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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마이뉴스의 모토는 '모든 시민은 기자다'입니다. 시민 개인의 일상을 소재로 한 '사는 이야기'도 뉴스로 싣고 있습니다. 당신의 살아가는 이야기가 오마이뉴스에 오면 뉴스가 됩니다. 당신의 이야기를 들려주세요.】

▲ 가스나야! 버들가지 새순 색깔 같은 립스틱은 어떻노?
ⓒ 정학윤
"내다."
"요즘 내가 전화를 안받는데 니 전화라서 받았다."

"몸은 좀 어떠냐? 병원에 가봤나?"
"아이구 야 야 나는 왜 뜻대로 살아지지 않겠노?"(훌쩍훌쩍...)

"무신 말이고?"
"종양이 폐와 폐 사이에 있는 무슨 막인가로 전이되었단다. 목 아래에도 있고..."

"뭐 걱정하노. 수술하마 되는 거 아이가? 언능 수술해라."
"그 지점을 열고 수술하기에는 애매하대. 부작용이 생길 수도 있고 어려운 수술이란다."

"서울에 가봐라."
"벌써 갔다 왔지. 대구의 의사들은 고개를 절래절래 흔들어싸서..."

"그래서?"
"야 야 어릴 적에 운이 없어서 고생하면, 나이 들어서도 계속 그런갑다."(훌쩍훌쩍...)

"......"
"어려운 부위 수술이라서 잘못되면, 부작용으로 말을 못할 수도 있단다."

"그래도 해야지."
"그렇게 빨리 번지는 것도 아니고, 경과를 두고 봐도 된다는데..."

"무슨 소리 하노? 언능 해야지."
"나중에 수술하게 되면, 말을 못하게 될 확률이 높다더라."

"식이요법이라도 해봐라. 저번에 텔레비전을 봤더니 말기 폐암환자가 브로콜리즙하고 케일즙을 정기적으로 먹고 종양이 사라졌다 하던데, 그런 거라도 해봐라."
"야 야 나는 왜 뜻대로 살아지지 않겠노?"(훌쩍훌쩍)

"쓸데없는 소리하지 마라."
"그런 거 해먹을려고 해도, 살림 사는 여자가 자기 몸에 좋다고 혼자만 챙겨 먹는 것이 그렇다. 누가 해 주면 몰라도..."

"어이구 무슨 지랄맞은 말이고? 니네 서방님에게 해달라고 그래라."
"그카마 할 말이 없다. 오냐! 해달라고 하께."

"......"
"얼마 전 꿈에는, 어릴 적에 돌아가신 아버지가 나타나셨더라. 나를 보시더니 '이제 문을 열어두어야겠다' 하시더라고. 지금 생각하니 그 문이 '저승문'을 말하는 모양이다. 어릴 적에 고생하면 나이가 들어서도 끝까지 풀리지 않는갑다."(훌쩍훌쩍)

"아이구 이 가스나야! 뭐 그리 쓸데없는 말을 하노."
"......"

"언제 친구들 하고 영화나 한 편 보자"
"이 자식아는, 맨날 말로만 그라제? 밥 한끼 사준 적도 없으면서..."

"알았다, 알았어. 요번에는 밥 한 그릇 사주꾸마."
"언능 날 한번 잡아봐라. 바람이라도 좀 쉬어야지."

"가스나야! 목소리 좀 낮춰라. 귀 아프다."
"호호호... 내 목소리가 크나? 자식아야! 니 때문에 울다가 웃다가 한다. 울다가 웃으면 엉뎅이에 솔난다고 하는데..."

"조만간 친구들에게 연락해서 한번 만나자."
"그래 알았다. 꼭 연락해라."

▲ 복사꽃 색깔 같은 립스틱도 괜찮아.
ⓒ 정학윤

▲ 약간 더 진한 색깔도 되고...
ⓒ 정학윤
그녀는 나의 초등학교 동창이다. 그녀는 10년 전 쯤 갑상선에 악성종양이 생겨서 수술을 받은 후, 그간 무탈하다가 병이 다른 부위에 전이되어서 재발했다. 딱히 할 말이 생각나지도 않고, 괜히 짠한 마음에 전화도 못하고 있다가, 마침 출장을 가는 차 안에서 큰 맘 먹고 전화를 했던 것이다.

초등학교 시절 그녀는 우리들보다 두 뼘 정도나 큰 멀대같은 키에 뽀얀 피부였다. 머리는 곱슬머리. 작은 키라서 앞자리에서만 맴돌던 나는, 그녀와 말을 한 번도 나눈 적이 없었다. 근 30여년만에 열린 초등학교 동창회에서 그녀를 다시 만났다.

그때 그녀와 퍼즐을 맞추듯 어린시절의 추억들을 이야기하게 되면서, 귀티가 줄줄 흐르던 그녀가 아버지를 일찍 여의고 매우 고생하면서 자랐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이후 동창회 행사 등을 통해서 더 친해지게 되었고, 간혹 안부를 묻기도 하며 살고 있다.

40대 중반을 넘은 우리의 나이에 초등학교 동창을 친구로 지칭함에 성별 구분이라는 것은 있을 수가 없다. 여자친구나 남자친구가 아니라 그냥 친구일 뿐. 다른 동창과는 달리 초등학교 동창 간에는 격식이 거의 없는 편이다. 만날 때마다 12살 시절로 돌아가게 되니, 이름 대신 예사로 "가스나" "자식아"를 호칭으로 사용한다. 각박한 세상살이에서, 이렇게나 푸근한 인연이 있어서 참 다행스럽다.

차를 세우고 긴 담배를 태웠다. 마음이 소란스러웠다. 새삼 우리 나이가 느껴지기도 하고, 사는 것이 참으로 허망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훌쩍거리다가 다시 웃으며 괜히 큰 목소리로 목소리를 흘려보내던 그녀. 그녀가 품고 있을지도 모르는 어떤 두려움 같은 것이 가슴을 밀고 들어왔다. 안타까운 마음...

"가스나야! 시내를 벗어나니 어느새 복사꽃이 천지로 피었더라. 한번 보라고 찍었어. 너무 걱정하지마. 수술만 하면 괜찮을 거야. 볼 만한 영화 골라서 친구들 소집할 테니, 봄빛에 맞는 립스틱 골라서 바르고 오라구. 봄빛 립스틱이 어떤 색이냐고? 음... 복사꽃이나 버들가지 새순 같은 색깔 아닐까? 가스나야! 모르면 배워라 배워..."

그녀가 한시 바삐 쾌유하기를 기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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