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관직에 오른 여성이고, 시대를 대표하는 어머니요, 부인이요, 여성 예술인이 있다. 모두 '손숙' 그를 일컫는 말이다. 하지만 연극 <어머니>가 시작되기 전 분장실에 만난 그는 커피를 좋아하고 수다 떠는 것을 즐기는 그저 한 사람이었다.
화려한 말들 속에 묻혀 있던 인간 손숙과 함께 연극과 사랑에 대한 짧은 이야기를 지난 20일 나눠보았다.
99년 초연 후 매회 공연한 것이 올해로 9번째에 접어들었다. 특별히 <어머니>만 자주 공연하는 이유가 있느냐고 물었더니 의외의 대답이 나온다.
"이 작품이 특별히 좋아서라기보다 보는 분들이 워낙 좋아하셔서 더 열심히 하는 거죠."
경남 밀양 출신인 그녀는 이윤택이 만들고 이끌어나가는 '연희단 거리패'와 사이가 각별하다. 이윤택이 그의 어머니를 보고 쓴 <어머니>를 손숙이 연기하면서 밀양 연극촌이 만들어지게 되고 연희단 거리패가 서게 됐다.
"그런데 이건 진짜 우리네 모습이니까 다른 작품보단 연기하기가 편해요. 극 중 황일순 나이가 69살이예요. 내 나이가 올해 64살이니까 9년 전보다 작품 속에 더 스며들게 되죠."
어머니는 '효도공연'이 아니야
연극 <어머니>는 굴곡진 현대사 속에서 어린 자식을 위해 억척스럽게 삶을 견뎌내는 어머니의 모습을 통해 가족의 소중함을 느끼게 해주는 '어머니를 위한 효도공연'으로 주로 홍보하고 있다.
하지만 손숙은 <어머니>는 효도공연이 아니라고 딱 잘라 말한다.
"<어머니>는 단순히 어머니들만 위한 '효도공연'이 결코 아니예요. 굴곡진 삶을 견뎌낸 어머니 모습은 곧 자신들의 이야기죠. 그래서 어머니들이 더 공감하는 건 맞아요. 하지만 그 속엔 어머니의 가슴 아린 첫사랑과 나이 든 어머니를 귀찮아하는 자식과 며느리 모습까지 녹아 들어있죠. 이 공연은 어머니세대와 자식세대가 느끼는 부분이 많이 달라요. 그래서 함께 보고 서로 대화를 나눌 수 있는 교류의 장이 되는 연극이죠."
40년이 넘도록 연극배우의 길을 걷고 있는 손숙이 바라보는 젊은 배우들의 연극은 어떨까.
"요즘 젊은 배우들은 관객을 웃기는 데만 너무 신경 쓰는 것 같아요. 특히 장기공연을 할 땐 어느 부분에서 관객이 웃는다는 걸 아니까 더 과장해서 연기하거든요. 하지만 오버액션으로 웃기려고 하는 배우는 배우가 아니예요. 코미디언이지."
대학연극부나 초짜 배우들이 공연을 할 때 부담을 가지는 부분이 '연극은 재밌어야 한다'와 '관객을 웃겨야 한다'라는 생각을 동일시하는 것이다. 잘 짜인 대본과 완벽한 캐릭터 분석 뒤에 나오는 배우의 연기가 찰떡궁합을 이룰 때 비로소 대본 자체가 주는 자연스런 웃음이 나온다. 그녀는 이런 것들이 연극이 주는 제대로 된 재미라고 단호히 말한다.
"연극계 분위기가 이렇게 흘러가는 건 관객들 탓도 있다고 봐요. 요즘은 무조건 웃을 수 있고 재밌는 연극만 보려고 하죠. 연극은 본질적으로 삶에 대한 고뇌와 성찰을 안고 있어요. 그 진지함 속에서 나와 닮은 삶을 보면서 자연스런 웃음이 나오는 건데 아쉬워요."
"문화도시가 살맛나는 도시죠"
"양산은 '기업하기 좋은 도시'가 슬로건인가요? 개인적으론 자유롭게 문화생활을 할 수 있는 도시가 더 살아있는 도시라고 생각해요. 노래든 춤이든 문화는 모두를 아울러 즐겁게 만들어 주잖아요? 꼭 공연장에서 돈내고 보는 것이 아니더라도 길거리 공연을 통해서도 문화는 얼마든지 접할 수 있죠. 이렇게 좋은 공연장을 지어놨으면 시민들에게 좋은 공연을 많이 보여주는 것이 시의 의무라고 생각해요."
연극 <어머니>로 지역순회공연을 많이 하는 손숙은 양산은 다른 곳에 비해 문화예술회관이 너무 잘 갖춰져 있다고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지난해에는 박정자씨가 <어머니는 오십에 바다를 발견했다>를 공연했다고 하니 좋은 작품을 많이 유치하는 것 같다며 자신이 더 즐거워한다.
<어머니>에서 황일순 대사 중 "옛날사랑은 순치사랑"이란 말이 나온다. 실제로 목숨 건 지고지순한 사랑을 했던 그녀에게 요즘 젊은이들의 사랑하는 방식은 어떻게 보일까.
"목숨 건 사랑이나 수지 타산 맞아서 하는 사랑이나 세월 지나니 다 똑같아요. 하지만 한 사람인생에서 사랑에 목숨 한번 걸어보지 못했다면 제대로 인생을 살았다고 할 수 없는 것 같아요. 아픔 없이 순탄하게 살아온 것이 과연 잘 살아왔다고 할 수 있을까. 난 아직도 철이 안 들어서 그런지 조건만 따지는 사랑 그건 아닌 것 같아요."
<어머니>의 황일순이나 <셜리 발렌타인>의 셜리나 <메디슨카운티의 추억>의 프란체스카 그리고 손숙. 모두 사랑하고 싶고 사랑받고 싶고 사랑을 간직하는 그의 모습이다.
사랑마저 거래로 변해가는 요즘, 사랑의 맑고 순수함을 믿는 그가 사랑스럽다.
덧붙이는 글 | 양산시민신문 179호에도 실린 기사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