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2006년, 한 해 동안 우리 한국 시단이 거둔 성과물이 한 권의 책으로 묶여져 나왔다. 도서출판 작가에서 펴낸 <2007 '작가'가 선정한 오늘의 시>가 그것이다.
2006년도 한 해 동안 각 문예지에 발표된 수천 편의 작품 가운데 89편의 우수 작품이 엄선되고, 또 같은 시기에 발간된 수백 권의 시집 가운데 22권의 우수 시집을 엄선하여 한 권의 책으로 묶은 것이다.
선정 방식은 전국의 시인, 평론가 150명의 선정위원이 되어 우수 시 5편과 우수 시집 2권을 각각 추천하여 그 가운데 가장 많은 수를 얻은 시와 시집을 가려 '2007 작가가 선정한 오늘의 시'로 묶는 것이었다. 선정위원이 한두 명이 아니라 150명이라는 숫자와 서울에서 제주까지 전국의 시인·비평가들이 선정위원으로 참여한 것이 중요한 것이다.
이는 몇몇 사람만이 편집위원으로 참여할 때 발생할 수도 있는 편집위원들의 성향과 개인적인 친소(親疏) 관계에서 맺어지는 작품 선정의 편향성을 극복하는 공정하고 객관적인 편집 태도라 할 수 있겠다.
삽이란 발음이, 소리가 요즈음 들어 겁나게 좋다 삽, 땅을 여는 연장인데 왜 이토록 입술 얌전하게 다물어 소리를 거두어들이는 것일까 속내가 있다 삽, 거칠지가 않구나 좋구나 아주 잘 드는 소리, 그러면서도 한군데로 모아지는 소리, 한 자정子正에 네 속으로 그렇게 지나가는 소리 가 난다 이 삽 한 자루로 너를 파고자 했다 내 무덤 하나 짓고자 했다 했으나 왜 아직도 여기인가 삽, 젖은 먼지 내 나는 내 곳간, 구석에 기대 서 있는 작달막한 삽 한 자루, 닦기는 내가 늘 빛나게 닦아서 녹슬지 않았다 오달지게 한번 써볼 작정이다 삽, 오늘도 나를 殮하며 마른 볏짚으로 한나절 너를 문질렀다 - <현대문학> 1월호
시작노트
'삽'은 내게 있어 실물이라기보다는 사랑의 연장이며 영혼의 연장이며 시의 연장이다. 발굴과 탐색과 발견을 이 연장이 해내고 있다고 믿는다. 음성상징만으로도 그에 맞아떨어지는 존재의 실체다. 이 시에서 중요한 관건은 <오늘도 나를 殮하며>에 있다. 부모가 죽으면 산에다 묻고 자식이 죽으면 가슴에 묻는다 했던가 그런 절대의 사랑 행위를 '삽'으로 무덤 하나 짓는 '주검'의 정중한 간수라고 생각하고 있다. - 정진규 <삽>(150쪽)
우리는 <2007 '작가'가 선정한 오늘의 시>라는 한 권의 책으로 지난 1년 동안 나온 우리 시단의 우수 작품 89편을 한꺼번에 감상할 수 있는 기쁨을 맞볼 수 있다. 그리고 지난해에 나온 22권의 시집을 평론가의 자세한 서평(書評) 안내를 받으면서 새롭게 읽을 수 있다.
전국 150명 선정위원의 설문 조사 결과는 시 가운데서는 김신용 시인의 <도장골 시편>이, 시집 부문에서는 유홍준의 <나는, 웃는다>(창비)가 가장 많은 표를 받았다. 기획위원회(유성호, 박수연, 김수이)의 '펴내면서'에 의하면 김신용 시인의 <도장골 시편>은 "내면과 현실의 지극한 싸움의 기록이기도 한 이 시편은, 소멸과 폐허를 뛰어넘어 새로운 정신적 지경(地境)을 열어 보이고 있다"고 했고, 유홍준의 시집<나는, 웃는다>를 두고는 "노동 경험과 가족사에 대한 서사의 접근을 통해 우리의 일상 속에 담겨 있는 기억의 심층을 다루고 있"다고 평하고 있다.
유홍준의 시집 <나는, 웃는다>와 함께 올라온 시집들로는 김사인 <가만히 좋아하는>(창비), 문태준<가재미>(문학과지성사), 안현미<곰곰>(랜덤하우스중앙), 최문자<그녀는 믿는 버릇이 있다>(랜덤하우스), 황동규<꽃의 고요>(문학과지성사), 김경주<나는 이 세상에 없는 계절이다>(랜덤하우스중앙), 조말선<둥근 발작(창비)>, 강정<들려주려니 말이라 했지만>(문학동네), 박찬일<모자나무>(민음사), 손택수<목련 전차>(창비), 성선경<몽유도원을 사다>(천년의시작), 고형렬<밤 미시령>(창비), 김지하<새벽강>(시학), 서우승<생각도 단풍 들면>(고요아침), 오탁번<손님>(황금알), 문인수<쉬!>(문학동네), 신중신<아름다운 날들>(모아드림), 곽효환<인디오 여인>(민음사), 김세진<점자블록>(만인사), 이장욱<정오의 희망곡>(문학과지성사), 박후기<종이는 나무의 유전자를 기억하고 있다>(실천문학사) 등이 있다.
선정된 89편의 우수 작품 가운데는 김연동, 김영재, 박기섭, 박시교, 이우걸, 이정환, 정수자, 조오현 등의 시조 작품이 있어 눈길을 끈다.
나는 요새 좋은 시조 작품을 읽는 솔 솔한 재미에 빠져있는데, 이 시조 작품들의 빼어난 언어 조형성과 운율감이 감칠맛 나게 좋다. 포항이라는 좁은 지역에서 문학 활동을 함께 하고 있는 서숙희 시인의 시조 '물소리를 듣다'를 다시 읽는다.
때론 보이지 않을 때 열려오는 귀가 있다
달없는 밤 냇가에 앉아 듣는 물소리는
세상의 옹이며 모서리들을 둥근 율(律)로 풀어 낸다
물과 돌이 빚어내는 저 무구함의 세계는
제 길 막는 돌에게 제 살 깎는 물에게
서로가 길 열어주려 몸 낮추는 소리다
누군가를 향해 세운 익명의 날(刀)이 있다면
냇가에 앉아 물소리에 귀를 맡길 일이다
무채색 순한 경전이 가슴에 돌아들 것이니 - 서숙희 '물소리를 듣다'(66쪽)
노자 <도덕경>의 가장 핵심적인 구절이 '상선약수(上善若水)'라는 말이 아닐까. 달 없는 밤, 계곡에서 물과 돌이 부딪치며 "서로가 길 열어주려 몸 낮추는 소리"를 읽어내는 시인은 벌써 "무채색 순한 경전"을 가슴에 품고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우리들 세상살이에 너무 아옹다옹 하지는 말고 이처럼 달 없는 밤, 계곡에 나가 물소리에 귀를 한 번 맡겨 볼 일이다. 그렇게 물소리에 귀를 씻고 나면 삶의 새 길이 눈앞에 펼쳐질지도 모른다.
시는 우리들이 세상을 살아가는데 꼭 필요한 마음의 눈을 갖게 해준다. 독자여! 우리 시대 현역 시인들의 가편(佳篇)들을 많이 읽어 내 마음의 눈을 곧고 정하게 닦아볼 일이다.
덧붙이는 글 | 이 기사는 경북매일신문 '이종암의 책 이야기'에도 실렸습니다. 오마이뉴스는 직접 작성한 글에 한해 중복 게재를 허용하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