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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휴~ 술냄새! 뭔 일이래? 얼굴은 홍당무 돼 가지고…."
"마누라~ 물 좀 주라. 우리 이쁜이들은 자?"
"자지 그럼. 지금 시간이 몇 시인데 11시가 넘었구만."
"요 녀석들이 아빠도 안 보고 잔단 말야?"
며칠 전, 벌게진 얼굴로 퇴근한 남편은 무슨 일인지 안색이 안 좋았습니다. 거의 매일 퇴근이 늦다보니 집에 오면 얼굴 쳐다보며 수다 떠는 게 제 일인데, 그날은 분위기가 영 이상해서 조심스레 눈치만 살폈어요.
남편은 거실 소파에 푹 주저앉아 눈을 감더니만 뜰 생각을 안 하더라구요. 괜히 안쓰러워서 그냥 쳐다봤지요. 조금 있으니 그 눈길을 감지했는지 슬그머니 눈을 뜨더군요. 그래서 얼른 물을 떠다 주며 엉덩이 밀치고 옆에 앉아 슬그머니 물었습니다.
"자기, 오늘 뭐 안 좋은 일 있었대?"
"어? 아냐. 그냥 퇴근하는 길에 한잔 했어."
"그래? 별 일 없으면 다행이고… 피곤한 것 같은데 얼른 씻지?"
말하기 싫어하는 것 같아 일어나려는데 "어디가?" 하며 옷을 잡아당기대요. 못 이긴 척 주저앉았습니다. 말 안 할 것 같던 남편, 슬슬 얘기보따리 풀더군요.
"아휴, 오늘 회사에서 중국인 남자직원이 다쳤어. 기계에 눌려서 검지 손가락 손톱이 반 정도 떨어져 나갔거든. 근데 이 녀석 자기가 잘못해서 그런 거라 염치가 없었는지 아플텐데 입 꼭 다물고 참더라고."
"어머 어쩌다가? 병원은 갔어요? 얼마나 아플까."
"여기선 안 된다고 해서 혜주 큰병원으로 갔거든. 내일 가봐야 알 것 같아. 그 녀석 겨우 17살인데…."
한참 학교에서 공부할 나이에 공장에서 일하는 것 자체로도 안타까운데 거기다 다치기까지 했으니 관리하는 남편 입장에선 그 마음이 남달랐던 모양입니다. 남편은 쏟아져 나오는 한숨을 크게 뱉어내며 그러더군요.
"술 한 잔 마시고 나면 마음이 좀 나아질까 했는데 술때문인가? 나 옛날에 신문배달 하던 때가 생각 나네. 그때 사무실 누나는 잘 사나?"
아니, 잘 나가다가 웬 누나? 남편 심정을 너무너무 잘 알면서도 주책없이 웬 질투심 발동인지 원. 그러나 그 순간 마음 잘 다스리고 아주 다소곳이 물었습니다.
"왜 그래. 옛날 얘기 잘 안 하는 사람이 오늘 진짜 심란한가 보네?"
"그냥. 그때 15살이었는데 학교 다니면서 신문배달 하는 게 좀 힘들었거든. 한 달에 만 오천원 벌면 진짜 많이 버는 거였어. 1년 반 정도 하면서 25만원 벌었다, 내가."
"진짜? 하긴 벌써 20년 전이니까 그러기도 하겠다."
"그때 사무실 누나가 있었는데 사무실에 같이 있던 날은 항상 자장면을 사줬어. 그때는 자장면 한 그릇에 500원이던 시절이다… 그 누나 항상 내 머리 쓰다듬어 주곤 했는데… 내가 얻어먹은 자장면만 해도 그릇 수를 세자면 엄청날 거다."
"그래요? 에헴… 그 누나… 거 얼굴… 이뻤나?"
에고고, 저도 모르게 그만 주책없는 질문을 하고 말았습니다. 그러나 옛 생각에 너무 젖은 남편, 아무렇지도 않은 듯 큰소리로 당당하게 "어, 엄~청 이뻤어 그 누나. 진짜 꼭 만나고 싶어. 빚도 갚고 싶고 말야. 한 번 수소문 해볼까?" 합니다.
꾹 다물어진 입에선 아무 말도 안 나오고 물끄러미 남편 얼굴만 주시하니 이 남자 뭔 눈치를 채긴 챈 모양입니다.
"뭐야? 그럴 거 없어. 나보다 10살이나 많은 누나야. 하하하. 긴장하기는…."
이런, 그 말에 마음 누구러지는 심리는 또 뭘까요. 남편이 유쾌하게 웃어버리니 덩달아 실실 웃었습니다. 한참을 웃던 남편, 기분이 좀 괜찮아졌는지 씻고는 바로 코골며 자더군요. 그 얼굴을 보니 어쩐지 고단함이 느껴졌어요.
중학교때 신문 배달하며 일찍 세상을 경험한 남편, 대학교때 학비 버느라 공장에서 일하다 다쳤다는 엄지 손가락은 치료를 했다는데 구부려지지도 않고요. 학비를 더 모으려고 위험한 돌공장에서 일할 때는 굴러오는 돌에 발등이 눌려 뼈에 금이 갔답니다. 걷고 생활하는 거야 문제 없지만 지금도 겨울에 찬바람만 불면 너무 시려서 잠을 못 이루는 남편입니다.
연애할 땐 남편의 이런 고단함을 몰랐습니다. 겉으로 보이는 모습이 참 밝은 데다가 고생은 모르고 자란 사람처럼 유쾌했거든요. 그 고단했던 시절이 지금은 남편에게 어떤 어려움도 이겨낼 수 있는 밑거름이 되는 것 같고요. 점점 나이가 들어가고 생활에 여유가 생길수록 힘들었던 시절 함께 하며 용기주던 사람들이 더 그리워지는 게 아닌가 싶습니다.
회사에서 다친 17살 어린 직원으로 인해 떠오른 남편 기억 속 그 시절 그 누나. 거의 매일 자장면을 사주며 힘을 주었다던 그 누나. 엄청 이쁘셨다는 말에 살짝 질투를 하긴 했습니다만, 사실은 저도 무척 궁금하고 뵙고 싶습니다. 나중에 한국에 가면 꼭 수소문해 볼 요량입니다. 남편과 같이 맛있는 식사 대접 하면서 15살 시절 남편이 진 마음의 빚, 꼭 갚고 싶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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