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티오피아에서의 모든 여행 일정을 마치고 아디스아바바에서 하루를 더 머문 나는 다음날 비행기로 케냐 나이로비로 가기로 했다.
남부지역의 원시부족 마을에 관심이 없다보니 굳이 도로사정이 나빠 며칠이 걸릴지 모르고, 우기여서 비라도 오면 발이 꽁꽁 묶일지도 모르는 상황에서 육로를 통해 케냐로 갈 필요가 없어진 것. 케냐부터는 남아공까지 두 달 이상의 오랜 시간을 버스와 기차로 내려가야 하는 고된 행군도 한 이유이다.
특별한 일정이 없는 나는 숙소 근처에 있는 인터넷카페에 갔는데, 영어로만 서비스가 되는 데도 너무 느려 도저히 사용할 수가 없을 정도이다.
인터넷카페 이용은 1시간에 12비르(1500원)여서 그리 비싸지는 않았다. 대신 디지털카메라로 찍은 에티오피아 사진을 역시 12비르를 주고 인터넷카페에서 시디(CD, 콤팩트디스크)로 구웠다. 카메라 분실에 대비한 것이다.
이슬람 예배실이 마련되어 있는 아디스아바바 국제공항
인터넷카페에서 나와 언덕위의 드골광장 주변에 있는 잡화 가게에 갔더니 'SAMSUNG' 상표가 붙은 건전지가 있어 4개짜리 건전지 묶음을 4개나 샀다. 우리나라 삼성그룹이 건전지도 만드나 하는 의구심이 들기도 했지만 그래도 삼성이라면 믿을 수 있겠지 하는 마음으로 샀다. 그러나 미심쩍던 이 건전지는 나중에 탄자니아 킬리만자로를 오르면서 나를 꽤나 당혹스럽게 만들었다.
다음날 아침 케냐 나이로비로 가는 비행기를 타기 위해 볼레 국제공항으로 갔다. 공항 청사는 국제공항 치고는 그리 크지 않지만, 지난 2003년도에 새로 지어 아주 깨끗하고 탑승객 이외에는 아예 청사 출입을 막는 등 테러와 안전에 철저히 대비하고 있었다.
출국 심사를 마치고 2층 청사로 올라가니 면세점 옆에 내 눈을 끄고 곳이 있었는데, 바로 이슬람교들을 위한 예배실. 영어로 'Prayer Room'이라고 쓴 남자 예배실이 있고, 중간에 남녀 화장실이 있고, 다음에 여자 예배실이 따로 만들어져 있었다. 아시아나 유럽 등지에서는 볼 수 없는 특이한 장면이다.
호기심이 발동한 나는 남자 예배실을 보고 싶었다. 문이 열려 있는 남자 예배실에는 하얀 가운을 걸친 4명의 이슬람신자들이 피곤했던지 양탄자가 깔린 바닥에 새우잠을 자고 있었다.
예배실은 예배 방향인 메카를 가리키는 아치형으로 파인 장소인 '미흐라브' 이외에는 아무 것도 없는 사각형 벽면으로 되어 있었다. 예배실은 이슬람신자들에게 기도 겸 휴게실로 사용되고 있었다. 이슬람교도들은 새벽과 정오, 오후, 일몰, 한밤 등 하루 다섯 차례의 예배(사라트)를 드려야 하기 때문에 이처럼 공항청사에 예배실을 특별히 마련해 놓은 것.
잠시 후 비행기 탑승을 알리는 안내방송이 나왔다. 아프리카 여행의 첫 도착지여서 그럴까. 에티오피아를 떠나야한다고 생각하니 마치 첫 사랑을 남겨 놓고 가는 듯한 아스라함이 갑자기 밀려왔다. 진한 에티오피아 커피 향기의 여운이 겹치면서. 비행기에 오르니 주로 유럽 승객들과 현지 아프리카인들로 꽉 차 있었다.
전세계 국기 중 가장 철학적인 한국 태극기
자리에 앉자마자 앞에 꽂혀 있는 항공사 기내잡지가 눈에 들어왔다. 기내잡지는 그 나라에 대한 간략한 소개와 함께 생생한 여행정보들도 들어 있어 여행객들에게는 요긴한 책자. 마침 에티오피아 항공사 6월호 기내잡지 기사 중에는 2006년 독일 월드컵 경기에 맞춰 세계 각국의 국기에 대한 내용이 실려 있었다.
브라이언 존스턴이라는 칼럼니스트가 쓴 '국기를 높이 휘날리며'라는 제목의 기사에는 초록과 노랑, 빨강의 3색으로 된 에티오피아의 국기에 대한 설명도 있는데, 마지막 결론부분이 눈에 쏙 들어왔다.
전 세계 국기 중 "가장 철학적인 국기"로 우리나라의 태극기를 꼽고 있었던 것. 그는 "한국의 국기는 신비주의와 전통사상을 상징한다"며 "중심에 있는 파란색의 반원과 빨간색 반원(태극문양을 가리킴)은 음양의 통합을 대표하고, 우주만물의 상호작용의 이원론을 강조한다"고 설명했다.
또한 "주변의 이어진 선과 끊어진 선으로 이뤄진 4개의 3선형 괘는 하늘과 땅, 물과 불을 대표할 뿐 아니라 나아가 '반대와 균형(opposites and balance')의 이론을 보여 준다"고 태극기에 담겨 있는 철학을 자세히 설명하고 있었다.
그가 태극기를 가장 철학적으로 꼽은 이유 중의 하나가 기사 끝머리에 뒤따랐다. "균형은 재능과 열정 뿐 아니라 월드컵 축구경기에서 선수들이 꼭 필요로 하는 자질 중의 하나"라는 결론이다. 스포츠에서는 승부 못지않게 상대를 인정하는 균형감과 조화감이 필요로 하다는 것을 우리 태극기의 철학에서 찾고 있었다.
평소 우리 태극기와 애국가가 너무 복잡한데다 이미지도 정적이고 소극적인 느낌이 들어 언제가 통일이 되면 새로운 진취적 기상의 국기와 행진곡풍의 경쾌한 국가가 필요하다고 느끼고 있던 나에게는 의외였는데, 멀리 아프리카 비행기 안에서 이런 기사를 읽으니 묘한 기분이 들었다.
점심으로 나온 기내식을 먹고 잠시 눈을 부치니 벌써 케냐의 나이로비 공항에 도착했다. 에티오피아 아디스아바바에서 케냐 나이로비까지는 비행기로 2시간. 서울과 도쿄를 가는 것만큼 가깝다. 경도도 비슷하니 에티오피아와 케냐는 시간대도 같다. 시차가 없다는 뜻이다.
나는 76일간 아프리카를 종단하면서 시차에 별 신경을 쓰지 않아 좋았다. 아프리카 횡단이 아닌, 위에서 밑으로 내려오는 종단이다 보니 경도가 비슷해 경도에 따른 시간대가 대부분 일치했던 것이다. 시차가 없다보니 육체적인 피로감도 적고 시간조정에 신경을 쓸 필요가 없어 편리했다. 종단여행의 장점은 이처럼 시차가 없다는 것도 하나의 이점이다.
내가 방문했던 에티오피아와 케냐·탄자니아·우간다·마다가스카르는 우리나라보다는 6시간이 늦고 국제표준시인 그리니치 표준시각(GMT)보다는 3시간 빠른 같은 시간대였다. 르완다와 말라위·모잠비크·짐바브웨·잠비아·보츠와나·남아공·나미비아 등은 우리보다 7시간 늦고 그리니치 표준시각보다 2시간 빠르다. 콩고는 우리보다 8시간 늦고 그리니치 표준시각보다 1시간 빠른 시간대였다.
비행기에서 만난 '버스' 조끼
나이로비 공항에 착륙한 비행기가 승객을 내리기 위해 활주로를 따라 청사건물 쪽으로 미끄러져 가는데, 오른쪽에 있는 내 자리보다 두 좌석 앞에 있는 왼쪽 좌석에 타고 있던 승객의 어린아이가 갑자기 울음을 터트렸다. 어딘가 아픈 모양이다. 동양계로 보이는 젊은 부부가 좀처럼 울음을 그치지 않는 아이를 달래느라 고생을 하고 있었다.
비행기가 멈추고 승객들이 내릴 준비를 하려는데 아이를 달래는 남자의 윗옷에 웬 한글이 보였다. 등산용 조끼를 겹쳐 입은 남자의 등 쪽에 '버스'라는 한글이 선명히 쓰여 있었다. 나는 속으로 우리나라 버스회사 노조원 가족이 놀러 온 것인가, 아니면 현지 교포인가 궁금했다. 회사 노조원들이 자신의 회사 이름을 새긴 등산용 조끼를 단체 유니폼으로 입고 다니는 것을 자주 보았기 때문이다.
반가운 나머지 "안녕하세요, 한국에서 오셨어요"라고 내가 먼저 인사를 했다. 며칠 되지 않았지만 아프리카에서 우리나라 사람을 처음으로 만나니 기쁘기도 하고, 나이로비는 워낙 위험한 곳이라 공항에서 여행객 숙소로 가는 길이 걱정이 되기도 하던 참이었다. 같은 택시를 타고 가면 안전할 수 있다는 생각도 들고.
뒤에서 들려오는 우리말 소리에 앞의 부부가 더 놀랐는지 자리에서 일어나면서 "어, 우리나라 사람이예요"라고 반긴다.
자리에서 일어나는데 보니 등 쪽의 문구는 '굿네이버스'라고 쓰여 있었다. 굿네이버스라는 단체에서 해외 봉사활동을 나온 가족이었다. 비행기 좌석에 가려 앞의 세 글자인 '굿네이'는 보이지 않고 '버스'만 보여서 엉뚱한 상상을 하게 된 것이었다. 쓴웃음이 나왔다. 엉뚱한 버스회사를 연상하다니.
나는 '버스'라는 두 글자만 보여 버스회사에서 놀러온 것으로 생각했다고 하자 부부는 "버스회사 운전사들이 어떻게 아프리카까지 놀러올 수 있겠어요"라며 웃는다. 굿네이버스(Good Neighbors)는 1991년 기독교 정신에 입각해 국제적 가난과 인간의 소외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한국인이 세운 국제적 비영리단체다.
30대 초반으로 보이는 젊은 부부는 앞으로 탄자니아 다르에스살람에서 5년간 봉사활동을 하기 위해 가는 길이었다. 에티오피아 지부에서 활동하고 있는 동료 봉사요원을 만나 아프리카 상황에 대한 설명을 들은 뒤 케냐 나이로비 지부를 방문한 뒤 실제 근무지인 다르에스살람으로 갈 계획이라는 것. 우리는 공항청사에서 미국 돈 50달러를 주고 3개월짜리 여행 비자를 받았다.
나이로비 국제공항의 이름은 '조모 케냐타' 공항인데, 바로 케냐의 독립 운동가이자 초대 대통령의 이름을 따서 지은 이름. 탄자니아 다르에스살람에 있는 줄리어스 니예레레 국제공항도 탄자니아의 독립운동가이자 초대 대통령의 이름을 딴 것이다. 아프리카에도 이처럼 독립운동을 한 국가적 영웅의 이름을 딴 공항이나 거리의 이름들이 즐비하다.
미국 뉴욕의 존 에프 케네디 국제공항이나 프랑스 파리의 샤를 드골 국제공항처럼 자신의 국가적 영웅을 이름을 붙인 외국 공항을 보면서 항상 느꼈지만, 우리는 왜 인천국제공항을 김구국제공항으로 부르지 못할까.
왜 우린 인천국제공항을 '김구공항'이라고 못할까
젊은 부부를 마중 나온 굿네이버스 케냐 지부장의 차에 같이 올라탔다. 공항을 나오자마자 정말 아프리카에 왔다는 느낌이 한눈에 들어왔다. 뜨거운 태양이 내리쬐고, 넓은 열대 초원이 펼쳐지고, 비가 오는 우기와 가뭄이 시작되는 건기가 뚜렷한 사바나 기후. 하늘이 짙푸르고 또 그렇게 낮을 수가 없다.
머리 위에 떠있는 하얀 구름을 하늘이 감싸 안고, 하늘 천장이 무지개처럼 띠를 두른 듯 둥근 하늘과 땅이 지평선에 맞닿아 있었다. 동물의 왕국인 푸른 초원의 아프리카에 도착한 것이다. 산악지대인 에티오피아에서는 넓은 들판이나 낮은 하늘을 본 적이 거의 없었다.
실제로도 동서로 이집트와 모로코, 남북으로 나일강을 따라 에티오피아에 이르는 지역은 북아프리카로 지중해 세계에 속하고, 케냐부터를 사실상 사하라사막 이남의 블랙아프리카로 분류한다.
눈에 띄는 또 다른 특징은 차가 우리와 달리 오른쪽 통행을 한다는 점. 과거 영국의 식민지여서 그 영향을 받아 우측통행을 하는 것이다. 한참을 달린 다음 내가 내린 곳은 대형 쇼핑몰. 그들은 시 외곽에 있는 자신들의 사무실로 가고, 나는 쇼핑몰에서 다시 택시를 잡아타고 시내중심가에 있는 숙소로 가야했다.
나중에 보니 공항에서 바로 들어가면 오히려 빠를 뻔 했다. 나는 공항에서 서쪽의 시내 외곽으로 빠져 나가 킬리마니 도로에 있는 야야센터라는 현대식 쇼핑센터까지 갔던 것. 남서쪽 외곽인 야야센터에서 서쪽으로 10여분 가면 남아공의 소웨토와 함께 80만 명의 가난한 사람들이 모여 살고 있는 아프리카 최대의 빈민촌인 키베라가 있다.
택시를 타고 케냐타 거리를 통해 숙소가 있는 시내로 들어오는 데, 교통체증도 심하고 하늘을 찌를 듯한 높은 건물들이 빽빽이 들어차 있었다. 수많은 차량들과 초현대식 건물들은 마치 미국 뉴욕이나 유럽의 대도시와 다를 바가 없다. 아프리카의 첫 시작을 에티오피아에서 해서인지 더 놀라울 뿐이다.
옛날 타잔이 살던 중서부 아프리카의 열대우림처럼, 동아프리카 나이로비에는 나무숲 대신 높고 큰 빌딩숲이 우거져 있었다. 조모 케냐타 공항의 규모부터가 국제공항답게 크고, 공항 입구에서부터 잘 포장된 넓은 도로가 아직도 가난과 저개발에 시달리는 에티오피아와 뚜렷이 대비된다.
나이로비가 괜히 아프리카의 관문이라고 불리는 것이 아니었다. 이집트 카이로에서 남아공의 요하네스버그사이에서 가장 큰 도시이고, 유럽과 아시아, 아프리카를 연결하는 국제선 비행기들이 드나드는 실질적인 아프리카의 심장역할을 하고 있었다.
일단 모든 피는 심장을 거친 다음 동맥을 통해 흘러가듯 동아프리카 여행을 하려는 여행객이라면 누구나 일단은 나이로비로 들어왔다 다시 자신의 목적지로 퍼져가야 한다.
나이로비 택시기사, 바가지 씌우고는 위협까지
이처럼 나이로비는 동아프리카 최대의 도시로 꼽히지만 불과 100여 년 전만 해도 나이로비 강이 흐르는 마사이족과 키쿠유족이 살던 습지대였다. 마사이어로 '차가운 물'이라는 뜻인 나이로비는 에티오피아 디레다와처럼 철도가 건설한 전형적인 신흥도시이다.
영국식민지 정부가 지난 1896년 케냐의 인도양 연안도시 몸바사에서 우간다의 빅토리아 호까지 연결하는 철도건설의 전초기지이자 중간 역으로 나이로비를 만들고, 1901년에는 식민지 총독 청사마저 몸바사에서 이 곳으로 옮겨오면서 최대의 도시로 부상하게 된 것이다. 영국인들이 이 곳을 선호한 것은 아프리카답지 않게 해발고도 1676m의 고원으로 기후가 서늘하고 땅이 비옥하다는 것도 한 이유였다.
그러나 나이로비는 화려한 대도시라는 생각도 잠시. 위험한 도시라는 낙인을 찍는 체험을 하게 된다. 시내중심가에 있는 숙소인 뉴케냐롯지에 도착하자마자 나이로비의 진짜모습을 보기도 전에 택시기사의 위협적 횡포를 경험한 것. 내가 공항에서 환전한 1000 케냐 실링(1달러=80실링)을 주자 택시기사는 "잔돈이 없다"며 거스름돈을 주지 않는다.
야야센터에서 탈 때 미리 700실링으로 흥정이 끝났는데 아예 딴소리를 하는 것이다. 내가 "700실링으로 약속해놓고 무슨 소리냐"고 따지자 택시기사는 "유, 폴리스(당신 경찰 부를 거야)"라고 오히려 위협적인 자세로 나온다.
나이로비의 첫 경험은 단순한 택시기사의 횡포가 아니라 위협적인 공포였다. 그렇잖아도 나이로비는 남아공의 요하네스버그와 함께 아프리카에서 가장 위험한 도시로 악명이 높은 곳이다. 그래서 나는 케냐를 가능한 빨리 떠나야겠다고 도착하자마자 결심했다. 물론 나이로비에 온 것도 사실은 우간다로 가기위한 중간 기착지였지만.
리버 거리와 라테마 거리가 만나는 곳에 있는 뉴케냐롯지는 대표적인 도심 슬럼가이다. 재래시장과 대중교통 버스정류장이 가까이 있어 하루 종일 사람들로 북적거리고 차량과 물건들로 혼잡스런 곳이다.
숙소 뒤로는 곧 무너질 것 같은 허름한 건물들이 그대로 방치된 채 흉물로 남아 있고, 강절도가 끊이지 않는 대표적인 위험지역이다. 여행책자에서도 별로 추천하지 않는 지역이다. 아니 오히려 기피대상지역이다. 그러나 가격이 워낙 싸고 시내중심가에 있어 교통이 편리하다는 이유 때문에 찾은 것이다.
나는 택시요금의 거스름돈을 포기하고 뉴케냐롯지로 달려가 문을 두드렸다. 길가의 입구 문에서부터 철제문으로 단단히 닫혀 있었다. 문을 두드리자 안에서 일하는 사람이 나와 열어주었다. 다시 계단을 올라가니 안쪽의 출입문도 철제로 커다란 열쇠로 채워져 있다. 마치 보안시설이 철저한 교도소 출입문처럼 도시안의 요새였다.
주변이 모두 위험지대라보니 여행객 숙소의 시설도 철저하게 보안시설을 갖추고 있는 것이다. 숙소를 드나들 때도 일일이 벨을 눌러 종업원을 부른 뒤 철제문을 열어달라고 해야 할 정도로 불편하기도 하다. 그만큼 위험하기 때문에 보안시설의 불편쯤은 감수해야 한다.
아프리카의 관문은 곳곳이 위험지대
숙소에 들어가 잠시 배낭을 내려놓고 쉬고 있는데, 우리나라의 젊은 여행객이 배낭 하나만을 메고 들어왔다. 여름방학을 맞아 아프리카 여행을 온 대학생이었다.
대학에서 관광경영학을 전공하는 학생은 방학 때면 혼자서 아시아와 유럽 등 여러 나라를 배낭여행을 했던 전문가 수준이었다. 한국에서 라면과 김치, 고추장 등 먹을거리도 가져와 숙소에서 직접 밥을 지어 먹는 등 초절전 여행객의 모범. 학기 중에는 이론을 공부하고 방학 때는 가난한 배낭여행을 통해 실전을 익히는 모습이 대견해보였다.
자신의 장차 희망 직업도 관광경영 전공과 같은 게스트하우스(여행객 숙소) 운영이라고 하니 어쩌면 배낭여행은 학점 없는 필수코스인 셈이다. 나는 이 학생과 함께 한방에 4명이 같이 자는 이른바 공동 숙박시설인 도미토리 방으로 들어갔다. 하루에 370실링(4600원). 당연히 여러 명이 함께 자는 도미토리식 방을 이용하면 숙박 요금을 줄일 수 있다.
우리가 들어간 6호실 방에는 이미 일본 젊은 여행객 2명이 투숙하고 있었다. 그런데 침대위에 입던 옷가지 등을 그대로 팽개치고, 버너 등 요리기구 등을 어지럽게 방안에 내버려둔 것이 아무래도 심상찮다.
3호실 방에는 또 다른 한국 여행객이 있었다. 숙소의 직원이 "코리아에서 온 여행객이 있다"고 먼저 알려준다. 젊은 남자는 의사이고, 다른 여자 여행객은 재미교포 대학생이었고, 또 이들과 같이 방을 쓰는 뉴질랜드 출신 젊은 남자 여행객이었다. 이들 역시 아프리카 여행 중 우연히 만난 사이라고 한다.
첫날이라 나와 대학생은 현지인 음식을 먹어보기 위해 숙소 바로 앞의 허름한 현지인 식당으로 갔다. 퇴근 시간 무렵이어서 인지 거리는 차를 타려는 사람들로 북적북적 거렸다. 바로 앞이 케냐의 대중교통수단인 마타투(Matatu) 버스정류장.
차안은 이미 사람들로 콩나물시루처럼 꽉 찼는데도, 남자 차장은 한명이라고 더 태우려고 목적지를 외치며 연신 승객을 부르고 있었다. 손님이 꽉 차야 출발하는 아프리카의 대중교통수단인 마타투는 일반적으로 봉고버스 또는 미니버스와 같다고 보면 된다. 아프리카 여행 중 이런 장면은 어디서나 볼 수 있는 흔한 모습이다.
아프리카인들의 주식은 무엇일까
식당에는 역시 저녁시간이어서인지 현지인들로 발 디딜 틈이 없을 정도로 가득했다. 어떤 사람은 대충 밥을 먹고는 떠나려는 마타투를 놓치지 않기 위해 급히 뛰어가기도 했다.
식당주인에게 추천을 해달라고 하자 전통음식을 내놓는다. 우갈리(Ugali)라는 케냐의 대표적인 전통음식. 옥수수 가루를 쪄서 만든 우리의 백설기 떡과 같은 음식이다. 우갈리와 함께 쇠고기, 야채 등이 딸려 나왔다. 옥수수는 동아프리카 주민들의 주식이라고 할 수 있다.
내가 여행 중 맛본 아프리카의 음식은 나라마다 다양했다.
에티오피아는 인제라, 케냐는 우갈리, 그리고 우간다는 찐 바나나를 주로 먹었고, 잔지바르와 같은 인도양 연안의 스와힐리지역에서는 쌀을 코코넛주스로 찐 '왈리 와 나찌'(Wali Wa Nazi, 코코넛 밥), 그리고 냐마초마(Nyama choma)라는 구운 쇠고기와 양고기, 닭고기를 먹는다.
또 호수가 있는 말라위와 인도양의 잔지바르, 남아공 해안 지역에서는 생선도 즐겨 먹고 있었다. 섬나라 마다가스카르에서는 우리와 똑같이 쌀이 주식이었고, 야채와 닭고기가 곁들여 나왔다.
커피를 주로 마시는 에티오피아와 달리 동부 아프리카 사람들은 밥을 먹은 뒤 우리의 홍차와 같은 '차이'(Chai)라는 차에 우유와 설탕을 넣어 마셨다. 이처럼 우리 입맛에도 대부분 맞는 음식이어서 음식 자체에 대한 거부감은 거의 없었다.
오히려 시간에 쫓기고 오랜 버스 탑승으로 인해 끼니를 놓치거나, 아니면 위생상 걱정이 되어 함부로 음식을 못 먹다보니 배를 굶주리는 등 고생한 적은 많았지만.
한국인 여행객은 모두 마침 한국팀이 출전하는 월드컵 축구를 구경한다며 밤 8시께 교외의 한국인이 운영하는 호텔로 갔고, 말라리아약 부작용으로 머리가 아픈 나만 숙소에 남아 쉬었다.
말라리아에 감염된 모기에 물려 전염되는 말라리아 병은 원래 여행 출발 전 1주일부터 약을 복용해야 하는데, 나는 준비부족으로 출발 당일 인천공항에서 말라리아 약을 사서 일주일에 한번 복용하는 약을 사흘마다 한번 씩 복용했더니 탈이 난 것이었다. 한꺼번에 너무 많은 약을 먹다보디 머리가 어지럽고 다리 상처 부위에 진물이 나는 등 부작용이 나타났다.
일본 여행객들의 여행노트, 정보가 살아 숨쉰다
숙소 라운지에 나와 현지인 직원들과 얘기를 나누는데, 일본에서 온 여행객 3명이 외출했다 돌아와 대화에 끼었다. 뉴케냐롯지는 직원들이 친절하고 여행객은 누구나 자연스럽게 어우러져 대화를 나누는 국제적 사랑방이다.
미국과 네덜란드 여행객도 일부 있었지만, 대부분 일본과 아시아인들이 많은 아시아인 전용숙소 같았다. 일본인 남자 2명은 나와 같은 숙소를 사용하는 여행객이었다.
한 명은 팬터마임을 해서 푼돈을 모아 여행경비로 쓰면서 지금까지 5년 동안 세계 여행을 하고 있었다. 그는 항상 홍콩계 영화배우 브루스 리(이소룡)가 사용하는 쌍절곤을 손에 들고 다녔다. 아프리카 강도들도 그에게는 감히 덤벼들지 못할 것 같았다.
다른 한명은 태국과 베트남을 거쳐 3개월째 여행을 하고 있었고, 또 다른 방에 있는 미호라는 이름의 일본 여자 배낭여행객은 제과사. 일본의 제과점에서 3년 반이나 빵을 구웠다는 그녀는 아프리카를 거쳐 유럽, 남아메리카까지 세계 일주를 한 뒤 일본으로 돌아가면 제일 맛있는 빵집을 낼 계획이라고 말했다.
뉴케냐롯지는 아시아인 중에서도 유독 일본여행객이 압도적이지만, 일본어로 된 아프리카 여행책자와 여행정보, 여행노트 등이 많이 놓여 있었다. 아프리카를 여행하고 떠나는 일본 여행객들이 다음 여행객들을 위해 남겨놓은 것들이다.
한 일본 여행객이 남겨놓은 여행노트가 인상적이다. 여행 날짜별로 일기 쓰듯이 자세히 기록해 놓았는데, 케냐 국립박물관이 공사 중이어서 잠정 폐관되었다는 이야기에서부터 어떤 여행객이 탄자니아 다르에스살람에서 강도를 당했다는 사실 등 위험지역, 꼭 가봐야 할 곳 등 추천명소 등을 구체적으로 기록해 놓았다.
노트에는 글과 함께 세세한 약도를 직접 볼펜으로 그려놓는 등 세심히 배려한 흔적이 역력했다. 살아있는 생생한 여행책자가 따로 없었다. 일본 여행객들은 자신이 쓰던 일본어로 된 <세계를 간다>라는 책 등 아프리카 여행책자도 많이 남겨 놓았다. 일본인들의 기록문화와 정보 공유 정신만큼은 정말 본받을 만 하다.
여행객 숙소에 걸려있는 케냐 대통령 사진
숙소 라운지 벽에는 케냐 현직 대통령인 므와이 키바키의 사진이 걸려 있었다. 외국인 여행객 숙소까지 대통령의 사진을 굳이 걸 필요가 있을까. 아직도 남아 있는 민주주의 후진국형 현상 중 하나임에 틀림없다. 사업하는 사람 입장에서는 혹시 관청으로부터 불이익을 받지 않을까 걱정이 되기도 할 것이다.
케냐는 독립 후 1963년 키쿠유 족 출신인 조모 케냐타가 대통령이 된 뒤 그 후계자인 소수부족인 칼렌진 족인 다니엘 아랍 모이 부통령이 1978년 이어 받아 사실상 일당 독재체제를 유지해왔다.
이처럼 오랫동안 장기 독재체제를 유지할 수 있었던 것은 냉전시대에 아프리카에서 공산주의의 팽창을 막아주는 전초기지로서의 케냐의 역할 때문이었다. 탄자니아와 에티오피아 등 대부분의 아프리카 국가들이 자신들을 식민지로 지배했던 제국주의에 대한 반감으로 사회주의로 기울 때 거의 유일하게 자본주의의 길을 걸어온 나라가 바로 케냐.
케냐의 독재체제를 눈감아주던 서방세계는 1990년대 소련의 몰락으로 냉전시대가 끝나면서 뒤늦게 압력을 행사하기 시작했다.
이에 따른 경제적 어려움이 가중되자 모이는 스스로 물러나면서 2002년 12월 대통령 선거를 실시했는데, 야당인 '민족연맹무지개연합당'의 음와이 키바키가 모이 대통령이 밀던 여당인 '케냐아프리카민족동맹'의 우후루 케냐타 후보를 압도적인 표차로 이기고 최초로 여야 간 정권교체를 이룬다.
선거에 진 여당 후보인 우후루 케냐타는 바로 초대 대통령인 조모 케냐타의 아들. 우후루는 국부로 추앙받는 아버지의 후광에도 불구하고 집권여당의 오랜 독재와 부패에 대한 국민적 반감의 정서를 뛰어넘지 못했던 것이다.
아프리카의 독립투사들, 서방언론에 외면당한 까닭
조모 케나타는 독립투쟁 중 7년간의 옥살이를 하는 등 아프리카 독립운동의 전설적 인물 중 한 명이다.
2차 세계대전이 끝난 직후인 1945년 10월 영국 맨체스터에서 열린 제5차 범아프리카 회의에는 조국의 독립을 쟁취하려는 젊은 아프리카인들이 대거 모였다. 이들은 "우리는 자유롭게 되기로 결정하였다"라는 유명한 아프리칸판 독립선언서를 채택했는데, 조모 케냐타는 케냐의 대표로 여기에 참여했다.
이 모임에 참여했던 많은 인물들이 독립 후 아프리카 국가의 초대 대통령이 되었는데 조모 케냐타를 비롯해 탄자니아의 줄리어스 니예레레, 잠비아의 케네스 카운다, 가나의 콰메 은크루마, 나이지리아의 은남디 아지키웨, 기니의 아메드 세쿠 투레 등 아프리카에는 이처럼 쟁쟁한 독립투사들이 즐비하다.
다만, 이들이 대부분 사회주의적 성향을 보이자 서방언론들이 외면했을 뿐이다. 나이로비 시내중심가에 있는 카운다 거리와 은크루마 거리는 바로 이들의 이름을 기려서 붙인 것.
나는 벽에 걸린 키바키 대통령의 사진을 가리키며 숙소 청소와 숙박정리를 하는 30대 초반의 여직원에게 조심스레 물었다. 좋아하느냐고. 그런데 그녀의 대답이 서슴없다. 좋아하지 않는다고. 그녀는 "지난번 대통령 선거에서도 우후루 케냐타를 지지했다"며 "다음 선거에서는 우후루가 반드시 대통령이 될 것"이라고 확신하고 있었다.
"왜 우후루를 좋아하느냐."
"그가 젊고 똑똑하기 때문이다"
"우후루가 케냐타 초대 대통령의 아들이어서 좋아하는 것이 아니냐."
"그렇지 않다. 우후루 개인을 좋아한다."
키바키 현 대통령은 부통령을 역임한 75세의 노련한 정치인이었고, 우후루는 미국에서 공부한 45세의 젊은 엘리트. 케냐에서도 처음으로 여야 간 정권교체가 이뤄진 뒤에는 다당제가 정착되고 언론의 자유도 보장되는 등 상당히 민주주의가 정착되어가고 있다.
여직원의 자유로운 정치적 의사표현에서 이를 실감할 수 있었다. 케냐도 우리의 유신시대와 신군부 시절처럼 말한마디 잘못하면 불법체포와 감금, 고문과 투옥이 자행됐던 것이 엊그제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