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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아하면서 편안해 보이는 무위사
단아하면서 편안해 보이는 무위사 ⓒ 이현숙

오랜만에 먼 길을 떠난다. 분주한 준비와 흥분된 마음. 나는 구름에 달 가듯이 가는 나그네 되어 길을 떠난다. 이번 여행지는 넉넉한 땅, 물 좋고 산 좋고 인심 좋은 남도 땅이다.

첫 번째 여행지는 청자와 유배의 고장, 남도 여행 일번지라 일컫는 강진이다. 10년 전 답사 여행을 와 보고 10년 동안 그리워 하다가 이제야 겨우 밟게 된 땅이다.

답사 여행은 내게 갈증을 주었다. 정해 놓은 길, 정해 놓은 시간에 따라 획 둘러보고 다음 여행지로 떠나야 하는 맞춤 여행 식. 수많은 길을 놔두고 꼭 정해진 길만 간다는 것은 심한 갈증과 호기심만 키워 주었다.

무위사 선각대사 편광탑비와 삼층 석탑
무위사 선각대사 편광탑비와 삼층 석탑 ⓒ 이현숙

강진 땅을 밟고 제일 먼저 도착한 곳은 무위사. 월출산 남쪽에 있으며 강진 땅에 자리한 선비풍의 신라 고찰. 신라 고찰이라면 꽤 찬란할 것 같은데 눈에 들어온 건 단아한 극락보전 하나.

쓸쓸해 보일 법도 한 경내는 단촐 해서 오히려 편안하다. 그래서 무위사인가. 요즘의 절집들은 앞 다퉈 새집을 지어 절 앞에도, 뒤에도 웅장한 기와집으로 채워져 있는데 무위사는 텅 비어 있어서 더 충만한 느낌이다

극락보전 벽화에는 독특한 전설이 전해져 내려온다. 법당이 완공되고 스님들이 백일기도를 드리고 있을 때, 남루한 차림의 노승이 찾아와 법당의 그림을 그려주겠다고 자청하였다. 차림보다 기품이 있어 보이던 노승은 주지에게 49일 동안 법당 안으로 사람을 들여보내서는 안 된다고 다짐하였으나, 49일이 다 되어도 인기척조차 없자 주지는 창구멍을 뚫고 법당을 들여다보았다.

그런데 노승은 보이지 않고 파랑새가 붓을 물고 있는 게 아닌가. 이 파랑새 마지막 남은 관음보살의 눈을 그리려다 인기척에 놀라 붓을 버리고 어디론가 날아가 버리고, 관세음보살은 영 눈을 가질 수 없었다고 한다.

아무 관심 없다는 듯 저 홀로 명상에 빠져 있는 견공
아무 관심 없다는 듯 저 홀로 명상에 빠져 있는 견공 ⓒ 이현숙

무위사 마당에는 하얀 진돗개가 조용히 엎드려 눈을 감았다 떴다 하고 있다. 나는 개가 무서워 슬슬 피하는데 이 개는 꿈쩍도 안 한다. 마치 너 왜 그러니? 하면서 나를 비웃는 것 같다. 개의 후한 성품을 알아차릴 즈음 나는 무위사를 등지고, 낮은 고개 하나를 넘어 차밭으로 갔다.

길 양쪽으로 조성된 차밭, 태평양 그룹인 장원산업의 강진다원
길 양쪽으로 조성된 차밭, 태평양 그룹인 장원산업의 강진다원 ⓒ 이현숙

월출산 남쪽 산간지역을 개간하여 조성한 32ha에 이르는 드넓은 차밭
월출산 남쪽 산간지역을 개간하여 조성한 32ha에 이르는 드넓은 차밭 ⓒ 이현숙

잘 포장된 길 양쪽으로 차밭이 조성돼 있다. 찻잎에 이슬이 맺히지 않게 하려고 바람개비를 달아 돌리고 있다는 강진 다원이다. 일단 규모면에서 놀랐다. 이래서 우물 안 개구리라는 말이 생겨났는지. 난 보성에만 차밭이 있는 줄 알았는데 월출산이 굽어보고 있는 이 드넓은 대지가 모두 차밭이라니 정말 대단하다.

차밭이 끝나는 곳에서 우측으로 돌아 내려가니 월남사지가 나왔다. 예전에 들른 기억이 나는데, 그때와 꼭 같은 모습이다. 무너진 돌담과 옆으로 피어난 봄꽃들, 이대로 보호하려는 것인지 무너진 모습 그대로가 정돈돼 보이고 무척 친근한 느낌으로 다가온다.

월남사지 삼층 석탑. 뒤에 월남사가 보이고 기기묘묘한 월출산 봉우리들이 내려다 보고 있다
월남사지 삼층 석탑. 뒤에 월남사가 보이고 기기묘묘한 월출산 봉우리들이 내려다 보고 있다 ⓒ 이현숙

월남사지 3층석탑. 월남사지라고 해서 나는 베트남의 옛 이름을 떠올렸다. 왜 하필 이곳에 월남이라는 이름을 붙였나, 하고. 그런데 월출산 남쪽에 있어서 월남사란다. 주소도 강진군 성전면 월남리다. 월출산의 기기묘묘한 봉우리가 에워싸고 있는 절터. 바로 위에 있는 민가처럼 생긴 월남사가 이 폐사지를 관리한다고 한다.

봄꽃이 만발한 김영랑 시인의 생가
봄꽃이 만발한 김영랑 시인의 생가 ⓒ 이현숙

다음 여행지는 영랑생가. 바깥마당엔 할미꽃이 무리지어 피어 있고 담 밑으로는 모란꽃이 돌아가며 피어있는 우리의 옛집 같은 풍경이 펼쳐져 있다. 고개 숙여 안을 들여다보니 조무래기들이 소풍 와 있다. 일렬로 삐뚤빼뚤 줄지어 앉아 있는 모습이 재밌어 카메라를 들이대니 눈망울들이 더 초롱초롱해진다.

카메라를 들이대면서 얼핏 선생님의 눈치를 살핀다. 행여 싫어하지 않을까 염려됐다. 그러나 선생님은 '여러분 앞을 바라보세요' 한다. 카메라를 보고 포즈를 잡으라는 뜻인데, 이 아이들 더 흐트러진다. 이럴 땐 초상권 어쩌고 하는 것도 도시에만 있는 건가 싶을 정도로 의아해진다.

영랑시인 생가로 소풍 온 아이들.. 안채 마당에 삐뚤빼뚤 줄지어 있는 모습이 재밌다
영랑시인 생가로 소풍 온 아이들.. 안채 마당에 삐뚤빼뚤 줄지어 있는 모습이 재밌다 ⓒ 이현숙

생가 본채 옆, 영랑시인이 집필하시던 곳이라는 데...
생가 본채 옆, 영랑시인이 집필하시던 곳이라는 데... ⓒ 이현숙

'모란이 피기까지는 나는 아직 기다리고 있을 테요' 김영랑 시인의 시가 잔잔하게 흘러나오는 뜰 안. 울안을 따라 그리고 김영랑 시인의 작업실이었다는 마루 앞에는 모란을 비롯한 봄꽃이 흐드러지게 피어 있다.

역시 봄엔 남도가 최고다. 불현듯 '산 너머 남촌에는 누가 살길래' 라는 노래로 입술이 달싹거려진다. 남촌의 첫 인상은 알록달록 꽃길이요, 먼저 가신 선인들의 발자취를 따라 가는 것임을 내게 새삼 일깨워 주었다.

덧붙이는 글 | 무위사는 전남 강진군 상전면 월하리에 있으며 영랑생가는 강진군 남성리에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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