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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토의정서가 공식 발효된 2005년 2월 16일 서울 세종로 미대사관 앞에서 환경단체들이 교토의정서를 탈퇴한 미국을 규탄하고 세계 이산화탄소 배출 9위인 한국 정부의 적극 대응을 촉구하는 기자회견을 열었다.
교토의정서가 공식 발효된 2005년 2월 16일 서울 세종로 미대사관 앞에서 환경단체들이 교토의정서를 탈퇴한 미국을 규탄하고 세계 이산화탄소 배출 9위인 한국 정부의 적극 대응을 촉구하는 기자회견을 열었다. ⓒ 오마이뉴스 권우성

'제2의 개국'이라고 칭송되는 한미자유무역협정(FTA) 협상 타결 소식이 모든 언론의 머리기사를 장식하던 바로 그 주에 유엔 산하 '기후변화에 관한 정부 간 패널'(IPCC)이 기후변화에 관한 보고서를 발표했다.

보고서에는 인류가 지금까지 추세대로 온실가스를 계속 배출할 경우 2080년쯤이면 평균 기온이 3.5도 이상 상승해 지구촌의 주요 생물 대부분이 멸종할 것이라는 무시무시한 경고가 담겨 있다. 물 부족과 식량난, 전염병 확산, 홍수와 해수면 상승 등 할리우드 재난 영화에서 컴퓨터 그래픽으로 접했던 대재앙이 현실로 닥칠 거라는 얘기다.

한미FTA 협상타결로 장밋빛 미래를 그리는 사람들에게는 듣기 싫은 얘기일 수도 있겠지만, 기후변화에 관한 한 전 세계에서 가장 권위 있는 전문가 2500명이 6년 동안의 연구조사를 거쳐 발표한 보고서라고 하니 쉽게 무시할 수도 없는 노릇이다.

더구나 한국이 지구 온난화에 가장 취약한 20개 국가에 포함된다고 하니 우리에게도 보통 심각한 뉴스가 아니다. 지구온난화의 주범으로 꼽히는 이산화탄소 배출량이 세계 10위권, 이산화탄소 배출 증가속도가 세계 최고라는 점을 감안하면 책임도 그만큼 크다고 인정할 수밖에 없다.

한국, 지구 온난화에 가장 취약한 20개 국가 중 하나

하지만 인류가 '멸종으로 가는 고속도로' 위를 질주하고 있다는 과학자들의 이런 경고에도 불구하고 우리 사회는 여전히 사안의 심각성을 제대로 인식하지 못하는 듯하다.

아니 어디 우리뿐이겠는가. 과학자들이 대재앙 가능성을 최대한 낮게 평가했음에도 불구하고 미국, 중국 등 강대국과 사우디아라비아 같은 산유국 정부 관계자들이 보고서 내용에 문제를 제기해 발표시간이 연기됐다고 하니 우리 사회와 정부만 탓하는 건 일종의 '자학'이 될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한미FTA 협상 타결에 대해 우리 정부가 보여주고 있는 태도를 보면 사정이 좀 달라진다. 4월 10일 현재까지 확인된 내용을 보면 우리 협상단은 자동차 분야에서 배기량 기준 세제를 완화했을 뿐만 아니라 미국산 자동차에 대해 배출가스 자가진단장치 장착 의무를 2년 간 유예하고 배출가스 허용치도 2009년부터 적용하기로 한 것보다 완화했다.

이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운전면허증이 있는 사람이라면 대다수가 '환경기준이 후퇴한 것'이라고 평가할 것이다. 하지만 우리 협상대표들, 정부 관계자들의 생각은 좀 다른 듯하다.

우리 협상대표들은 여러 언론과 한 인터뷰에서 '자동차 배기량과 유해물질 배출은 관계가 없다'는 얘기를 되풀이해 왔다(이 글을 쓰고 있는 시점까지는 배출가스 자가진단장치 장착의무 유예와 배출가스 허용치 기준 완화가 환경에 미치는 영향에 관해 정부 관계자의 생각을 듣지 못했다). 큰 차라고 해서 모두 유해물질을 많이 배출하는 건 아니고 작은 차라고 해서 모두 유해물질을 적게 배출하는 건 아니라는 얘기다.

맞는 얘기다. 품질 나쁜 작은 차가 큰 차보다 더 유해한 물질을 내뿜을 수 있다. 하지만 유해물질의 독성은 차치하고 연료를 많이 쓰는 대형차가 이산화탄소도 많이 배출하는 건 어쩔 수 없는 노릇이다. 독성이 덜한 배출가스가 나온다고 해서 온실가스 총량이 늘어나는 걸 막을 수는 없는 것 아닌가.

출처 : 한화진 외, '기후변화 영향평가 및 적응시스템 구축 Ⅰ'(2005).
출처 : 한화진 외, '기후변화 영향평가 및 적응시스템 구축 Ⅰ'(2005). ⓒ 환경정책평가연구원

미 연방대법원, '온실가스 규제' 판결

미국 자동차가 들어오면 얼마나 들어오겠느냐, 뭐 그 정도 가지고 당장 큰 문제가 되겠느냐, 대한민국의 경제발전을 위해, 선진국으로의 도약을 위해 그 정도는 감수해야 되는 것 아니냐, 단점도 있지만 FTA는 어차피 피할 수 없는 세계적인 추세다 등 여러 가지 반론이 나올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시선을 조금만 돌려보면 우리가 생각하는 대세가 얼마나 취약한 것인지 금방 확인할 수 있다. 한미FTA 협상이 타결된 비슷한 시각에 미국 연방대법원은 '연방정부가 온실가스를 규제해야 한다'는 판결을 내렸다.

미국 내 13개 환경운동단체와 12개 주 정부가 연방 환경보호국이 제 역할을 하지 않고 있다고 제기한 소송에서 원고의 손을 들어 준 것이다. 판결을 구체적으로 들여다보면 '환경보호국이 온실가스 규제에 소극적일 경우 각 주 정부가 환경보호국의 결정에 불복할 수 있고 환경보호국은 자동차 배출가스를 규제할 권한이 있다'는 내용이다.

미 연방대법원이 온실가스 배출 규제에 소극적인 부시 행정부의 정책을 심판한 것이다. 이런 기준에서 본다면 한미FTA 협상에서 미국 협상단이 관철한 배출가스 규제 완화는 어떤 평가를 받을까? 미 연방대법원의 판결 취지대로라면 문제 있는 내용이 아닐까?

소비자의 선택폭을 넓히고 각국이 서로 이익을 주는 자유무역협정이라면 마다할 이유가 없다. 하지만 각국이 자국의 경제적 이익에만 사로잡혀 인류에게 다가오는 재앙은 보지 못하고 국가 간 경쟁에 매몰되는 자유무역이라면 눈앞의 파멸을 보지 못하고 질주하는 무모한 '치킨게임'과 다를 게 뭐가 있을까.

국가와 민족만 생각하는 FTA

어떤 사람들은 FTA가 민족과 국가를 뛰어넘어 세계를 하나의 시장으로 만드는 것이라고 하지만, 현실에서 진행되고 있는 FTA 협상은 너무나 국가 중심적이고 민족 중심적이다. 그 무한경쟁에서 조금이라도 손해를 보지 않기 위해 또는 조금이라도 이익을 얻기 위해 각국이 계산기를 두드리는 동안 우리 미래는 점점 더 불안해지고 있는 게 아닌지.

파국이 임박했다는 얘기를 믿고 싶지 않은 건 인지상정일 것이다. 하지만 수천년, 아니 수백년 뒤도 아니고 금세기 안에, 다시 말해 우리 자식들이 살아 있는 동안 지구상의 생물 대부분이 멸종할 수 있다는데, 지금 우리는 너무 태평하지 않은가.

덧붙이는 글 | 이 기사를 쓴 이광조 피디는 CBS 방송국 피디로 재직하고 있습니다. 이 기사는 인권연대 웹진 주간 <사람소리>에도 실렸습니다. 오마이뉴스는 직접 작성한 글에 한해 중복 게재를 허용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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