범인이 한국인 조승희로 밝혀지면서 우리 언론의 보도 태도는 크게 두 개의 시선으로 나누어진다. 하나는 미국인들과 미국의 언론들이 다행히 범인의 국적문제에는 크게 초점을 맞추지 않고 있다는 안도이고, 다른 하나는 구멍 뚫린 총기규제 문제와 그로 인한 잠재적 사회불안 요소가 이 사건에서 명심해야할 교훈이라는 것이다.
혹시나 있을지 모르는 한국인들에 대한 차별과 보복에 대한 우려에서 비롯된 우리 국민들이나 교포사회의 불안을 오히려 걱정하는 미국인들의 건강성을 앞다투어 보도하는 기사들과 미국의 총기규제문제를 대문짝하게 걸어두고 있는 매체의 보도 태도에서 기자는 스스로 부끄러움을 느낀다.
사건에 대한 사실 보도는 미국 언론이나 한국의 그것이나 꼭 같아야 하고 같을 것이다. 그러나 그 사건 너머의 것, 그로 인한 사회적 파장은 별개의 것이라 생각한다. 건강한 미국민들의 말마따나 조승희는 한 개인에 불과하다. 그가 한국 국적을 가진 한국인이거나 15년 이상 미국에서 자란 반미국인이거나 그것은 중요치 않다. 그의 병든 영혼이 저지른 살상에 다만 사람으로서 함께 아파하는 것이 인류보편의 자세다.
미국 언론들의 총기규제에 대한 문제제기는 당연한 것이다. 누구나 쉽게 총기를 소지할 수 있고 그 제도적 미비로 인한 잠재적 위협을 이번 사건을 계기로 심각하게 재고해보자는 이슈는 그들로서는 무엇보다 중요한 문제이다. 그런데 미국 내부의 문제이자 그들의 고유한 역사적 경험에서 비롯된 총기규제 문제를 우리의 언론에서 그토록 핏대를 세워야 하는지는 별개로 고민해보아야 한다.
여기에는 우리들의 영악한 부끄러움이 숨어 있다. 어딘가 숨고 싶은 우리의 심사를 눈치 챈 미디어의 얄팍한 서비스 정신이 깃들어 있다. 범인이 한국인이라는 사실은 우리 대부분에게 충격으로 다가온다. 우리들은 모두 개인과 국가 혹은 집단을 동일시하려는 나쁜 버릇을 가지고 있다. 또한 우리 민족은 특별히 선하다는 대책없는 우월감을 가지며 산다.
물론 개인을 위한 국가의 존재와 집단을 위한 개인의 희생을 부정하는 것은 결코 아니다. 공동체 사회를 위한 최소한의 제도적 규율을 받아들이는 개인의 자세를 나무라는 것은 더욱 아니다. 이번 버지니아텍의 참극처럼 한 개인이 저지른 잘못을 우리 모두가 저지른 과오인양 서둘러 반성하면서 스스로 갖게 되는 원죄의식 같은 것을 말하는 것이다. 그러니 숨고 싶어진다.
또한 이번의 사태 같은 살상의 범인은 이슬람 테러리스트나 할렘가의 검은 피부를 가진 인종들이나 저지를 수 있는 짓이지 우리 같은 동방예의지국의 자손들이 저지를 수 있는 일은 절대 아니다. 중국계 동양인이라는 보도에 안도한 것처럼 적어도 동남아시아계 아시안이어야 되는 것인데, 한국인라니? 그러니 받아들이기 싫다. 더욱 숨고 싶어진다.
우리 안의 것을 보아야 할 때
희생자를 위로하고 이와 같은 사건이 다시는 일어나지 않도록 주위를 환기하는 것이 우선이지 한 개인의 범죄에서 우리 민족 혹은 국민 모두가 죄인이 될 의무는 없다. 반성한다면 국가 혹은 집단의 이름으로 저질러진 폭력과 과오에 대한 성찰이 먼저다. 예를 들면 우리 안의 (외국인 노동자 등에 대한) 차별과 멸시 같은 것이다.
정치적(종교적) 박해를 피해 이주한 사람들에 의해 시작된 미국의 역사에서 총기는 그들의 생존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 독립 전쟁과 그 후의 서부개척시대 그리고 남북 전쟁에 이르기까지 총기는 그들의 역사를 일군 중요한 수단이었고 스스로를 지키기 위한 최소한의 생존기제였다. 그들은 총으로 식민지 세력을 몰아냈고 원주인을 그 땅에서 쫓아냈다.
그런 역사적 배경에서 비롯된 그들의 총기 소지를, 그들의 헌법에서 명문으로 보장하고 있는 총기에 관한 권리를, 잇따른 보도에서 전하듯이 460여만 회원을 거느린 막강한 로비집단이 정치적 영향력을 행사해서 누구도 건드리기 싫은 계륵 같은 총기규제 문제를 우리의 언론이 그토록 객혈까지 하며 떠들어서 무엇을 얻고자 함인가.
조승희가 한국인이라는 사실에, 앞서 밝힌 우리의 나쁜 버릇에서 자연스럽게 드러나는 부끄러움을 우리는 슬쩍 총기문제로 감추고 싶은 것이다. 우리의 졸렬함을 슬며시 덮어 편안해지고 싶은 것이다. 실제야 어떻든 간에 한국인이라는 사실이 중요한 것은 아니라는 몇몇 미국인의 말에서 억지로라도 안도하고 싶은 것이다. 이번의 재앙이 난데없는 것이듯 그로 인한 불안의 그림자는 도처에 산재해 있다고 해야 정직한 것이다.
우리가 생각해야 할 것은 미국 사회의 총기문제가 아니다. 그들의 문제는 그들의 것이고 그들만이 해결할 수 있으며 그들이 해야할 일이다. 이번 사건을 계기로 우리가 진중하게 들여다보아야 할 것은 우리 내면의 모습이다. 미국 교포사회의 불안과 이민세대와 그 후의 세대들이 겪는 혼란보다 소위 자이니치로 일컬어지는 재일한국인 문제 등이 더욱 시급한 우리의 과제다.
자발적 이민이 대부분인 미국 교포사회에 비해 일본의 자이니치들은 대개가 강제에 의해 끌려가 일본인도 한국인도 될 수 없는 정체성의 혼란과 수모, 제도적 차별에 무방비로 노출되어 있다. 강제 이주된 중앙아시아의 카레이스키들과 그의 후손들 또한 마찬가지다. 한 개인이 아닌 우리 국가가 감당하고 짊어져야 옳을 시급한 문제조차 해결하지 못하면서 미리 죄인이 되어 사죄하려는 우리의 나쁜 버릇은 이제 버려야 한다.
미국 사회의 일원으로서 나름의 몫을 다하며 살아왔음에도 이방인으로서 겪어야할 많은 부정적 장애물에 몸 고생 마음 고생을 견디고 있는 재외국민들을 생각하면, 역지사지로 우리 산업과 노동시장의 고질적인 취약부분을 담당해주면서 소중한 기여를 하고 있는 외국인노동자에 대한 가당찮은 우월의식과 차별적 태도를 우리는 버려야 한다.
어차피 세계화, 지구촌의 시대를 살고 있다. 경제적 국경과 문화적 경계가 허물어지는 세상이다. 인터넷을 비롯한 통신의 혁명은 지구촌 한가족을 현실로 만들었다. 인종 민족 국가를 초월한 교류와 우정과 가치가 서로에게 공유되는 세상을 우리는 살고 있다. 이번의 사건은 어느 민족 어느 누구에게도 일어날 수 있는 재앙에 지나지 않는다. 우리가 같은 죄인이 될 필요는 없다.
정작 우리가 해야할 가장 큰 책무는 우리 안에, 내 개인의 내면에 조승희가 숨어 있는 것은 아닌지 돌아보아야 한다. 현대의 불안과 우울을 극복한 건강한 개인에 의해서만 건강한 국가가 유지되는 법이다. 마땅히 그 개인과 국가의 건강성을 위해 정론직필을 견지하는 것이 언론의 할 일이지 불쌍한 내면을 감춰주는 짓이 할 일은 아니다.
덧붙이는 글 | 이 기사는 U포터에도 실렸습니다. 오마이뉴스는 직접 작성한 글에 한해 중복 게재를 허용하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