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close

내가 자주 듣는 말들 중 하나는 '너는, 십 년이 넘은 컴퓨터를 아직도 쓰고, 전화도 옛날 모델로 아직도 갖고 있는 걸 보면, 도대체 시기적으로 맞게 사는 거니?' 하긴 이 질문을 제기 받은 내겐 이 질문에 대한 답이 이미 결정난 이후였다.

그러나 무엇이 시대정신을 결정되게 만드는 것인지를 우리는 누구나가 스스로 의문 해 봐야 한다. 의심할 여지없이 불안하여 쉬지 않고 우리가 우리의 나날들이 서두름을 강요시키면서 또한 그것은 다시 어떠한 일시적인 것으로 끝나고 그 후로 그것은 피상으로 그친다.

모든 것은 빨리 처리해야 된다

요즘에는 정보들도 너무 많기에 뉴스의 신빙성도 적어진다. 만약 그 모든 것이 그렇다면 내가 그런 경향을 갖지 않고 시대적으로 있지 않다는 사실이 어떻게 보면 기쁘다. 무엇을 알아보거나, 그리고 그 어떤 것에 대해 쓰든지 우리가 필요한 것은 철저한 분석이다.

그것은 무엇보다도 필연적이며 또한 그러한 철저한 분석만이 읽는 이들에게 문제점에 대한 상황 파악을 제공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시대정신의 표 중에 하나인 '맥도널드'식 점에서 먹을 수 있는 패스트푸드(Fast food)는 어쩌면 자주 쓸모는 있지만 우리에겐 결국 충분치 못하다.

그럼에도 정신은 자기가 가고 싶은 곳으로 불고 있다. 그리고 시대정신은 자신이 그래야만 하기에 어느 곳으로 든지 스며든다. 자기가 할 수 있는 만큼, 가능한 온 곳에, 거주하는 곳에도, 그리고 옷 입고 벗는 곳에도, 또한 맛보는 곳과 냄새 나거나, 그리고 냄새 있는 곳에, 그리고 사고하는 곳에서든 느끼는 곳에서도. 휴식을 취하는 곳이나 아니면 힘들어하면서 애쓰는 곳에도. 식사할 때나 뭔가를 마실 때에, 또한 유유히 즐기는 곳에서나 뭔가를 포기하는 곳에서도.

포기하는 곳에서도?

포기하는 곳에서도 커다란 의미로 숙고하자면, 영구적인 것과 물질적인 것들. 물질적인 것들은 그 자신 스스로 갖는 의미로서 족하다. 언론과 광고 그리고 체육이 갖고 있는 예술. 시대 정신은 서술하는 것의 표현이다. 시대정신에 있어서는 공공연하게 표현했던 퇴각이 개인생활에 실행된다. 아니면 본질적인 것으로 집중하라고 제정신으로 돌아오게 하는 것일까?

시대정신에게선 영혼이 갈라져서 떨어진다. 커다랗고 그리고 작은 것들이 양쪽에 있다. 한쪽에서는 균형을 지켜주는 중심의 손실에 대해 불평을 늘어놓고 (매 시기마다 일어나는 것들 이지만), 다른 편에서는 갈라져 떨어진 그 상태에 따른 소득 때문에 소리를 지른다.

한편은 독재론의 경향, 그리고 자기 중심의 근성을 또한 쾌락주의의 성향을 확립한다. 그 반면에 다른 쪽은 인간 자체의 속박에서 벗어 나와 개개인의 구제한 사실에 대해 축제를 하고, 또한 수백 년 동안 우리에게 아무런 해가 없음을 용서하려고 했던 선과 악의 이원설로 새로운 인간으로 해방했음을 기뻐하고 그에 따라 잔치를 보낸다.

그렇다면 무엇이 시대정신을 결정되게 할까? 시대정신은 법으로 확정되게 하지 않고, 기껏해야 그것을 인용한다. 시대정신은 모든 것을, 예를 들자면 새로운 사상이나 네트워크(Network), 그리고 디자인들 또한 비교도, 뉴에이지(New Age), 전체성 등 그 밖의 비슷한 것들에서의 어떠한 인상을 고무시킬 수 있는, 집어 널 수 있는 커다란 짐 궤짝이다.

시대정신에겐 사람이 취하는 것에 따른 동일화 할 수 있는 허용을 받은 것처럼 표적을 낸다. 다양한 표적 그리고 유연한 역할들이 그 점이다. 이전에는 추하고 멋없고 또한 서로가 어울리지 않다고 간주되던 것들이 인제는 그것들이 동시에 열심히 누린다. 아주 비싸고 특색이 있는 디자이너(Designer) 가구들과 값싼 소주나 맥주를 쾌히 마시는 축구경기(Fan, Vodafone-Handy)와 독일 내 Aldi 슈퍼에서 값싸게 살 수 있는 화란치즈, 그리고 이브닝드레스(evening dress)와 몸에 꽉 껴입은 또는 바지가 땅바닥에 질질 끌면서 마치 바지가 벗겨질 정도로 펑퍼짐하게 입는 청바지.

시대정신은 여러 가지의 음성으로 표현한다. 또 역시 어떤 하나에 집중 강도에서도. 감정, 행동이나 처사, 그리고 경험에서. 또 극단적인 경우를 겪는 상황에 있어서나, 그리고 자신의 한계를 시험하거나 넓힐 때에도.

그런데다 사람들은 시대정신을 웰니스(Wellness)로 경험한다. 그것은 직장생활의 스트레스 해소로 풀려고 또는 노년기를 위해 지금에만 건강유지를 위해 움직이는 펀(Fun)만이 아니다. 신체를 위한 건강과 위생, 그리고 정신과 심신은 그 자체들 스스로 가치가 있게 된다.

시대정신의 실행은 사람이 그 안에서 자신이 하는 것을 실제로 느끼면서 아울러 기뻐하는 것이다. 그러한 것을 한정 없이 받아들이고 바로 여기 그리고 지금을 위해서 산다는 것이 표어이다. (그래나 저래나 그 점은 이전에도 벌써 그랬었고, 언제나 또다시 번복되고 있다) 단지 기술들만이 더욱더 정제되고 또한 부분적으로는 단순해 잔다. 하이테크(High-Tech)은 그러한 것을 가능케 하기에, 그것이 안될 이유가 없다.

시대정신은 또한 그 모든 즐거움을 부담시킨다. 후견과 사명의 체념

그것은 무엇을 우리가 바라고 원하는지를 모르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 반면에 우리가 원치 않는 것이 무엇인지를 더욱더 잘 알고 있다. 아울러 부정적인 입장을 가진 것이 순진이 진보할 거라는 믿음을 갖고 믿는 낙천론보단 훨씬 긍정적이다. 이렇게 시대정신은 이전에 사람들이 단지 믿고 그 상태를 이루려고 애쓴 것을 진지하게 취급한다. 살고 그리고 살게 나둔다.

시대정신은 그 모든 것을 진심으로 생각한다. 그것은 모든 문화의 상대성이 더 이상 분별하지 않을 뿐 아니라 삶을 의식적으로 생활하게끔 배우게 하기 때문이다. 시대정신은 또한 이러한 인식을 중재하고 그것에 대해 자신의 "무관한-차별이 없는" 입장을 중얼거린다.

또 시대정신이 단호하게 또한 제스처를 자주 하면서 나타나도. 물론 세상을 떠들썩하게 하려고, 시대정신 안에선, 시대정신이 스스로 가져온 것인, 자신이 가는 방향을 현실로 되게 할 수 있게끔 애쓴 시도에서 나타난다. '단지-사실'에 반해서 건강한 처사인 '자기주장'. 그리고 자기 스스로 자신의 존재와 높고 강렬하게 몰두하는 움직임들….

아울러 시대정신은 모드(Mode)를 촉진 시킨다. 그는, 디자이너(Designer)상을 받으려고 하는 또는 단지 그것으로 인해 사람들에게 권고받으려고 하는, 수많은 사람이 뛰어오르려는 기차라고 볼 수 있다. 이해할 수 있는 일이다.

시대정신은 결국 정신을 중개한다. 사람들은 기차를 놓치는 것을 싫어하는 본질이다. 그래서 너무 늦게 온 또는 너무 일찍 온 이들 또는 기차에 뛰어오를 수 없었던 또는 바로 그 기차에 타지 않으려던 사람들에겐 위로가 될지 모른다. 다음의 시대정신이 올 것은 확실하다.

#시대정신#정신#독재론#디자인#MODE
댓글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독자의견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