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렇게 해서 우파와 좌파가 항상 대립되었던 인간의 선천성과 후천성에 대한 논쟁이 다시 제기되었다.
사실 전통적으로 우파는 개인의 행동과 지적향상은 태어날 때부터 갖고 나온다는 선천성론을 지지하고 있는데, 이에 의하면 개인은 처음부터 과격하고 어리석게 태어나든가 아니면 반대로 머리좋고 온화한 성격을 타고난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생후의 환경이 개인에게 미치는 영향은 아주 적다는 견해를 보여왔다. 이런 식의 관점에서 본다면 우파가 주장하는 엘리트에 의한 사회 지배가 정당해진다. 그러므로 자연이 부여한 사회질서나 계급을 변형시킬 필요가 없다는 것이다.
좌파는 반대로 개인이 처한 사회환경과 교육이 인간형성에 가장 중요한 역할을 한다는 견해를 지니고 있어서 인간은 자기가 처한 주변 환경에 의해 형성되어진다고 보아왔다. 그러므로 교육받은 사람은 자기의 운명을 다스릴 줄 알고 자기의 미래를 개척할 수 있다는 입장을 전통적으로 취해왔다.
니콜라 사르코지의 유전인자 발언은 좌우파의 이런 전통적인 대립에서 나온 것인데, 그가 내무부장관 시절에 행한 그토록 강조하며 실행했던 치안정치도 바로 여기에서 기인하고 있다.
그렇다면 개인이 이렇게 유전자의 노예가 된다는 이론에 찬성하는 권력이 태어날 때부터 위험한 인간으로 정해지는 상당수의 시민 앞에서 취할 해결방법은 무엇일까? 처벌 이외에 다른 방법이 없을 것이다.
얼마 전에 프랑스에서 청소년범죄를 막기 위한 방법으로 만 3세부터 청소년범죄자가 될 가능성이 있는 요인을 식별하여야 한다는 법이 제안된 것만 보아도 알 수 있다. 다행히 이 법은 많은 이들의 반대로 통과되지 못했다.
이런 선천성 인간을 옹호하는 논리는 최근에 미국에서 집권당인 신보수파 영향으로 상당히 발달하고 있는데 시라크 현 대통령과는 반대로 미국우호주의 성향을 보이고 있는 사르코지가 이 정책에 민감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과학계·종교계 한 목소리 "불행한 유전인자는 없다"
사르코지의 유전자 발언으로 과학계나 정계, 종교계가 들고 나섰다. "이것은 완전히 이데올로기적인 어리석은 발언으로 과학의 최근 학식에 대해, 특히 유전학에 대해 아무것도 모르는 소리"라고 파리 넥케병원의 아동정신병 의사인 베르나르 골즈가 4월 10일자 '누벨 옵' 사이트에서 밝혔다.
유전학자인 악셀 칸은 같은 사이트에서 "불행한 인생의 유전인자는 존재하지 않는다"며 니콜라 사르코지가 "자신의 책임감을 미리 회피하려는 것"에 불과하지 않는다며 사르코지를 비난했다.
산모보호 의사 국가조합 회장인 크리스틴 벨라스-카반도 사르코지의 선천성설은 "지극히 위험한 논리"라고 흥분을 감추지 못했는데 벨라스-카반은 작년에 글로즈 박사와 같이 전직 내무부장관이었던 사르코지가 제안한 만 3세부터 청소년 범죄자가 될 가능성이 있는 요인을 식별하여야 한다는 제안에 반기를 들고 청원서를 작성한 인물이기도 하다.
당연히 좌파에서도 가만히 있지 않았다. 국회의 사회당 의원 회장인 장-막 에로는 "만약 차후에 사회적인 항의가 일어날 시 사르코지는 그것을 유전자 선천성에 의한 것으로 생각할 것"이라며 사르코지를 비웃었다. 그에 의하면, "무서운 우파와 극우파가 점점 더 가까워지고 있다"는 것이다.
공산당의 마리-조르주 뷔페도 다음과 같이 한마디 거들었다. "무슨 이런 무서운 발언이 있단 말인가? 어떻게 파시즘과 인종주의의 기본 이데올로기였던 이런 이론을 지지하고 나올 수 있단 말인가? 과학자들이 이미 오래전부터 일축해 버린 낡은 이론을 갖고 말이다. 이건 도저히 용납할 수 없는 일이다."
지지율 3위를 달리고 있는 중도파 프랑스민주연합(UDF) 바이루 후보는 사르코지의 발언을 "무서운 논리"라고 한마디로 일축했다.
후보들의 발언은 좌충우돌
극우파 장-마리 르 펜의 발언은 더 재미있다. "만약 우리가 범죄유전자을 타고 태어난다면 우리가 하는 행동에 아무런 책임이 없다는 것을 뜻한다." 극우파의 르 펜이 우파의 사르코지보다 적어도 이 건에 대해서는 좀 더 좌파적인 발언을 한 셈이다. 그러나 르 펜이 이런 발언을 한 것은 아마도 좌파에 식상해 하고 있는 일부 유권자들을 염두에 두고 한 말인 듯하다.
프랑스 대선 1차 투표를 1주일도 채 남기지 않고 있는 시점에서 이번처럼 좌우 후보들의 사상혼란이 심하게 일어난 적도 드물었다. 극우파 후보가 우파 후보보다 좌파적인 발언을 하는가 하면, 좌파 후보가 우파적 발언을 하는 일이 다반사여서 유권자들의 혼란을 야기시키고 있는 실정이다.
예를 들어 사회당의 후보 세골렌 루아얄은 얼마 전에 '이제 프랑스도 다른 나라들처럼 국경일에 각 집에 프랑스 국기를 내걸어야 한다'는 우파적인 발언을 해서 물의를 빚었다.
혁명적공산주의 동맹의 올리비에 브장스노가 적절히 지적했듯이 현재 프랑스 국민들의 주요 관심인 실업문제, 구매력 향상, 퇴직문제 등을 제쳐놓고 어느 프랑스인들도 관심을 갖지 않는 국기배양 문제를 끌고 나온 것은 좌파 입장에서 부끄러운 일이라는 것이다.
이렇게 좌우 이데올로기가 이리저리 마구잡이로 충돌하고 있는 상황에서, 여론조사에서는 현재 대략 35%의 유권자들이 아직도 누구를 선택할지 결정하지 못한 것으로 나타나고 있다. 그러나 한 가지 확실한 것은 이번 대선처럼 프랑스 유권자들의 관심을 높게 불러일으킨 선거도 드물 것이라는 것이다.
각자 유권자의 색깔에 따라 누군가가 꼭 대통령이 되어야 한다든가 아니면 누구는 절대로 되지 말아야 한다든가 하는 의견이 너무 뚜렷해 이번 대선에는 많은 수의 유권자들이 투표에 참여할 것으로 보여진다.
언론은 이미 180만명의 새로운 유권자들이 등록을 마쳤다고 보도하고 있다. 또한 1차 투표일인 4월 22일이 프랑스 일부 지역에서는 부활절 방학과 겹치기도 해서 휴가를 떠난 꽤 많은 사람들이 투표를 못하는 경우도 발생할 것으로 보이는데 이들 중 상당수가 이전 대선과는 달리 대리투표 신청을 하고 있다. 한 표가 이번처럼 중요하게 여겨진 적도 없는 특이한 프랑스 대선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