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마이뉴스의 모토는 '모든 시민은 기자다'입니다. 시민 개인의 일상을 소재로 한 '사는 이야기'도 뉴스로 싣고 있습니다. 당신의 살아가는 이야기가 오마이뉴스에 오면 뉴스가 됩니다. 당신의 이야기를 들려주세요.】
"동창들이 인터넷카페를 모른다고 무시하잖아!"
"해외에 있는 아이들과 이메일이라도 주고받으려고."
"배우는 게 창피한 건 아니잖아!"
예순 살 전후의 어르신들이 밝힌 '컴맹 벗어나기'의 소박한 이유들이다. 서울시 금천구 시흥동 남부여성발전센터 생활문화교실의 '컴퓨터 왕초보반' 강의 현장에서 만난 수강생들인 이들은 '배움에는 나이가 없다'는 말을 몸소 실천하며 컴퓨터와 한판 씨름을 벌이고 있었다.
배움에는 나이가 없다! 어르신들의 컴맹 탈출기
2일 오전 10시 30분 무렵 찾은 강의실에서는 자료파일을 복사해서 이동식디스켓에 저장하는 방법을 가르치는 수업이 한창이었다.
뒷자리에 앉아서 수업을 지켜보니, 컴퓨터를 처음 배우는 이들은 파일을 복사해서 이동한다는 것이 신기할 따름이라는 표정이었다. 하지만 안경을 썼다 벗었다 하며 강의스크린과 컴퓨터 화면을 번갈아 바라보는 이들의 눈에서는 배움에 대한 열정이 뜨겁게 빛났다.
강사는 몇 번이고 "컴퓨터는 생각보다 친절하다"며 "컴퓨터가 말하는 대로 천천히 따라 하기만 하면 쉽고 재미있게 배울 수 있다"고 웃으며 강조했다. 강사는 수업 시간 내내 불쑥불쑥 올라오는 손짓을 따라 이곳저곳 다니느라 바빴다.
"파일이 사라졌다고? 언니, 복사를 해야지! 잘라내기 했지?"
"언니, 스크린과 컴퓨터 화면이 다른 건 글씨 크기 때문이에요! 잘 봐요. 똑같죠?"
"컴퓨터가 안내하는 글을 잘 읽으셔야죠. 무턱대고 '예' 하면 안 된다고 했죠?"
수업은 자유로운 분위기에서 진행됐다. 때로는 휴대폰이 울리고 생리현상을 해결하기 위해 강의실을 벗어나는 모습도 눈에 띄었지만, 대부분 처음부터 끝까지 질문을 주고받으며 컴맹 탈출을 위해 무진 애를 쓰는 모습이었다.
컴퓨터 배우기에도 자식 사랑이 물씬
수업이 끝난 뒤, "왜 컴퓨터를 배우기 시작하셨느냐"고 여쭸더니 화기애애하던 강의실에 한순간 침묵이 흘렀다. 대부분 예순 살 전후 여성들인 이들은 수업시간과는 다르게 쑥스러움을 나타냈다. 몇 차례 완곡한 질문을 드리고 나서야 여기저기서 말문이 열리기 시작했다.
신연순(59)씨는 "1970년도에 남미로 이민을 갔었는데, 일 때문에 혼자만 우리나라로 다시 돌아오게 됐다"며 컴퓨터 왕초보반에서 수업을 받는 이유를 이렇게 설명했다.
"자녀들이 그곳에서 결혼을 해서 살고 있어요. 한국에 나와 한동안 일에만 매달리다 보니, 아이들과 국제전화를 하다 보면 이메일이나 사진을 주고받을 수 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배우는 게 쉽지는 않지만 아이들 생각해서라도 열심히 배울 겁니다."
김화자(58)씨는 "운전은 20년 경력을 자랑하는 베테랑인데 컴퓨터는 꽝"이라며 친구들에 대한 분노(?) 때문에 컴퓨터를 배우게 됐다고 웃으며 말했다.
"동창회에 가면 인터넷 카페를 모른다고 어찌나 구박을 하던지 화가 나서 배우려고 왔어요(웃음). 아직은 말 그대로 왕초보라 마우스 클릭하는 것도 어렵지만 게임도 하고 이것저것 하다 보면 안 되겠어요? 왕초보반 끝나면 상급반에서 계속 공부할 겁니다."
한참 동안 뜸을 들이던 홍옥순(58)씨는 처음에는 컴퓨터를 끄고 켜는 것도 어려웠지만 지금은 한결 편해졌다"며 배움의 이유로 역시 자식에 대한 사랑을 들었다.
"딸이 오는 9월에 프랑스로 공부하러 떠나요. 요즘은 자식과 대화를 하려면 컴퓨터를 해야 한다고 하더라고요. 그래서 이메일이라도 주고받으려고 컴퓨터를 배우고 있어요. 전화통화도 좋지만 미니홈피에 글도 남기면서 틈나는 대로 딸의 생활을 살필 수 있으면 좋잖아요."
"나이가 많아도 배우는 건 창피한 게 아니다"
이날 22명 수강생들 중 유일한 청일점이었던 윤언병(68)씨는 "아무리 나이가 많아도 배우는 것은 창피한 게 아니다"며 컴퓨터 공부를 통해 남은 인생에 대한 열정을 드러냈다.
"3년 전 대기업에서 정년퇴직을 하고서도 작년까지 하루 8시간씩 일을 했어요. 하지만 지금은 일을 안 하다 보니, 산을 가도 운동을 해도 한두 시간뿐이더라고요. 컴퓨터를 배워서 뭘 한다기보다는 다시 삶을 열심히 살겠다는 스스로의 다짐이랄까, 뭐 그런 거지."
이들의 컴맹 벗어나기는 이 날로 두 달째 접어들었다. 매주 월요일과 수요일 오전에 1시간 30분씩 진행되는 컴퓨터 수업은 3개월 일정으로 오는 6월 말까지 이어진다. 이들은 한결같게 3개월 수업을 마치면 상급반에서 계속 컴퓨터를 배울 계획이라고 목소리를 모았다.
수업 시간 내내 어머니 같은 수강생들에게 또랑또랑한 목소리로 "언니"라고 부르던 민경랑(34) 강사는 어르신들이 컴퓨터를 잘할 수 있는 비결을 묻자, 이내 특유의 명랑한 웃음으로 답했다.
"저는 항상 '글씨만 잘 읽으면 컴퓨터를 잘할 수 있다'고 말씀 드려요. 초등학생들은 겁이 없어서 이것저것 아무거나 막 눌러보다가 안 되면 선생님을 찾는데, 어르신들은 겁이 많아서 '컴퓨터가 고장 나면 어쩌지?'라고 시도조차 잘 못해요. 컴퓨터를 배울 땐 그런 걱정하지 마세요. 컴퓨터 고장이요? 고치면 되잖아요."
이어 민 강사는 "컴맹 탈출은 초등학생들에게도 쉬운 일"이라며 "컴퓨터가 안내하는 글씨를 잘 읽고, 마우스와 키보드를 자연스럽게 다룰 수 있도록 손가락 운동을 조금만 하면 된다"고 덧붙였다.
이에 자리를 막 뜨려던 이들의 아우성이 여기저기서 터져 나왔다.
"초등학교 1학년 공부보다 힘든 게 컴퓨터 수업이야!"(윤언병)
"연필을 처음 잡을 때보다 마우스 다루기가 더 어려워!"(김정희)
"왕초보반이지만 너무 힘들어!"(홍옥순)
잊고 지내던 '이름'을 되찾아준 이메일과 아이디
결혼해서 누구의 아내로, 자식을 낳고 다시 누구의 엄마로, 손자와 손녀를 보고 또 누구의 할머니로 불리고 있을 이들. 취재 질문에 참으로 오래간만에 자신의 이름을 말한다는 듯 머뭇머뭇거리던 이들은 또다시 자식들과 의사소통을 위해 배움을 시작했다.
하지만 이들은 알고 있을까. 컴퓨터교육을 통해 만들 이메일과 아이디가 결혼 이전 OO씨라고 불리던 것처럼, 자신의 다른 이름을 찾아준다는 것을. 이래저래 왕초보반의 컴맹 벗어나기를 기원해본다.
덧붙이는 글 | '여성의 발전으로 가정을 건강하게' 서울시남부여성발전센터의 소개글입니다. 소개글 그대로 가정의 달 5월을 맞이해 나이를 잊고 배움에 열중이신 여성분들의 모습을 담아 봤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