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제 봄 수업을 했습니다. 어찌나 햇살이 곱고 따사로운지 생각 같아서는 교실을 박차고 나와 학교 주변에 지천으로 피어 있는 꽃들을 구경시켜주고 싶었지만, 그런 낭만이 용납되지 않는 학교 현실도 현실인지라 그냥 교실에서 봄 수업을 했습니다.
하얀 종이를 한 장씩 나누어주고 그곳에 봄을 담아보라고 했습니다. 봄에 생각나는 것들을 적어보고 자신의 꿈 이야기도 써보라고 했습니다. '나에게 쓰는 편지' 혹은 '나의 안부 묻기'라는 이상한 제목의 편지도 한 번 써보라고 했습니다. 어떤 형식에 얽매이지 말고 자유롭게 쓰되, 혼자만의 시간을 가져보라고 했습니다.
처음에는 무슨 말인가 싶어 우왕좌왕하던 아이들이 5분쯤 지나자 하얀 종이에 깨알 같은 글씨로 수놓기 시작했습니다. 천방지축 까불 줄만 알았던 아이들도 제법 꼬마 철학자 같은 진지한 모습으로 무언가 열심히 적고 있었습니다. 저는 그런 고즈넉한 교실 풍경 속으로 노래 한 곡을 흘러 보냈습니다. 아이들의 공책에도 적혀 있는 가수 아바의 '나에게는 꿈이 있어요'는 이런 아름다운 가사로 시작하지요.
나에겐 꿈과 부를 노래가 있답니다.
어떤 고난도 뚫고 갈 수 있는
당신도 아름다운 동화의 경이로움을 본다면
실패해도 당신은 미래를 잃지 않을 겁니다.
저는 해마다 아이들에게 이 노래를 가르쳐주면서 꿈에 대한 이야기를 해주곤 합니다. 노랫말처럼 꿈과 노래가 있어야 어떤 고난도 이길 수 있다는 말도 덧붙이면서 말입니다. 아무리 어렵고 힘든 삶이라도 한 순간의 경이로움을 경험한 사람은 쉽게 좌절하지 않지요. 꿈이 있으면 고난도 작게 보이는 법이니까요.
언젠가 새내기 교사들과 만남의 자리에서 '아이들의 아름다움은 교사의 눈 속에 있다'는 말을 한 적이 있습니다. '아름다움은 바라보는 이의 눈 속에 있다'는 유명한 영어 표현을 각색해서 전해준 것이지요. 아이들이 하얀 종이 위에 봄과 꿈과 자신만의 이야기를 그리고 있는 모습을 지켜보면서 저는 문득 인간의 가장 아름다운 모습은 사색하는 모습이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해보았습니다.
그런 점에서 인간은 점점 아름다움을 잃어가고 있다는 서글픈 역설에 허를 찔리기도 했지만 말입니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저는 아이들이 쓴 글을 몰래 훔쳐 읽다가 그만 웃음 사래에 걸리고 말았습니다.
'나의 꿈은 요리사가 되는 것이었습니다. 만화를 보고 말이죠. 그렇지만 만화가 끝나자 내 꿈도 끝이 나고 말았어요.'
'어이! 박○○~ 요즘 너무 즐거워 보이네. 요것이 춤바람 났어잉~그래, 그렇게 꿈을 위해 달리는 거야. 누가 뭐래도 상관없어. 너의 길이야. 네가 가야하는 길이야. 넌 할 수 있어. 너 춤 좋아하지? 꿈이 뭐야? 가수잖아. 넌 부모님한테 포기한다는 말 자주 듣지? 이번엔 털고 일어나야지. 너 가수 비 알지? 그 가수는 주위 사람들이 비웃어도 꿈을 생각하며 웃으면서 연습했대. 너도 충분히 할 수 있어.'
'안녕~ 요즘 어떠니? 너랑 난 한 몸인데 왜 따로 노는 것 같니? … 밉구나. 고등학교까지 올라오는데 정말 많은 일이 있었지? 재미있는 일도 너무 많았고 슬픈 일도 많았지. 가끔 초등학교 때로 다시 돌아가서 처음부터 다시 시작하고 싶단 생각도 해. 근데 돌아가기엔… 방법이 없다. 너랑 나랑 지금부터 열심히 하자.'
'요즘 네가 엄마한테 자주 짜증을 내는 것 같애. 짜증을 내고 나서도 맘 편하지 않으면서 왜 그렇게 짜증을 내는 거니? 요즘 참으려고 하는 모습도 보이곤 하지만 그래도 조금은 더 자제하는 게 좋을 것 같아. 요즘 공부는 잘 되가니? 중학교 졸업하면서 고등학교 입학하면서 내 자신에게 공부 열심히 하고 자격증도 따고 했었잖아. 그렇게 말해놓고 엄마랑 약속해놓고 왜 말 안 듣고 공부도 안 하고 그래도 되는 거야? 세상에서 제일 고마운 분인데 엄마랑 약속을 그렇게 쉽게 어겨도 되는 거야?'
수업이 끝나 교무실로 돌아오자 급히 처리해야할 업무들이 저를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일과가 다 끝난 뒤에야 아이들이 써놓은 글을 만날 수 있었습니다. 글을 읽다가 입가에 미소를 머금기도 하고, 한 순간 옷깃을 여미듯 숙연한 마음이 찾아오기도 했습니다. 다음은 제가 무슨 얘기를 할 때마다 요새 아이들 같지 않게 꿈을 꾸듯 저를 바라보곤 하는 한 아이가 쓴 글입니다.
'나의 꿈 이야기
저는 4월 달에 저의 비전이 사라졌습니다. 중학교 때부터 제 꿈은 유치원 선생님이 되는 것이었지만 지금은 그 꿈을 키워갈 자신도 없고, 불길한 예감과 어떤 사정으로 인해 제 꿈은 싹 틔우자마자 죽어버렸답니다. 다른 꿈을 꿔봐야겠지만 지금은 아무 생각도 어떤 직업이 좋은지도 모르겠고 비전은 열심히 다시 한 번 생각하고 생각나면 말씀드릴게요.
파릇한 봄
세상의 봄이 왔다
아름다운 꽃들과 귀여운 제비들
제비는 집을 짓고 꽃을 활짝 피어
세상에 봄이 왔다고 온 세상에 알려준다.
새 봄이 오면 새 학기가 시작되고
새 학기가 시작되면 파릇한 새싹들이
세상의 빛이 되어 세상을 이끌어 나간다.
파릇한 봄처럼 우리에게는 세상의 꿈
세상의 희망이 되어간다.
선생님, 안녕하세요?
저는 시를 쓰는 것을 좋아하지만 제가 보았을 때 무언가가 부족한 것 같아요. 선생님이 이 시를 읽고 어떤 느낌이 드는지 궁금하네요. 뭔가 많이 부족하지만 선생님도 시를 쓰시는 걸 좋아하시는 것 같아서 선생님이 좋아요. 제가 뭐가 부족한 게 있으면 지적해주셨으면 좋겠어요. 시는 못 썼지만 재미있게 보셨으면 좋겠어요. 선생님 즐겁고 행복한 하루 되세요.'
저는 아이가 쓴 글 중에서 '무언가 부족한 것 같아요'라는 대목에 자꾸만 눈길이 갔습니다. 부족하다는 것, 부족함을 느낀다는 것. 어쩌면 그것이 바로 인간의 참 모습이요, 인간의 정체성이 아닐까 하는 생각도 해보았습니다. 이제 그 아이를 사랑할 이유가 생겼습니다. 아이가 간절히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알았기 때문이지요. 그 부족한 부분을 사랑으로 채워주는 것이 교사로서 제가 할 일이니까 말입니다. 물론 저도 한 없이 부족한 사람이지만 말입니다.
봄 수업은 무엇보다도 아이들과 저 사이에 소통의 다리를 하나 놓는다는 그런 점에서 저에게도 참으로 소중한 시간입니다. 제가 가르치는 영어와는 직접적인 상관이 없는 시간이어서 조금은 망설여질 때도 있지만 그런 소신이 있기에 해마다 두 세 차례 그런 계절수업을 하는 것이지요. 다음은 안마사가 되는 것이 꿈이라고 하여 저를 조금 당황하게 한 적이 있는 한 아이가 쓴 글입니다.
나의 꿈?
어렸을 때 제일 많이 들었던 말 중 하나. "넌 꿈이 뭐니?" 혹은 "너 커서 뭐가 되고 싶어?"
난 어렸을 때부터 안마를 잘했던 것 같다. 손에 힘이 쌔서 친척들이 맨 날 주물러 주라하면서 용돈을 주시곤 하셨다. 그래서 난 스포츠 안마사가 되고 싶고 엄마도 그걸 원하시는 것 같다. 꿈을 이뤄 부모님 행복하게 해드리는 것도 내 꿈 중 하나다.
To 나에게
안녕 세움아! ㅋㅋ 하하. 영어시간에 이런 걸로 만나다니 반갑구나! 나의 안부 묻기라? 어색하긴 해도 좋은 경험일 것 같구나. 위 안 좋은 건 괜찮지? 요새 속 쓰린 게 적은 걸 보니깐 괜찮은 것 같다. 학교생활은 어때? 그냥 그저 그래? 재밌는 것 같기도 하고 때론 지루하기도 하고! 선생님께 더 이쁨 받기 위해 열심히 해야 되지 않겠니? 열심히 하고 엄마아빠 속상하게 하지 말고 친구들이랑 싸우지 말고 항상 충실하고 아프지 않았으면 좋겠다. 파이팅!
준철 오빠에게!
우리 영어 쌤, 안녕하세요? 부끄러워요. 선생님, 기억하세요. 책 받은 날 몇 반이냐면서 무슨 과냐고 제게 물어보셨잖아요. 대개 좋아 보이셨는데 결국 만나다니, 우린 인연인가 봐요. 며칠 전에 수업 시간에 핸드폰 만져서 혼난 적이 있었는데 이젠 수업도 열심히 듣고 노트 정리도 열심히 할게요. 지켜봐주세요~
몇 주 전에 전학 온 '이슬'이라는 예쁜 이름을 가진 아이가 써 놓은 글을 읽어보니 학교에 잘 적응하고 있는 듯했는데, 그 아이의 글 속에서 작게 웃고 있는 한 남자의 모습을 발견할 수 있었습니다. 그 아이가 선생님이라는 호칭으로 부르는 사람, 바로 저였지요. 다른 몇 아이들도 제가 늘 짓고 다니는 헤픈 웃음에 대해서 고마워하고 있는 것을 알 수 있었습니다. 더 열심히 미소를 날려주어야지 하고 마음을 먹게 되었지요.
'선생님 안녕하세요? 저 슬이에요. 사실 오늘 기분이 매우 안 좋았어요. 아무 일도 없었는데 괜히 이것저것에 짜증이 나는 날이에요. 그래도 선생님이 저번에 말하신 것처럼 기분이 안 좋아도 선생님께서 스마일~하고 웃었어요. 잘했죠? 히~ 앞으로도 잘 웃고 다닐게요.'
'선생님 안녕하세요? 음… 처음 시간인가? 그때 저와 소리가 핸드폰으로 문자를 쓰다 걸렸는데 선생님은 저희와의 약속을 지켜주셨어요. 친절한 교사가 되겠다는 선생님의 약속. 정말 멋있는 약속입니다. 선생님은 졸 수 없는 수업을 하시는 것 같아 너무 즐거워요. 특히 팝송 시간이 제일 즐겁고 재미있어요.'
'선생님께서 출석 부르고 우리와 눈 마주칠 때 선생님은 기분 안 좋으셔도 우리와 수업하실 때 기분 나쁘신 티 안내신다고 그러셨잖아요. 그래서 저도 저번에 기분이 정말 안 좋았는데 선생님께서도 우리와 수업하실 때 기분 좋게 해주시니까, 저도 기분 풀려고 했는데요, 역시 잘 안 됐어요. 선생님은 정말 대단하신 것 같아요. 그리고 제가 음악 듣는 거 정말 좋아하는데 선생님께서 팝송을 가르쳐 주시고, 정말 좋아요. 딴 과목은 시계 자주 쳐다보는데, 영어시간은 딱 한 번 보면, 곧 끝나가는 시간이에요.'
'선생님, 저는 공부를 좋아하지 않아요. 공부도 못하고요. 정말 영어는 자신이 없어요. 읽을 줄은 아는데 쓰고 해석은 못해요. 해보려고 해도 쉽게 안돼요. 하지만 최선을 다할 거예요. 저희 할머니께서 노력한 자에게 복이 온다고 했어요. 저는 그 말을 가슴 깊이 담고 있어요. 제가 잘은 못하지만 지켜봐 주세요. 그리고 잘 부탁드려요.'
이 외에도 소개하고 싶은 글이 많지만 다음 기회로 미루어야할 것 같습니다. 아니, 아이들이 쓴 글 한 편 한 편을 제 가슴 속에 저장해둘 수밖에 없겠네요. 가끔 저도 모르게 본색이 드러나 아이들을 소중히 여기지 않게 될 때 죽비처럼 매섭게 저를 혼내고 일깨워줄 소중한 마음 속 스승으로 모실 생각입니다. 그래도 딱 한 편만 더 소개할게요.
Hello Teacher~ 선생님, 안녕하세요? 이런 시간 내주셔서 감사해요. 이런 시간을 통해서 제 자신을 돌아볼 수 있었어요. 철없던 중학교 때 왜 그때는 꿈이 없었는지… 그 때로 다시 돌아간다면 꿈을 가지고 그 꿈을 향해 달려갔을 텐데. 그래도 후회하지 않아요. 지금 이 시간을 통해 내 미래에 대해 깊은 생각을 가지고 꿈을 찾았으니까요. 선생님 고맙습니다. 그 꿈을 위해 열심히 달려가는 선생님의 사랑스런 제자가 될게요. 응원 부탁드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