기운을 타고 총리 자리에 오른 인물들이 고이즈미 준이치로 전 총리와 아베 신조 현 총리 같은 사람들이다.
일본 우익은 자신들이 동아시아 혹은 아시아의 주역이 되어야만 역내 평화가 가능하다고 생각하는 모양이지만, 위와 같은 역사적 사실에서 알 수 있는 바와 같이 일본이 섬을 떠나 뭍으로 나오는 그 순간부터 동아시아의 평화는 위험해지고 만다.
그러므로 일본이 진정으로 동아시아의 평화를 주도하고 싶다면, 그 자신이 직접 평화를 만들려 할 게 아니라 지금 이대로 한반도-중국-일본의 세력균형을 유지하는 쪽을 선택해야 할 것이다. 다시 말해, 일본이 적극적 주도가 아닌 '소극적 주도'의 태도를 취할 때에만 동아시아의 세력균형과 평화는 가능할 것이다.
더 예쁘게 보이려고 '뭍'으로 나와 비싼 화장품을 사려 할 게 아니라 '지금 그대로의 모습'으로 섬 처녀의 순박한 아름다음을 유지하는 것은, 일본이 더 많은 '남자'들의 영원한 사랑을 받는 길이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