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가 전비 지출법안에 퇴짜를 놓던 날은 공교롭게도 4년 전 같은 날 부시 대통령이 이라크 전쟁의 '임무 완료(Mission Accomplished)'를 선언한 날이었다.
2003년 5월 1일 부시 대통령은 대잠 초계기인 S-3 바이킹에 동승해서 항공모함 에이브러햄 링컨 호에 착륙한 뒤 함상에서 TV로 생중계되는 연설을 했다. 백악관 홈페이지(http://www.whitehouse.gov/news/releases/2003/05/20030501-15.html)에 가면 당시 연설 동영상을 볼 수 있는데 23분 44초 동안 연설하는 동안 박수가 무려 24번이나 나왔다. 1분에 한 번꼴이다.
부시 대통령은 "이라크에서 주요 작전은 끝났고 미국과 동맹국은 승리했다, 미국과 동맹국은 임무 완료를 자랑스럽게 여긴다"며 "조국을 위해 위험을 감수한 여러분의 용기와 의지가 바로 오늘을 있게 했다"고 말했다. 또 우fp와 같이 쏟아지는 박수와 환호성….
부시 대통령이 연설할 때 링컨 호의 함교에는 '임무 완료(Mission Accomplished)'라는 플래카드가 내걸렸다. 그런데 4년 전 이 플래카드가 이제 이라크 전비 지출 법안의 거부와 맞물리면서 조롱거리가 되었다.
CNN 등 미 언론들은 3351명의 미군이 사망하고도 아직도 내전 상태인 이라크 상황을 보도하면서 '임무 불완수'(Mission Unaccomplished)라고 보도했다. 반전 시위대는 백악관 밖에서 시위를 벌이면서 '임무 완료?(Mission Accomplished?)'라는 플래카드를 내걸었다.
논란이 커지자 백악관이 해명에 나섰다. 데이너 페리노 백악관 대변인은 "부시 대통령은 '임무 완수'라고 말한 적이 없으며 단지 링컨호에 '임무 완수'라는 플래카드가 걸려있었던 것"이라고 주장했다.
당시 링컨호가 이라크와 아프가니스탄전에 6개월 예정으로 급파됐다가 기한을 넘겨 작전을 수행했는데, 5월 1일에는 이 배의 임무가 끝났음을 알리기 위해 함교에 'Mission Accomplished'라는 플래카드를 내걸었다는 것이다. 즉 부시 대통령의 '임무 완료' 선언과 함교에 걸려있던 플래카드는 전혀 상관없다는 말이다.
변명이 궁색하기도 하지만, 4년 전 기세를 올렸던 부시 대통령으로서는 이만저만한 수모가 아니다. 이라크 전쟁은 이제 '미션 임파서블'이 돼버렸다.
부시 대통령이 이런 치욕을 당하게 된 이유는 무엇일까?
지난 4월 이라크에서 통상·국방·재무 장관을 역임했던 알리 알라위는 '이라크 점령'이라는 책에서 "좀 시야가 넓은 사람이라면 이라크 공격이 이 사회 안에 엄청난 분열을 터져 나오게 할 것이라는 점을 본능적으로 알고 있었다"고 지적했다.
부시 대통령과 주변의 네오콘들은 한마디로 통찰력이 부족했다. 그들은 아버지 부시가 1991년 걸프전쟁 때 쿠웨이트에서 이라크 군을 손쉽게 내쫓고도 바그다드로 진군하지 않았던 이유를 깊이 생각하지 않았다. 되레 네오콘 핵심인 폴 울포위츠 세계은행 총재 같은 사람들은 "걸프전쟁 때 바그다드로 진격하지 않았던 것은 희대의 실수"라고 생각했다.
부시 대통령이 전비 지출법안에 거부권을 행사하자 미 민주당의 예비 대선 후보들은 벌떼같이 일어났다. 이제는 인기가 형편없는 '부시 때리기'는 대선 전략상 효과 만점이다. 특히 힐러리 클린턴 의원의 비난 강도가 제일 셌다.
그는 부시 대통령의 거부권 행사를 "미국 역사상 가장 수치스러운 일화의 하나"라고 비난하면서 자신의 공식 홈페이지(http://www.hillaryclinton.com)에 링컨호의 함교에 걸려있던 '임무 완료' 플래카드를 찍은 사진을 대문짝만하게 걸어놓았다.
그런데 이런 힐러리 의원은 정작 이라크 전쟁에 전적으로 찬성했던 인물이다. AP통신은 1일 "(부시 대통령의 거부권 행사를 비판하고 있는) 존 에드워즈 전 상원의원, 조셉 바이든 의원, 크리스 도드 의원 등 민주당의 주요 대선 후보들은 모두 이라크 전쟁에 찬성했다"며 "대부분 찬성표를 던진 것을 후회한다고 말했으나 클린턴 의원만은 그것이 실수였다는 것을 인정하지 않고 있다"고 꼬집었다.
이 통신은 "(이라크 전쟁을 비판했던) 배럭 오바마 의원은 유권자들에게 자신이 전쟁에 반대했었다는 것을 다시 환기시킬 기회를 잡았다"고 지적했다.
한국의 대선 주자들 얼마나 통찰력 있나
오바마 의원은 최근 상승세다. 지난달 23~26일 라스무센 리포트의 전화여론조사 결과 오바마 의원은 32%의 지지를 얻어 30%에 그친 힐러리 의원을 처음으로 앞섰다. 힐러리 의원이 고전을 면치 못하는 이유는 여러 가지 있는데, 이라크 전쟁에 찬성했던 전력은 상당히 치명적이다.
이는 특히 전쟁에 반대했던 오바마 의원과 늘 비교되는 단골 메뉴다.
힐러리 의원이 이라크 전쟁에 찬성했던 이유는 간단하다. 당시 미국인들의 전쟁 찬성률은 70%가 넘었고 대중 정치인이 이런 분위기를 거부하기는 힘들었을 것이다. 이후 이라크 전쟁 지지율이 30%선으로 떨어지자 힐러리 의원은 말을 바꿨다. 약아빠지고 계산적이라는 힐러리의 이미지는 더 부각된다. 결국 힐러리 의원 역시 사물의 본질을 꿰뚫어보는 통찰력은 없었고 오늘날 그 대가를 치르고 있는 셈이다.
이게 미국만의 얘기일까?
자이툰 부대는 이제 한국에서 잊힌 군대가 돼버렸다. 미국에서 실패한 전쟁으로 거의 결론 났는데도 파병은 올바른 선택이었다고 주장하고 있는 청와대나 이라크에 간 자이툰 부대에는 아예 관심을 끄고 있는 여야의 주요 대권 주자들 역시 통찰력이 형편없기는 마찬가지다.
지난해 북한 핵 실험 뒤 '본때를 보여줘야 한다'고 큰소리치다가 미국의 확 바뀐 태도에 당황하는 사람들 역시 불과 몇 개월 뒤를 내다볼 수 있는 통찰력도 없었다. 그런데 이런 사람들은 대개 반대편을 향해 "국제 정세에 무지", "미국을 모른다"고 비난한다.
정세현 전 통일부 장관은 지난 3월 서울정책재단의 초청 강연에서 "차기 대통령은 '경제 대통령'이 아니라 '외교·안보 대통령'이 나와야 한다"고 주장했다.
"앞으로 5년 동안 한반도의 운명이 결정된다. 경제가 중요하면 중요할수록 외교·안보 대통령이 나와야 한다. 미국과 북한을 상대로 하는 문제는 미국과 북한한테 물어볼 수도 없고 여론조사도 할 수 없다, 대통령이 예지를 가지고 외로운 결단을 내려야 하는 경우가 상당히 많다. 이 분야에 대해 기본적 소양이 높아야 하고, 전문가들의 얘기를 듣고 무엇이 올바른지 판단할 수 있는 지적(intelligent)인 분이 대통령이 되어야 한다"
강대국이 득실대는 동북아에서 생존하기 위해서 한국의 지도자에게는 무엇보다 외교·안보 분야에 대한 통찰력이 요구된다. 자천 타천으로 올 해 대선 주자로 거론되는 인물들 가운데 이런 미덕을 갖춘 사람은 과연 몇 명이나 될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