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14일로 '2·13 합의'의 초기단계조치 이행 시한이 지나면서 한국과 미국에서 후폭풍이 일고 있다.
'2·13 합의' 이행과 상관없이 쌀 40만t을 북한에 지원하기로 했던 한국 정부의 애초 방침에 변화가 있는 것으로 알려졌으며, 미국의 조지 부시 행정부는 강경파들의 공세에 시달리게 될 것이라는 관측도 나오고 있다.
쌀 제공 문제를 논의하게될 경추위(18~21일 평양 개최) 일정과 관련 통일부 당국자는 "지금 상황에서 경추위에 간다고 확정적으로 얘기는 안하겠다, 내일까지 상황을 보겠다"고 밝혔다.
이는 근본적으로 방코델타아시아(BDA) 은행에 동결되었던 자금이 풀렸으나 북한이 지금까지 아무런 행동도 하지 않고 있는 것에서 비롯되고 있다.
[북한] 행동하겠다더니, 감감 무소식... 왜?
미 재무부는 지난 10일 2500만 달러의 북한 자금을 마음대로 인출할 수 있도록 하면서 이전에 내걸었던 인도적 분야에 사용해야 한다는 조건도 철회했다.
이에 대해 북한은 13일 외무성 대변인 담화를 통해 "실효성 여부를 확인한 뒤 제재 해제가 현실로 증명됐을 때 행동하겠다"고 밝혔다. 그러나 북한은 아직 국제원자력기구(IAEA) 사찰단 초청과 같은 조치를 취하지 않고 있다.
이와 관련 북한이 BDA 자금의 일부를 제3국 은행으로 송금해 대외 결제 문제가 풀렸는지를 확인해보려는 것 아닌가 하는 관측이 나오고 있다. 이를 확인하는 데는 며칠의 시간이 걸릴 것이다. 물론 다른 은행들이 이 자금을 송금받으려 할지는 현재로서 확인할 수 없다.
지난 11일 평양 방문 뒤 서울에서 열린 빌 리처드슨 뉴멕시코 주지사의 기자회견장에 동석했던 앤서니 프린시피 전 미국 보훈처 장관은 "BDA 북한 자금은 오늘로써 언제든지 인출할 수 있다, 이제 완전히 북한의 재산이 되었다, 미국은 할 수 있는 것은 다했다"면서 "그 이후는 미국 정부가 책임질 아무 것도 없다"고 밝혔다.
북한이 더 근본적인 요구를 내걸고 있는 것 아니냐는 관측도 있다. 자금 동결이 풀렸지만 다른 은행들이 북한과의 거래를 꺼리고 있다. 북한이 미국에게 완벽하게 국제금융 시스템에서 활동할 수 있게 만들어달라고 요구하고 있다는 것이다.
백학순 세종연구소 남북관계연구실장은 추측임을 전제로 "북한은 BDA 자금 해제라는 상황과 현재 20개 정도의 은행이 북한과의 거래를 꺼리고 있는 상황 사이에서 고민하고 있는 것 같다"며 "BDA 자금 동결을 그대로 받아들일지, 아니면 국제금융 시스템 완전 편입 요구 사이에서 어떻게 해야할지 지도부에서 고민하고 있는 것 같다"고 말했다.
[한국] 쌀 40만t·중유 5만t, 지원 방침 '오락가락'
이 와중에 한국 정부의 처지는 곤혹스럽게 되었다. 남북한은 3월 초 20차 장관급회담에서 합의된 대로 오는 18일부터 21일까지 경추위를 열기로 했다. 이 자리에서는 북한이 요구했던 쌀 40만t의 제공 여부를 최종 결정한다.
신언상 통일부 차관은 지난 5일 동결되었던 북한 자금의 이체 문제로 2·13 합의가 늦어지는 것과 상관없이 정부는 북한에 쌀 40만t을 지원할 방침이라고 밝힌 바 있다.
신 차관은 "북핵문제 해결은 때에 따라 6자회담이 앞설 수 있고 남북관계가 앞설 수 있다"며 "한반도 상황은 안정적으로 관리되어야 하고, 무엇보다 대북 쌀 제공은 인도적 차원의 문제다, 합당한 절차를 거쳐 쌀 40만t을 지원할 것"이라고 밝혔다.
그러나 15일 통일부·외교부·국정원 등 관계장관회의가 열린 뒤 쌀 제공 시기를 늦추기로 했다는 일부 언론보도가 나왔다.
이와 관련 통일부 당국자는 "현재 여러가지 사항을 검토 중"이라고 말했다. 이는 지난주 2·13 합의의 이행과 상관없이 쌀 제공을 하기로 했던 방침과는 분위기가 다른 것이다.
"쌀 제공은 인도적 차원"→"여러가지 검토 중"
'2·13 합의'에 따라 북한이 초기단계 이행조치를 60일 이내에 이행할 경우 한국은 중유 5만t(200억원 상당)을 부담하기로 했다. 정부는 지난 달 초 GS칼텍스와 중유공급 계약을 맺고, 중유를 실어 나를 배에 대한 용선 계약도 체결했다.
이에 따라 배 세 척이 지난달 25일부터 여천항에 정박하고 있는데 용선료와 중유 보관료, 체선료(화물을 제때 선적하지 못해 생기는 비용) 등으로 지금까지 약 36억원 정도의 손실이 발생한 것으로 알려졌다. 정부에서는 이 용선 계약도 해지하는 방안을 검토 중인 것으로 전해졌다.
그러나 GS칼텍스 관계자는 16일 <오마이뉴스>와의 전화통화에서 "아직 정부로부터 구체적으로 통보받은 바는 없다"고 밝혔다. 통일부 당국자는 "용선 계약 해지나 연장 등의 문제는 아직 확정된 것 없다"며 "며칠간 더 두고 보겠다"고 말했다.
물론 중유 5만t 제공의 최종 결정권자는 한국 정부가 아니다. 6자회담에서 총 100만t가운데 한국 정부가 5만t을 먼저 부담하기로 한 것이니만큼 6자회담 전체회의에서 결정될 문제다.
[미국] "조금만 더 시간을"... 마감 시한은 연장했지만
지난 14일(현지시각) 숀 매코맥 미 국무부 대변인은 성명을 내고 "미국의 인내심이 무한한 것이 아니다"면서 "북한에게 며칠 더 시간을 주려고 한다"고 말했다. 애초 약속했던 2·13합의 60일 시한을 최소한 이번 주까지 연장하기로 한 것이다.
지난 주 평양을 방문했던 빌 리처드슨 뉴멕시코 주지사는 15일 미 ABC 방송과의 인터뷰에서 "내 예상으로는 북한은 IAEA 사찰단을 초청할 것"이라며 "북한은 원자로 폐쇄 과정을 시작할 것"이라고 주장했다.
그러나 미국 언론들의 반응은 다양하다. <뉴욕타임스>는 15일(현지시각) "2·13 합의 이행 시한이 지나고 북한의 무반응으로 인해 부시 행정부는 자기 당 내부의 강경파들의 공격에 취약하게 되었다"면서 "강경파들은 2500만달러의 자금 대부분이 미사일 불법 거래와 위조지폐 유통으로 얻어진 것으로 믿고있다"고 전했다.
이 신문은 "일부 부시 행정부 관리들은 마감시한을 강제할 마땅한 수단이 거의 없다는 것을 인정하고 있다"며 "BDA 자금이 북한에 반환되면 이제 더 이상 외교적 지렛대는 없다"고 전했다. 이 신문은 이어 "이는 부시 행정부로 하여금 더욱더 북한의 맹방인 중국이 북한에 가하는 압력에 의존하게 만들 것"이라고 덧붙였다.
이 신문 기사에 등장한 니콜라스 에버슈타트 미 기업연구소(AEI) 연구원은 "BDA 자금을 돌려주는 것은 대량살상무기 확산방지구상(PSI)의 원칙을 복잡하게 만들었고 유엔 안보리의 대북 제재 결의와도 충돌한다"며 "이제 북한은 부시 행정부가 계속 자신의 정책을 굴욕적으로 뒤집도록 만들 수 있게 됐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워싱턴포스트>는 15일(현지시각)"미국 관리들은 이행 시한이 지난 것을 애석해하고 있으나 이것을 2·13 합의가 궤도를 이탈한 것으로 간주하지는 않는다"고 보도했다.
이 신문은 "지난 11일 마카오 금융당국이 북한 자금의 자유로운 인출을 발표한 것은 북한이 나머지 3일간 영변원자로 폐쇄 조치를 취하도록 한 것"이라며 "미 관리들은 이것이 비현실적이라는 것을 인정하면서도 북한이 최소한 IAEA 사찰단 초청과 같은 긍정적 제스처를 취해주길 기대했다"고 전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