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월 혁명 모독하는 뉴라이트와 한나라당은 사죄하라. 최근 이른바 뉴라이트 계열이라는 교과서 포럼이 마련한 역사교과서 시안을 보고 우리 4월 혁명 동지들은 기가 차서 말이 안 나올 지경이다. 우리가 목숨 걸고 지켜온 민주주의와 인권의 가치가 이처럼 조롱당할 수 있는 것인지 분노와 개탄을 금할 수 없다."
4월 혁명회가 지난해 말 발표한 성명서의 한 구절입니다. 이처럼 뉴라이트 진영이 '반역사적 도발'을 감행하고 있는 데 대해서, 목소리 높여 조목조목 규탄하는 이가 있습니다. 우리나라의 역사를 친일·친미·독재찬양의 역사로 다시 쓰고자 하는 의도를 노골적으로 드러낸 그들을 '유신잔당'이라 부르며 강하게 비판하는 이가 있습니다.
그분은 바로 노중선 4월 혁명회 상임의장입니다. 4·19혁명 47주년을 즈음해 노중선 선생을 서울 종로 인사동 입구에 있는 4월 혁명회 사무실에서 두 차례 만났습니다.
노 선생은 "4·19때는 앞장은커녕 조용히 데모대를 따라다니기만 했다"고 겸손해하면서도, 박근혜 한나라당 전 대표 이야기가 나오자 "5·16쿠데타와 유신독재를 반성하지 않는 '유신잔당'이 아직도 판치고 있다, 역사를 거꾸로 돌리려는 '유신잔당'을 철저히 청산해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였습니다.
또 "4·19혁명은 미완의 혁명이 맞다"면서 "당시에도 그랬고, 앞으로도 조국의 자주적 평화통일이 완성될 때 비로소 4·19혁명이 완성되는 것"이라고 힘주어 말했습니다. 4·19혁명은 반독재혁명일 뿐만 아니라 이승만 독재정권이 기를 쓰고 지키려 했던 분단·냉전·대결 체제에 항거하는 성격까지 동시에 지니고 있었기에, 민주주의 완성과 함께 통일이 이뤄져야만 4·19가 비로소 완결된 혁명이 될 수 있다는 설명입니다.
노 선생은 "냉전과 분단으로 지금도 엄청난 고통을 겪고 있다"며 "분단시대를 살고 있는 모든 민족구성원은 이 같은 시대 상황을 외면해서는 안 된다, 특히 젊은이와 양심적 지식인일수록 더 그러하다"며 자주적 평화통일에 대한 관심을 호소했습니다.
노 선생은 그동안 통일연구자로서 2000년에 출간한 <남북대화 백서>를 비롯해 여러 권의 책을 세상에 선보였습니다. 그래서 어떤 이는 노 선생을 가리켜 '통일연구의 선구자'라고 말합니다.
아래는 노 선생과 한 인터뷰 전문입니다.
"미완의 혁명 4·19, 통일 이뤄져야 완결된다"
- 선생님과 4·19의 인연이 궁금합니다.
"제가 1940년생이에요. 고향은 공주 농촌마을이었고요. 그러니까 대학 3학년 때 4·19를 맞이했지요. 당연히 저도 4·19 혁명에 참여했지요. 근데, 저는 조용하게 참여했어요. 학생들이 다 데모하니까 태평로 국회의사당 앞으로, 광화문으로 따라다닌 것이죠." (웃음)
- 나중에 고려대 노동문제연구소에서 일하셨다고 들었습니다.
"예, 4·19후에 정상적으로 군대도 갔다 오고, 산골마을 중학교 선생 노릇도 2년여 간 하다가 다시 서울로 올라와서 1968년부터 고려대 노동문제연구소 노동교육원에서 노동교육과정을 공부했어요. 이어 작고하신 권두영 박사, 김낙중 선생님 등과 함께 노동문제연구소에서 직장생활을 했어요. 맨 처음 연구조수 겸 간사로 취직했습니다."
- 당시에 노동문제연구소라면 굉장히 혁신적이었겠네요.
"맞습니다. 당시 시대 분위기에서 그런 노동문제연구소가 만들어졌다는 것 자체가 상당한 의미가 있었습니다. 당시 김윤환 선생님(고려대 경제학 교수)께서 1965년에 노동문제연구소를 만들었는데, 처음에는 밖에서 만들었다가 학교로 들어가게 됐어요. 노동문제연구소에는 노동교육과정이 있었는데 기업체의 노무관리 담당자, 노동조합 간부들, 대학원생들이 교육을 받았어요. 지금 노동조합 조직률이 11% 정도라고 하던데, 그때 한국노총 조직률은 22.3% 정도였어요. 당시에는 거의 어용노조이긴 했지만, 노동문제연구소를 거쳐 간 이들이 '의식 있는 노동운동'을 시작했죠."
- 고대 '민우지' 사건으로 옥고를 치르셨죠?
"1973년도였죠. 민우(民友)지 사건인데요. 고려대 '한맥회' 회원 학생들 중심으로 진행된 최초의 유신반대운동이었죠. 제가 배후 조종한 것으로 조작돼서 함께 구속된 사건이죠. 박정희 독재정권이 1971년 9월 위수령을 발동하고, 학교를 폐쇄하던 때였습니다. 그러다 1972년 7월에 7·4남북공동성명을 발표하고, 10월에 이른바 유신을 선포했죠. 학교도 조기방학에 들어갔고요. 그러다가 이듬해인 1973년 개학하자마자 학생들이 유신 선포의 반민주성을 지적하고 정치적 비리를 폭로하는 내용의 유인물 '민우'를 제작해 교내에 비밀리에 배포하는 등 유신반대운동을 펼쳤습니다.
1972년 여름방학 때, 학생들이 연구소로 와서 노동체험을 하고 싶다고 했어요. 그때는 일반적으로 학생들이 농활을 갔을 뿐 노동운동 현장에 가는 경우는 거의 없었습니다. 그래서 학생들을 강원도 광산으로 보냈어요. 그게 왜 가능했느냐 하면, 노동교육원 수료자 중에 광산노조 조합간부가 있었기 때문에 어렵지 않게 할 수 있었어요. 이를 계기로 9월 학기가 시작되면서 학생들하고 자주 만나는 인연이 된 거고 그러다 같이 감옥에 갇히는 인연까지 맺게 된 겁니다."
- 아 그러면, 선생님이 하신 게 아니네요? (웃음)
"그렇죠. 이건 학생들이 주도적으로 유신반대운동을 한 사건이에요. 그때만 해도 엄청난 용기가 필요했습니다. 그런데 학생들이 끌려가서 모진 고초를 겪는 과정에서 김낙중, 노중선 두 사람 이야기가 나온 겁니다. 그래서 저까지 중앙정보부에 잡혀갔고, 고문도 당했죠. 반공법과 국가보안법 위반, 내란선동 음모 혐의로 구형 10년에, 5년형이 확정됐어요. 그래서 5년을 대전감옥에서 살았지요."
- 1978년 출감하신 후에는 어떻게 지내셨는지요?
"출감한 다음에는 출판사(일월서각)에서 편집 교정 일을 하면서 기본 생계를 유지했지요. 그러면서 통일문제와 통일운동 관련 자료들을 찾기 시작했지요. 그 결과물이 1985년도에 나온 자료집 <민족과 통일>이지요. 그때까지는 통일관련 도서가 전무했기 때문에, 연표에 불과한 것이지만 그런대로 의미가 있었던 같아요. 1980년대엔 그렇게 출판사 일을 하고 통일관련 저술에 힘쓰면서 지냈어요."
- 전두환 정권이 그 책을 가만히 두던가요?
"자료를 찾아 자료집을 엮어내는 일이니까 다른 일은 없었어요. 물론 금서로 지정되기도 했죠. 그 후에도 계속 자료작업을 해서 4·19시기 통일논의 자료를 정리해 1989년에 다시 <4·19와 통일논의>를 냈어요. 그리고 1996년에 <남북한 통일정책과 통일운동 50년>을 냈고요. 그동안에 조그만 출판사를 운영하기도 했어요. 작고한 권두영 선생님 지원 아래 출판사 '한백사'를 운영하면서 책을 한 10여권 냈죠. 그렇게 생활하며 지냈어요."
- 1992년 이른바 중부지역당 사건 때는 어떻게 수감되신 건가요?
"1989년 말에 뜻있는 분들과 함께 평화통일연구회를 만들었어요. 평화통일을 위해 짜임새 있는 기구를 만들어 연구도 하고 활동도 해보자, 뭐 이런 문제의식이 있었던 것이죠. 그래서 당시 공평동에 있던 고대 교우회관 6층에 사무실을 확보해서 연구회를 운영했어요. 노동문제연구소 은사인 김윤환 선생님을 회장으로 모시고 권두영 박사, 김낙중 선생님과 함께 시작했지요. 중부지역당 사건은 기본적으로 조작인데, 평화통일연구회 멤버들이 끌려가면서 연구회를 함께한 저도 공범이 된 것이죠. 하지만 뭐 한 게 없으니까 1심에서 집행유예로 나왔어요. 평화적 자주통일을 향한 좋은 연구소를 제대로 만들어 보려 했는데, 중부지역당 사건을 계기로 결국 수포로 돌아가고 말았어요. 두고두고 아쉬운 일입니다."
- 4월 혁명회는 어떤 단체인가요?
"1988년 6월 결성돼 지금까지 민주화와 통일을 위해 애썼습니다. 1990년부터는 사월혁명상을 시상하고 있고요. 해당년도 1년 동안 자주, 민주, 통일이라는 4월 혁명정신을 가장 잘 선양했다고 판단되는 개인이나 단체를 선정해서 시상합니다. 올해 제18회 사월혁명상은 문정현 신부님이 받았습니다. 4월 혁명회를 요약해서 설명하면 '4월 혁명의 완성을 위해 조국의 자주적 평화통일을 지향하는 단체'라고 말하고 싶네요."
- 미완의 4·19혁명을 완성하는 건 '자주적 평화통일'이라는 말씀이시네요?
"그렇지요. 결국 4·19에 대한 관점들이 다른데, 어떤 이들은 부정선거에 맞선 민주항쟁으로 이야기하는 데 그치고 있고, 어떤 이들은 성역화하거나 기념하는 식으로 끝내고 있기도 합니다. 그렇지만, 그래서는 안 된다고 생각해요. 어떤 역사적인 사건을 어떤 달, 어떤 일로 그렇게 고착시켜서는 안 되거든요.
4·19는 단순히 부정선거에 반대한 혁명이 아니었어요. 4·19는 분단모순이 압축적으로 표출된 것으로 봐야 하거든요. 1950년대에 이승만 정권이 냉전분단체제를 유지하기 위해 독재를 할 수밖에 없었고, 독재를 유지해야 하니까 부정선거를 한 것입니다.
그런 과정에서 분단모순이 폭발한 것이거든요. 즉 4·19엔 민주혁명의 성격만 있는 게 아닙니다. 사실은 자주민주통일 운동이었어요. 그래서 그 이후 민통련, 민자통 같은 통일운동단체도 생긴 것이고 학생들이 남북학생회담 운동도 펼친 것입니다. 그래서 '4월에서 통일로'라는 말도 생긴 것이고요.
이렇게 통일운동이 고양되니 다시 냉전분단체제를 유지하기 위해 박정희가 쿠데타를 일으킨 것이에요. 그런 측면에서 보면 4월 혁명의 완결은 분단극복, 통일완성입니다. 냉전분단체제를 일소하고 통일을 이루지 못한다면 4·19혁명은 계속해서 미완의 혁명일 수밖에 없습니다."
"4월 혁명 짓밟는 유신잔당 청산해야"
- 뉴라이트가 지난해 역사교과서와 관련해 4·19 혁명을 폄하했을 때 많이 분노했겠습니다.
"뉴라이트는 '4·19가 혁명이 아니다'라는 식으로 폄하하는데, 사전적인 의미나 형식적인 의미로만 따진다면 4·19를 혁명이 아니라고 해석할 수도 있어요. 하지만 그들은 5·16쿠데타를 혁명이라고 치켜세우기 위해 4·19를 고의적으로 폄하하는 것이거든요. 4월 혁명이 이룩한 민주주의와 평화, 통일운동의 고양을 완전히 짓밟고 냉전분단독재를 재건한 5·16군사반란을 혁명이라고 하다니…. 기가 막히죠. 따지고 보면 '유신잔당'인데, 대응할 가치도 없는 일입니다."
- 박근혜씨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1972년 7·4남북공동성명이 발표됐죠. 7·4공동성명 내용이 자주와 평화, 민족대단결이었습니다. 그렇지만 박정희는 처음부터 이를 지킬 의사도 없었고, 또 그러한 화해국면을 유지하기도 어려우니까 바로 유신을 선포한 거죠. 7·4공동성명을 지키면, 체제유지가 안 되는 거예요. 자주를 하려면 미국과 단절해야 하고, 평화를 하려면 독재를 할 수가 없고, 민족대단결을 이루려면 이북과 교류하고 대화해야 하는데, 유신체제는 독재였을 뿐만 아니라 반통일 분단 체제였기 때문에 3대원칙을 지킬 수 없었던 거죠.
최근에 와서야 자주평화통일을 갈망하는 민족적 염원이 반영돼 남북 당국자가 만나 6·15남북공동선언도 했고 그 이후 민족화해와 교류협력 시대가 활짝 열리게 됐는데, 냉전·분단·대결 의식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는 반통일적 유신잔당이 또 다시 역사의 전면에 나서려 한다는 것은 어불성설입니다. 5·16쿠데타와 유신독재를 반성하지 않는 '유신잔당'이 아직도 판치고 있다니 개탄하지 않을 수 없어요.
우리 사회가 안고 있는 커다란 문제점 중의 하나가 도덕적 불감증이라고 할 수 있는데요, 이런 불감증은 정치현실에서 더욱 두드러집니다. 다시 말하면 이는 왜곡된 역사의 청산이 미진한 결과인데, 우리나라의 밝은 미래를 위해서도 과거의 잘못이나 역사를 거꾸로 돌리려는 유신잔당 같은 세력을 철저히 청산해야 합니다."
- 선생님의 평생 연구 주제가 통일입니다. 남북관계를 어떻게 전망하십니까.
"남북정상회담과 6·15공동선언을 계기로 넓게 보면 통일국면에 접어든 것은 확실합니다. 냉전시대와 비교한다면 정세나 환경이 크게 바뀌었지요. 개성공단, 금강산…. 남북공동행사를 2005년부터 민·관이 함께하는 것도 큰 발전이지요. 교류협력도 아주 일상적으로 이뤄지고 있잖아요. 앞으로도 남북관계는 민족 화해 쪽으로 진전될 수밖에 없어요. 그렇지만 민이든, 관이든 서로 노력해야할 몫이 크다고 생각합니다."
- 선생님의 통일관을 요약해주시기 바랍니다.
"통일은 단순히 영토와 정치체제를 하나로 통합하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의 통일에는 반드시 자주라는 내용을 담아내야 합니다. 그러니까 통일은 평화적인 방법에 의한 자주적 통일로 이뤄져야 하는 것이죠. 4·19시기의 활기찬 통일논의, 1980~1990년대를 거쳐 6·15통일시대를 맞은 오늘에 이르기까지 통일운동의 내용은 일관되게 자주적 평화통일이었습니다. 남북교류활동, 반전평화운동, 문화 학술활동 또한 민족자주 문제를 외면하는 것이라면 그것에 큰 의미를 부여할 수 없습니다. 우리 사회가 안고 있는 사회적 양극화 문제, 경제적 불균등 문제, 문화적 편향 문제, 평화 정착 문제 등 시급히 해결해야할 당면 문제들의 완결적 해결은 자주적 통일에서 찾을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덧붙이는 글 | 안진걸 기자는 희망제작소 사회창안팀장으로 일하고 있습니다. 이 인터뷰는 민가협 양심수 후원회 소식지에도 이후 실릴 예정입니다. 4월 혁명회에 관심 있는 누리꾼들은 전화나 인터넷을 이용하시면 됩니다. 전화 722-3630, 인터넷 http://rev419.jinbo.n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