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close

【오마이뉴스의 모토는 '모든 시민은 기자다'입니다. 시민 개인의 일상을 소재로 한 '사는 이야기'도 뉴스로 싣고 있습니다. 당신의 살아가는 이야기가 오마이뉴스에 오면 뉴스가 됩니다. 당신의 이야기를 들려주세요.】

1987년 군산시청 앞
1987년 군산시청 앞 ⓒ 군산 87년 6월 민주항쟁 자료집

사람들이 모인 곳은 해방구가 되었다.
사람들이 모인 곳은 해방구가 되었다. ⓒ 군산 87년 6월 민주항쟁 자료집
그는 한때 밤 12시가 넘어도 우리 집에 전화를 걸어왔다. 0.1톤이 넘는 거구가 귀여운 척을 하며 "나~ 고니여" 하면, 나는 남편을 깨웠다. 그러면 남편은 '고니'를 만나러 나갔다. 어느 날 아침에 일어나 보면, '고니'가 우리 집 거실에서 자고 있기도 했다. 나는 낮밤 가리지 않고 만나는 그네들을 '발정난 고양이들'이라고 불렀다.

비오는 지난 토요일 오전이었다. 나는 아이가 장염에 걸려 밤새 후질러 놓은 몇 벌의 속옷과 설사 똥 묻은 이불을 치우고 있었다. 남편은 찌개를 끓이면서 걸려온 전화를 받고 있었다. 눅눅한 날씨 때문인지, 남편이 전화기에 대고 "우리 집으로 와요" 하는 소리가 들렸다.

'고니'가 왔다. 남편보다 3년 선배, 40대 초반을 넘어선 그를, 예전처럼 막 부를 수만은 없다. 그래서 나는 '조촌동의 김성곤'이라고 부른다.

"조촌동의 김성곤! 오늘 바쁘다고 하지 않았어요?"
"합천 전두환 공원에 데모하러 갈라고 준비를 했거든. 그런데 거기는 비가 많이 온다네. 아침에 피켓까지 다 만들었는데. 참말로 우환이여 우환."

"참 꼴통이다. 혼자 거기를 가고 싶어요?"
"갔다 오면 흐트러진 마음도 바로 잡고 좋아. 신행정수도 위헌 판결 났을 때 혼자 헌법 재판소 가서 1인 시위도 했어."


김성곤이 처음부터 데모하는 사람은 아니었다. 1984년 군산대 1학년 때는 막걸리도 안 마시고, 공부만 했단다. 그의 말을 믿느냐 안 믿느냐, 나는 햄릿이 된 기분이었다.

김성곤이 2학년 때는 대학마다 총학생회가 부활했다. 그가 3학년 때 총학생회 부회장이 되자 그의 아버지는 "자식과 길을 달리 갈 수 없다"며 새마을 협의회 군산 지회장 자리를 그만두셨다.

'조국의 부름을 받고 거리로 나간' 김성곤. 이한열 열사 영정 사진을 들고 가고 있다.
'조국의 부름을 받고 거리로 나간' 김성곤. 이한열 열사 영정 사진을 들고 가고 있다. ⓒ 군산 87년 6월 민주항쟁 자료집
김성곤은 대학 4학년 때 6월 항쟁을 겪었다. 그때 모습을 기록한 <군산 87년 6월 민주항쟁 자료집>에는 이한열 열사 영정 사진을 들고 가는 김성곤이 있다. 그는 사진 속 자신을 가리키며 "조국의 부름을 받고 거리로 나갔지"라고 했다. 김성곤은 20년 전의 '정의감에 불타는 청년'으로 돌아가서 말했다.

"시민들이 준 성금이 많았지. 날마다 끝나고 나면, 내 '봉창'에 꼬깃꼬깃한 천 원짜리가 3만 원 이상씩 들어 있었어. 김밥 수는 30~40줄. 그때 거리에 나왔던 사람들이 다 소박해서 꼬맹이들부터 미군기지촌하고 감둑(성매매 술집 거리)에 있는 여자들까지 나왔어."

6월 10일부터 불붙은 항쟁은 군산시청 앞에 광주 항쟁을 복제해 놓은 것 같았다. 사람들은 일터나 학교가 끝나면 거리로 나왔다. 자신의 시간과 돈과 열정을 바쳐서 "호헌 철폐, 민주 쟁취, 살인정권 타도"를 외쳤다. 노점상들은 '꼴마리' 돈을 꺼내서 시위대에 먹을 것을 사주었다. 사람들이 모인 곳은 해방구였다. 최루탄을 쏘고 진압봉으로 때려도 소용없었다.

최루탄을 쏘고 진압봉으로 때려도 사람들은 다시 군산시청 앞에 모였다.
최루탄을 쏘고 진압봉으로 때려도 사람들은 다시 군산시청 앞에 모였다. ⓒ 군산 87년 6월 민주항쟁 자료집
6·29 선언으로 전국의 거리는 잠잠해졌지만 군산은 달라지지 않았다. 대통령을 체육관에서 뽑지 않고 국민들이 직접 뽑게 하겠다는 노태우의 말도 반신반의했다.

전날, 트럭에 탄 산모, 혹은 다섯 살 여자 아이가 경찰이 쏜 최루탄에 크게 다쳤다는 소식은 시위대를 격하게 만들었다. 6월 30일에도 군산시청 거리에는 사람들이 몰려들었다. 전북의 병력이 군산에 총집중 했고, 최루탄 피해 소식은 오보라고 밝혀졌다.

7월 2일, 거리 시위는 끝났다. 김성곤은 시민들의 자발적이고 폭발적인 참여를 본 6월 항쟁을 잊을 수가 없었다. 학도호국단이 없어지고 총학생회가 부활할 때 그가 '뜬 눈'은 6월 항쟁에서 뭔가를 제대로 '볼 줄' 알게 되었다. 김성곤은 생활 정치의 중요성을 깨달았다.

0.1톤이 넘는 김성곤, 그가 자전거를 타면 자전거가 마치 장난감 같다.
0.1톤이 넘는 김성곤, 그가 자전거를 타면 자전거가 마치 장난감 같다. ⓒ 김성곤
그는 1998년에 군산시의원에 첫 출마했다. 텔레비전 개표 방송에서는 '김성곤 당선 유력'이 나왔고, 성질 급한 그의 친구가 꽃 100송이를 보내왔다. 자고 일어나 보니 사무실 분위기가 '싸' 했다. 김성곤은 떨어졌지만 동네 사람들에게 꽃을 나눠줬다. 한 달 동안 낙선 인사를 했다.

운전 면허증이 없는 김성곤은 자전거를 타고 다니면서 사람들을 만났다. 김성곤의 외모는 '포스'가 이만저만이 아니어서 그가 자전거를 타고 지나가면, 자전거는 마치 장난감처럼 보인다. 동네 사람들은 그를 '뚱땡이'라고 부르면서 선거 때 표를 주었다. 김성곤은 2002년에 시의원이 되었다. 지난해에 다시 시의원이 되었다.

김성곤은 여전히 자전거를 타거나 걸어 다닌다. 눈이 많이 오면 동네에 나가 눈을 쓸고, 여름이면 방역을 하러 다닌다. 시의원들이 나가는 해외 연수는 안 간다. 이유는 특별하지 않았다. 필요성을 느끼지 못했고, 시의원 일은 하다 보면 연중무휴라서 그 기간에 개인적으로 쉰다고 했다.

6월 항쟁은 날마다 거리 집회를 구경하던, 한 미술학과 1학년 남학생의 삶도 바꿨다. 그 애는 1987년 12월 대통령 선거 때 "기말 고사 거부하여 민주화 운동 실현하자!"를 주도했다. 전공 교수는 그 애에게 11학기 동안 F학점을 주었다.

남학생은 서른 살이 넘어 재입학했다. 교수가 외국에 교환 교수로 나간 틈을 타서 16년만에 졸업했다. 그가 내 남편이다.

남편이 대학 1학년 때 시험 거부를 하고 첫 학사경고를 맞았을 때 중학교 3학년이던 나는, 전남 영광 버스 터미널에서 투표함을 바꿔 치기한 부정 선거에 대해서 말하다가 끌려가는 대학생들을 보았다.

그리고 대학생이 되어서는 세상을 바꾸려고 광장과 거리에서 시간을 보냈다. 나는 지금은 아이 키우기와 밥벌이만 하고 산다. 그러나 김성곤 같은 사람들이 있어야 우리 사회가 진보한다는 믿음은 변함없다.

1987년 군산시청 앞, 거리 시위는 7월 2일까지 이어졌다.
1987년 군산시청 앞, 거리 시위는 7월 2일까지 이어졌다. ⓒ 군산 87년 6월 민주항쟁 자료집

덧붙이는 글 | 나의 6월 이야기에 응모합니다. <군산 87년 6월 민주항쟁 자료집>은 참여자치 군산시민연대에서 만들었습니다.


댓글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쓰는 사람이 되고 싶다면』 『소년의 레시피』 『남편의 레시피』 『범인은 바로 책이야』 『나는 진정한 열 살』 『내 꿈은 조퇴』 『나는 언제나 당신들의 지영이』 대한민국 도슨트 『군산』 『환상의 동네서점』 등을 펴냈습니다.




독자의견

이전댓글보기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