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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월항쟁 당시 모습.
6월항쟁 당시 모습. ⓒ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87년 6월, 나는 그 때 항쟁의 대열에 참석하지 못하고 회색지대에서 관망만 하고 있었다.

그 6월을 회상하면서 '항쟁'을 떠올리지 못하고 '감격'을 먼저 떠올려야 하는 나는 역사 앞에 한없는 부끄러움을 느낀다. 물론 당시에는 그 부끄러움을 숨겼다. 마음 속으로는 이름모를 투사들을 응원하였을지라도, 그 때 내가 서있던 자리는 너무도 초라하고 주눅들어 있었다.

그래서 나는 그 긴긴 날의 피어린 항쟁보다는, 6월 29일 그 하루의 가슴 터질 듯한 감격을 더 생생히 기억하고 있다. 또 그것이 외국인들에게조차 얼마나 가슴 뿌듯하고 자랑스러운 것이었는지를 분명히 경험했다. 정권의 주구 소리를 들었던 내가 '6·29 선언' 때문에 이국땅에서 한국인임을 마음껏 자랑스러워했던 특별한 기억이기도 하다.



'정권의 주구'라고 욕먹었지만, 나는 6·29가 자랑스러웠다

그 해, 도도한 민중의 물결을 막지 못해 독재정권이 두 손 들고 항복하기까지의 상황은 다시 말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 당시 나는, '정통성' 때문에 임기 내내 시달려 오던 5공의 권력 심장부에서 그 권력 유지의 악역을 담당했던 국가 최고정보기관의 풋내기 직원이었다.

피를 불러 탄생한 정권에 대한 국민들의 시비지심은 분명하고 준엄했다. 정권이 아무리 두드려잡아도 민주세력은 잡초처럼 되살아나며 저항했다. 이미 그 해 1월에 서울대생 박종철의 고문치사 사건이 결정적인 불씨가 되어 있었다.

그런데도 정권은 그 저항을 도리어 4·13 호헌조치로 되받았다. 그렇게 누르면 수그러들어 체념이라도 할 줄 알았다. 그것은 얼마나 국민들을 모르는 무지요, 오만이었던가! 민중들은 그 점을 깨달으라고 소리 모아 외쳤다. 정권은, 몇몇 민주 지도 세력과 학생들뿐만 아니라 이제 마침내 온 민중들을 분노케 했다.

6·10 민주 항쟁! 그것을 우리는 물결이라고 부른다. 그러나 그것은 평화의 물결이 아니라 화염병 속에서 울부짖는 통곡의 물결이었다.

그 와중에도 나는, 외국어대학의 어학연수원에 파견되어 중국어를 배우고 있었다. 어학연수원을 다니면서 학생들이 던지는 돌멩이와 경찰이 쏘는 최루탄 사이를 지나다녀야 했다. 기침을 해 대기도 했고 아예 수업을 포기하기도 했다.

사무실에 근무할 때도 이문동 청사의 후문과 외국어대는 아주 가까웠으므로 수시로 최루탄 가스가 날아들었다. 외대 학생들을 향해 경찰이 쏜 최루탄은 오히려 정보기관의 직원들을 괴롭히고 있었던 셈이다.

직장 초년생이었으니 나 역시 기성세대는 아니었다. 바로 몇 살 아래의 동생들인 그들은 최루탄 가스 속에서 기침과 눈물이 범벅이 된 채 돌멩이를 던져댔다. 돌멩이가 모자라자 벽돌담을 허물어서 던졌다.

며칠 뒤에는 도리어 경찰이 그 돌담을 허물어 버렸다. 학생들의 저항 수단을 없애버리는 것이었다. 돌담은 이래저래 수난을 당했다. 외대 정문 앞 도로는 수시로 통제됐다.

경찰이 쏜 최루탄에 정보기관 직원들도 괴로워

6월 항쟁 당시 '넥타이부대'의 모습.
6월 항쟁 당시 '넥타이부대'의 모습. ⓒ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당시 나는, 내가 부정한 정권의 직원이 아니라 한 국가기관의 공무원이라는 소신으로 나름대로의 국가관은 서 있었다. 그럼에도, 난무하는 최루 가스와 돌멩이 사이를 지나칠 때는 참담한 심정이 되곤 했다. 더구나 나는, 정보기관의 직원이라는 신분이었기에, 발각된다면 프락치로 몰릴 수 있는 신변의 위협도 의식해야 했다.

심정적으로는 내가 그들의 이념에 동조하더라도, 나의 처지가 그들의 타도 대상이라는 것은 자명했다. 차라리 같이 돌을 던지다가 몸을 다친다면 심적 갈등은 덜 하였을지도 모른다. 정보기관의 직원이란 것을 자책하지는 않았지만, 개인적인 여건과 국가기관 공무원으로서의 소신으로 선뜻 그렇게 할 수는 없었다.

그러면서도 대학생들의 시위에 동참하지 못하는 것은 분명 부끄러운 일이었다. 나 역시 5공 정권이 몇몇 군인들의 무지막지한 권력욕 때문에 얼마나 큰 희생을 치루고 태어났는지를 잘 알고 있었다. 그러므로 심정적으로는 분명 그들의 시위에 동조하고 있었다.

그것은 풀기 어려운 모순이었다. 지금 와서 당시에 무척 우울한 회색지대에서 배회하였다고 회상한다면 사람들은 웃을지도 모르지만, 사실이 그랬다. 당시, 똑같이 부정한 정권 아래 있었으면서도 나만 항쟁의 대열에 동참할 수 없었다는 것은 지금 생각해도 무척 부끄러운 일이다.

그러나 이제 세월이 흐른 뒤에 그들의 희생으로 민주화라는 값진 대가를 얻어 내는 결과를 얻어냈기에 내 부끄러움이 얼마간은 덜어졌다.

내가 정보기관에 들어간 까닭은

이제 굳이 변명을 하자면, 내가 정보기관에 근무하게 된 것은 미약하나마 나름대로는 소신이 있었다. 법대를 졸업하고 민주화운동이 아니라 취직을 선택한 것은 분명히 안일한 보신이라 하더라도, 하필이면 정권 하수기관인 정보기관이었느냐고 질책한다면 나름대로의 소신은 있었다는 뜻이다.

물론 옛 선비의 기개로 말하자면 부정한 국록은 거부해야 마땅하다는 주장도 있을 수 있다. 하지만, 누구의 처신이 옳았는지를 두고 이론이 많았던 점을 생각하면 결국 그것은 인생관의 문제였다.

은나라의 백이는 무도한 임금 밑에서 일하기를 거부했다. 반면에 이윤은 그런 임금일지언정 선정을 하도록 하기 위해 곁을 떠나서는 안 된다고 주장했다. 오늘날에 보면, 처신은 달랐지만 그들은 둘 다 국가의 충신이었다.

'정권이 부정하다 하여 정보기관 직원을 부정한 공직자라 한다면, 검찰·사법부·경찰 등 모든 국가기관의 종사자는 정권의 하수인이 되는 셈이다. 그것은, 이성적인 사고방식은 아니다. 국가기관에 참여하여 성실히 봉사하는 것은 정권이 아니라 국가에 봉사하는 직무일 뿐이다.'

내가 정보기관에 들어간 동기는 그런 정도의 것이었다.

"한궈, 리하이"

6.29선언. 조선일보, 한국현대사119대사건
6.29선언. 조선일보, 한국현대사119대사건
6월 29일의 특별 선언! 나는 그 날을 잊지 못 한다. 온 국민이 열광한 기쁨이었지만, 나는 누구보다도 기뻐했다. 우선 그것은 내가 가진 갈등으로부터의 해방을 의미했다. 그 날 나는, 개인적으로 진급을 했거나 분양아파트 당첨이라도 된 것처럼 내 가슴이 벅차오르는 것을 경험했다.

나는 그 날 지하철을 탔다가 뿌려지는 호외를 받아들며 함박웃음을 지었다. 옆에 선 낯모르는 사람에게도 거리낌 없이 말을 건넸다. 다른 사람들도 생판 처음 보는 사이였지만 아랑곳하지 않았다. 사람들이 직접 자기 일도 아니면서 그렇게 하나 되어 기뻐하는 모습은 생전 처음이었다. 물론, 훨씬 더 나중인 2002년 월드컵 경기에서 우리가 4강에 올랐을 때 비슷한 상황을 한 번 더 경험하기는 했지만….

한 달 뒤쯤, 나는 대만으로 국비 유학을 갔다. 수교 전이었으므로 대만은 곧 중국이었다. 내가 만난 많은 중국인들은 엄지손가락을 치켜세워 보이며 "한궈, 리하이!(한국, 대단하다)"를 연발했다.

그들도 한국의 사정을 잘 알고 있었다. 경찰과 학생이 죽기 살기로 최루탄을 쏘고, 곤봉으로 후려치고, 돌을 던지는 시위 모습은 대만 TV에도 수시로 보도되었다. 그들이 보기에 그것은 정말 기이한 장면이었다고 한다.

그런 그들이 한국을, 아니 나를 추켜줄 때 나는 참으로 뿌듯했다. 저 밑바닥에서 저절로 긍지와 애국심 같은 것이 뭉클거렸다.

그 해 말 대통령 선거에서 민주 진영인 김영삼, 김대중씨의 분열로 노태우씨가 당선되었다. 나는 그 때, 두 김씨의 양보없는 권력욕이 빚어낸 결과라면서 가슴 속으로 통탄을 했다. 한국 정치에 대해 잘 모를 것 같은 중국인 동급생들도 "두 김씨가 표를 갈라먹어서 노태우씨가 어부지리를 얻었다"고 어렵지 않게 결론을 내렸다.

부끄러운 감회, 다시 한번 그들에게 사죄드린다

아무튼 그런 우여곡절 끝에 우리는 올림픽도 치르고, 또 2002년 월드컵도 치렀다. 그 뒤로, 이제 우리 사회에서는 항쟁이라는 말은 사라졌다. 부분적인 이익집단의 시위와 투쟁은 여전히 산견되지만, 정권을 상대로 온 나라 민중이 한 방향으로 항쟁하는 역사는 끝났다.

그것이 6월 항쟁의 공헌이요, 위대성이다. 언제든지, 정의롭지 않은, 민중의 뜻에 반하는 권력은 반드시 성난 파도 같은 저항에 부딪히고 말 것이라는 것이 오늘에 사는 우리에게도 여전히 유효한 교훈이다.

요즘, 정치 지도자의 반열에 서 있는 사람들 중에는 그 6월 항쟁의 주역들이 많다. 나같이 대열에 함께 서지 못한 보통 사람들에 비해 훨씬 더 의롭고 용감했던 사람들이다. 하지만, 그들이 점차 사리와 당략에 흔들리는 걸 보면 조마조마할 때가 많다.

나는, 누구보다도 감격스러울 그들이 이번 20주년을 계기로 일신하기를 희망한다. 그 '6월 정신'의 순수한 희생과 열정이라면 이 시대의 민주와 복지를 이룩하는 데 분명히 막중한 역할을 할 수 있을 것이라 믿는다. 중요한 것은, 그 지도자들보다도 더 그날을 기리고, 더 일신해야 할 사람들이 바로 우리 민중들이라는 점이다.

그 6월을 위하여 희생된 분들은 너무도 많다. 더러는 유치장에서 잠을 설쳤고, 피를 흘리거나 최루 가스에 괴로움을 당했다. 그렇지 않았더라도 학업을 중단하거나 취직을 포기하였다.

이제 지천명을 넘긴 나는, 20년 전 그날을 돌이켜 보면 부끄러운 감회가 남다르다. 그날의 값진 항쟁을 위하여 희생된 사람들에 대해 거듭 사죄하면서 그 6월의 정신이 늘 우리 사회에 살아있기를 염원한다.

덧붙이는 글 | 나의 6월 이야기 응모


#87년 항쟁#민주화#집회#저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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