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게마다 가득하게 진열되어 있는 상품들은 이 나라가 이슬람사회주의 국가라는 사실을 잠시 잊게 해준다. 상당히 야한 여성속옷가게들도 보이고 멋스러운 서양식 여성복들도 즐비하다. 지나가는 여성들의 옷차림을 비교해보면 저 가게의 옷들은 과연 누가 사 입는 옷일까 궁금해진다. 이곳 여성들은 거의 하나같이 이슬람 특유의 옷차림에 대부분 차도르를 착용하고 있기 때문이다.
13%의 기독교도들이 살고 있다고는 해도 거의 이슬람 일색인 이 나라가 사회적으로는 상당히 개방적이어서 다른 이슬람 국가들과는 다른 것이 특색이었다.
이 도시에서뿐만 아니라 이슬람권 전체에서도 아주 큰 시장에 속한다는 이 하미디야 시장은 그 규모가 상당하다. 높직한 천정을 빛이 들어오도록 덮은 구조며 일직선으로 넓게 열려 있는 중앙 통로가 상당히 현대화된 시장이었다.
단속의 눈길을 피해 통로에 벌여놓은 좌판에는 과자와 장난감이 아이들의 호기심을 자극하고 있다. 우리나라의 여느 시장과 비슷한 풍경이다. 시리아의 전통 민속품에서부터 의류와 식료품 등 일상용품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상품들이 잘 진열된 시장은 이 도시를 찾는 관광객들에게 볼거리를 제공하고 호기심을 충족시켜주고 있었다.
긴 터널처럼 생긴 중앙통로를 벗어나자 많은 차량들로 혼잡하고 소란한 시가지가 나타난다. 다마스커스는 이 하마디야 시장을 중심으로 안쪽이 우마야드 모스크와 직가의 거리가 있는 옛 시가지이고, 이 복잡한 거리에서부터 현대화된 신시가지가 펼쳐지는 것이다.
신시가지도 한 마디로 복잡하기 짝이 없다. 도로에는 차선도 그려져 있지 않고 신호등도 거의 보이지 않는다. 그렇게 질서가 없는 도로에 수많은 차량에다 빵빵거리는 경적소리까지 뒤엉켜 정신이 없다. 보행자들은 또 그렇게 복잡한 차량들 사이를 비집고 길을 건너가는 것이 여간 위험한 모습이 아니다.
그래도 길 건너 도로 쪽으로 툭 튀어나온 베란다형 찻집에 앉아 여유롭게 차를 마시고 있는 사람들의 풍경이 매우 대조적이고 인상적인 모습으로 다가온다. 사람들의 삶이 어디 질서정연하고 깔끔함 속에서만 존재할 수 있는 것이던가. 고대와 현대가 공존하고 있는 이 도시 사람들은 그들 나름대로의 문화와 질서 속에서 그들만의 독특한 삶을 살고 있으리라.
그런 거리를 바라보며 오른쪽으로 잠시 걷자 성벽 밑 보도 위에 호기롭게 말을 탄 사람의 동상이 나타난다.
"이 동상이 바로 중동의 영웅 살라딘 장군의 동상입니다."
그 모습이 예사롭지 않아 가이드를 쳐다보니 동상의 주인공이 살라딘 장군이라고 소개를 한다.
"저 사람이 그 유명한 살라딘 장군이야?"
중동에서 영웅으로 통하는 살라딘 유스프 이븐 아이유브(살라딘, 1137~1193)는 중세이슬람제국의 수호자로 추앙받는 영웅이다. 그는 서기 1137년에 티크리트라는 도시에서 태어났다. 그러나 초년에 그의 삼촌이 지배자의 미움을 사는 사고를 저지르는 바람에 아버지와 삼촌, 그리고 갓 태어난 살라딘은 다른 곳으로 추방을 당한다.
추방된 살라딘의 가족들은 한 때 그들이 도와주었던 다마스커스의 새 지배자인 누르앗 딘의 휘하로 들어간다. 그러나 누르앗 딘도 이들을 달갑지 않게 여겨 이들을 멀리하기 위하여 이집트 정벌이라는 임무를 주어 멀리 내친다. 이집트 정벌의 임무를 맡은 살라딘의 삼촌은 이집트를 정복하지만 현지에서 병사하고 그 지위를 약관의 20대인 살라딘이 이어받게 된다.
이집트를 다스리던 살라딘은 자신들을 견제하던 누르앗 딘이 사망하자 그 뒤를 이어 왕이 된 누르앗 딘의 어린 후계자를 폐위시키고 스스로 왕이 되어 이집트와 시리아 지역을 통치하는 지배자가 된다.
그러나 이 도시가 번영을 누렸던 우마이야 왕조 시대부터 또 하나의 거대한 세력으로 성장한 투르크계가 이웃 예루살렘을 점령한 이래 이 지역은 기독교제국들과의 끊임없는 세력다툼이 계속되고 있었다.
로마를 중심으로 한 서방세계의 첫 번째 십자군은 교황 우르반 2세에 의해 1095년에 시작되었다. 교황이 주장한 십자군 1차 원정은 다음해인 1096년에 실패로 끝났다. 그러나 마침내 1098년 십자군 원정대는 예루살렘을 점령한다. 십자군은 보급문제로 고생했지만 투르크 군대를 무찌르고 1098년 난공불락의 요새인 안티오크를 점령하고 시리아를 대부분 차지한 것이다.
원정군에게 패배하여 시리아와 예루살렘을 빼앗긴 이슬람세력은 그 후 다시 세력을 만회하여 기독교도들로부터 예루살렘을 빼앗는다. 성지 예루살렘을 잃은 서방 기독교제국은 경악했다. 다시 서기 1145년에 두 번째 십자군편성을 선언한다. 이때의 십자군은 주로 동방으로 향했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포르투갈과 스페인 그리고 발트해 쪽에서도 진행했다.
그러나 동방으로 진군한 이 십자군은 바로 이 다마스커스 밖에서 패배했다. 다마스커스를 다스리고 있던 살라딘 장군의 군대에 패한 것이다. 서기 1187년 살라딘은 예루살렘을 점령했고, 기독교제국은 세 번째 십자군을 편성하여 원정을 시작하게 된다.
사자왕으로 유명한 영국의 리처드 왕을 포함한 3개의 강력한 십자군 원정이 시작된 것이다. 그러나 독일의 바바로사는 원정 중에 죽었고, 프랑스의 필립은 리처드와의 갈등으로 본국으로 되돌아가 결국 2개의 원정군은 도중에서 사라지고 리처드의 군대와 살라딘의 군대가 맞붙는다. 이 전쟁에서 양측은 치열한 전투 끝에 서로에게 명분을 주는 선에서 전쟁을 종식한다.
사자왕 리처드와 살라딘의 전면전은 아르스프에서 벌어졌다. 아르스프 전투는 3차례 십자군 전투 중에서 가장 치열했다. 이 전투는 결국 리처드의 십자군이 승리했지만 리처드는 열병에 걸리고 말았다. 그때 살라딘은 리처드에게 얼음과 과일을 보내주었다고 한다. 그렇잖아도 본국 문제로 힘들어하던 리처드는 살라딘과 협정을 맺고 유럽으로 돌아갔다.
이 3차 원정에서 사자왕 리처드의 십자군은 예루살렘을 차지하지는 못했지만 살라딘과 리처드 사이의 조약으로 기독교도들은 팔레스타인 해안 부분을 지배하고 성지 예루살렘을 순례할 수 있게 됐다.
살라딘은 기독교제국의 끝없이 이어지는 십자군 원정을 군사력과 함께 외교적인 노력으로 해결하여 이슬람의 패망과 손실을 막은 것이다. 전쟁의 승리로 인한 패권이 아니라 상대방에게도 명분을 주어 상생하는 관계를 맺어 전화를 막는 지혜를 발휘한 것이다.
살라딘의 이런 전략은 당시로서는 그 누구도 생각하지 못했고 시도해보지도 않은 아주 특별한 전략이라고 할 수 있었다. 당시의 이 도시 다마스커스의 지배자로서 지금까지도 이슬람 중동의 영웅으로 추앙받는 이유도 여기에 있는 것이다.
십자군의 3차 원정이 끝나고 리처드가 돌아갔을 때 살라딘은 이미 55세의 노인이 되어 있었다. 서기 1193년 살라딘 장군은 57세의 나이로 다마스커스에서 세상을 떠났다. 영국에서 이 소식을 들은 사자왕 리처드는 무척 아쉬워했다고 전한다.
"그럼, 살라딘은 시리아의 이순신 같은 사람이네요."
"그런 셈이지요. 아니 어쩌면 그 이상이라고 할 수 있지요, 저 살라딘의 유적과 전설은 이 나라뿐만 아니라 아라비아 해안에도 산재해 있습니다."
그를 기리는 중동 사람들의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높다란 성벽 아래 세워져 있는 살라딘의 동상은 지금도 당당한 모습이었다.
"살라딘 장군은 시리아의 자랑스러운 영웅이랍니다."
가이드를 시켜 마침 지나가는 시민 한 사람에게 동상을 가리키며 물어보자 그 시민이 한 말이라고 한다. 다마스커스의 시민들도 역사 속의 인물을 잘 알고 있는 것 같았다.
길거리는 여전히 복잡하고 시끄러웠다. 너무 낡아 운행이 될 것 같지 않아 보이는 택시에서는 귀엽게 생긴 어린이를 포함한 일가족 세 명이 행복한 표정으로 내린다. 성벽 아래의 보도 한 곳에서는 과일과 채소로 직접 주스를 만들어 파는 포장마차가 성업 중이었다.
우리 일행의 시리아 관광은 다마스커스로 한정하고 있었다. 역사 깊은 고도 다마스커스를 관광하는 동안 어느새 해가 많이 기울어져 있었다. 다시 요르단의 암만으로 돌아가 하룻밤을 더 묵고 다음 일정을 서둘러야 하는 것이다. 우리는 아쉬운 마음을 접고 다시 요르단으로 향했다.
덧붙이는 글 | 이 기사는 유포터뉴스에도 실렸습니다. 오마이뉴스는 직접 작성한 글에 한해 중복 게재를 허용하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