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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작년 한국에 있을 때 부모님 결혼 31주년 기념으로 촬영한 사진. 작업복만 입으시던 몸에 양복을 걸치니 어색하다시던 아버지와 한복이 잘 어울리는 엄마. 더이상 늙지 않으셨으면 좋겠습니다.
제작년 한국에 있을 때 부모님 결혼 31주년 기념으로 촬영한 사진. 작업복만 입으시던 몸에 양복을 걸치니 어색하다시던 아버지와 한복이 잘 어울리는 엄마. 더이상 늙지 않으셨으면 좋겠습니다. ⓒ 전은화
전화를 끊고 보니 아버지와 통화한 지가 한참이었습니다. 어쩌다 낮에 전화를 하면 밖에 계시는지 애먼 전화벨만 울려대고 그래서 핸드폰을 누르면 그 역시도 불통이었습니다. 그때마다 "저녁에 해야지" 해놓고는 뭔 정신인지 잊어버리기 일쑤였습니다.

그날은 엄마가 전화까지 하셨으니 잊을 리 만무했지요. 저녁 7시쯤, '한국시각 저녁 8시니 집에 계시겠지?' 생각되어 전화를 했습니다. 엄마가 받으시더니 얼른 아버지를 바꾸셨습니다.

"아빠? 저 은화에요."
"은화냐? 별일 없냐? 하도 전화가 없어서 뭔 일 있는가 걱정되아서…."
"저 잘 있어요. 전화 자주 해야 되는데 죄송해요. 참 아빠 소연이가 안 그래도 아빠 보고 싶은지 계속 할아버지 찾더라구요."
"그려? 고것이 아조(아주) 정만 뿌리고 가부렀다. 갸는 애기가 귄(귀염성)이 있단 게. 어디 소연이 한번 바꿔봐라. 안글도 거울에 꽂아 논 사진만 치다 보고 있다."
"할 아 버 지∼!"
"오냐. 소연아∼!"

길지 않은 대화를 주고받는 데도 소연이 통통한 볼은 웃느라 더 통통해 보였고, 수화기 너머로 아버지 목소리는 쩌렁쩌렁 울렸습니다. 손녀딸과 통화하시며 연방 웃으시는 아버지. 손녀딸 예뻐서 어쩔 줄 모르시는 아버지 모습은 내 어린 시절 어렵기만 하던 그 아버지가 아닌 너무도 살갑고 사랑 많으신 분이란 걸 새로이 느끼게 했습니다.

"큰딸로 태어나 고생 많다"며 눈물을 보이시던 아버지

어렸을 땐 한 달에 한두 번 보던 아버지가 늘 낯설었습니다. 객지에서 공사장 일을 하셨던 아버지가 집에 오시는 날엔 마루며 방이며 광이 나게 닦았습니다. 해가 어수룩해지고 밤이 깊을 때까지 기다리다 어린 동생들은 밥상머리에서 잠이 들기도 했습니다.

'지지직' 거리는 흑백텔레비전에 열중해 있을 때쯤 "은화야∼!"하고 부르시는 아버지 목소리가 들리면 방문을 박차고 뛰쳐나가 "아빠 오셨어요"하며 넙죽 인사를 했습니다. 아버지가 사온 과자 봉지를 뜯는 소리에 동생들까지 자다 깼습니다. 방안은 왁자지껄하며 떠들썩할 만도 하건만 아버지와 우리 사이엔 냉랭한 기운을 어쩌지 못하고 그렇게 어색하기만 했습니다.

마음은 품에 안겨 어리광도 부리고 싶었지만 그런 것조차도 사치라는 걸 너무 빨리 깨달았던 시절이었습니다. 그러면서도 한편으론 다정하고 살갑게 보이는 친구들 아빠와 비교가 되면서 '아빠는 우리가 안 좋으신가' 하는 철없는 생각을 하기도 했습니다.

고등학교 때, 전주서 친구와 자취를 하며 학교를 다니던 저는 주말이면 농사일을 거들러 시골에 내려갔습니다. 어느 주말, 때마침 서울에서 일하시던 아버지가 와 계셨습니다. 일요일 오전까지 일을 도와드리고 오후엔 다시 전주로 올라가기 위해 준비를 했습니다. 그때 땀에 흠뻑 젖으신 아버지가 수건으로 땀을 닦으시며 곁으로 다가오셨습니다.

"인자 올라가냐?"
"네, 아빠, 아빠는 언제 가세요?"
"나도 며칠 있다가 가야제. 은화야 이거 받아라. 공부 열심히 허고…."
"괜찮아요. 아빠. 엄마가 주셨어요."

아버지는 퍼런 배춧잎 한 장을 손에 쥐어 주면서 "큰딸로 태어나 고생이 많다"며, 그 말씀만 연거푸 하셨습니다. 그날까지 아버지 속내를 내다볼 기회가 없었던 저는 사실 어리둥절했습니다. 아버지는 더 이상의 말씀보다 그저 제 손을 더 힘주어 잡으셨습니다.

아버지 얼굴을 올려다봤습니다. 금세 눈은 뻘게지셨고 처음으로 눈물을 보이셨습니다. "아니에요. 아빠. 저 괜찮…" 말도 못 잇고 저도 한참을 울었습니다. 아버지 가슴속에 꼭꼭 숨어있던 고단하고 여린 속내를 맞잡은 손으로 느끼며 정말이지 실컷 울었습니다. 그날 이후 아버지는 제게 솜털보다 더 따뜻한 존재로 기억되었습니다.

시집간 딸 생일날 미역국을 끓이신 아버지

지난 2월, 해마다 그랬듯 다가온 제 생일날 '낳아주셔서 감사합니다'라는 말씀을 드리려 아침 일찍 전화를 했습니다.

"엄마? 오늘 나 낳느라 고생하셨어요."
"뱃속에서부터 너는 못 먹었는디. 너 미역국은 먹었냐? 오늘 니 아빠가 니 생일이라고 나 잘 때 미역국을 다 끓였단다."
"진짜? 엄마 아빠 옆에 계세요? 바꿔주세요."

"아빠? 제 생일 기억하셨어요?"
"그믄. 니 생일을 잊어먹을 수 있가니? 너 날 때 산파가 없어서 한밤에 산을 넘어 할매를 모시고 왔더니 날이 새더라. 너는 벌써 태어나있고 너그 엄마는 기절해 있고…, 그때 생각허믄 너나 니 엄마가 어치게 살았는지 모르는디…."
"정말요? … 오늘 미역국도 끓이시고… 아빠가 끓이신 거 먹고 싶네요."
"가찹게(가깝게) 살믄 떡이라도 히줄텐디… 그려 항시(항상) 몸조심해라."

아버지는 힘들게 태어난 딸이 몹시도 걸리셨나 봅니다. 미끈거리는 느낌이 싫어 미역국은 안 드시는 아버지가 그날은 시집간 딸 생일이라고 홍합 넣고 개운하게 미역국을 끓이셨답니다. 먹을 수는 없었지만 미역 줄기 후루룩 건져 먹고 국물까지 다 마신 것처럼 배가 불렀습니다. 세상에서 젤 기분 좋은 선물을 받았는데, 생일날 아침 주책없는 이놈의 눈물은 끝도 없이 흘렀습니다.

오래도록 건강하세요

결혼식 날 딸 손을 사위에게 넘겨 주시며 서운한 눈빛이 역력하셨던 아버지. 자리에 앉으시자마자 끝내 눈물을 훔치시던 아버지. "너는 딸이 아니라 아들이나 진배없다" 하시며 늘 듬직하게 믿어주시는 아버지가 올해 벌써 환갑을 맞으십니다.

50 중반의 엄마와 가끔씩 티격태격하시는데 어릴 땐 참 싫더니만 지금은 그리 싫지 않습니다. 두 분이 적적함이 덜하실 테니 그렇고요. 아직 그만큼의 기력이 있다는 것과 오랜 세월 함께한 사랑이 빚어내는 싸움이라 생각하니 그렇습니다.

아버지와 통화한 그날 이후 다음날도 그 다음 날도 연달아 계속 전화를 드렸습니다. 그랬더니 울 아버지 목소리가 아주 밝으셨습니다. 전화 끊으시면서 "그나지나 고맙다" 하십니다. 딸자식이 부모한테 전화하는데 그저 고맙다고만 하십니다. 손가락 살짝만 움직이면 '띠리리' 신호음과 함께 부모님 목소리도 듣고 부모님 얼굴에 웃음도 드릴 수 있는데 그동안 참 소홀했습니다.

자식은 부모에게 언제나 외사랑의 대상인 것 같습니다. 또 부모님은 자식에게 있어 아낌없이 주는 나무 같습니다. 그저 베풀기만 하시는 부모님에게 외사랑의 고독함을 드려서는 안 되겠지요. 고생만 하신 부모님, 편하게 호강은 못 시켜 드리지만 마음을 다해 사랑합니다. 늘 건강하시고 곁에 오래도록 계셔 주시길 간절히 바라는 마음입니다.

덧붙이는 글 | 다음 블로그, 유포터에도 보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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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 광동에서의 생활을 마무리하고 한국에 돌아와 생활하고 있습니다 평범한 삶속에 만나는 여러 상황들과 김정들을 담아보고자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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