첫째는 전북대 대형 강의실의 모습이다. 몇 십억의 예산이 들어간 건물을 지으면서 엘리베이터나 여러 가지 편의시설을 둔 점은 좋은 일이다. 그러나 장애인에게 시설에 접근할 수 있는 가능성은 학생에게 가장 중요할 시설인 강의실의 맨 뒷좌석에도 미치지 못한다. 강의실의 통로가 모두 계단이다.
다른 이의 도움을 받지 못하면 뒷자리에마저 앉을 수 없게 되어 있다. 휠체어를 타고 다니는 학생이 필자의 강의 중에 맨 뒤에 앉아 듣길래 시설을 이용하는 데 큰 불편은 없는 줄 알았다. 그러나 그게 아니었다.
중간고사를 보던 날 이 학생은 늦게까지 답안을 작성하고 나가려는데 도와줄 사람이 없어 맨 뒷자리의 계단 하나를 넘지 못하고 휠체어가 뒤로 후퇴하려는 것이었다. 위험한 상황이었다. 이런 시설이 만들어진 것은 예산의 부족 때문이 아니다. 시설을 누가 사용하는지를 제대로 모르고 또 고려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장애인의 인권상황을 잘 느끼지 못하기 때문이다.
둘째, 도로에 설치된 장애인 유도블럭이다. 요즘 도로 곳곳에 이런 블록이 깔려 있다. 실제 이용하는 사람은 많지 않지만 그래도 수와 상관없이 이런 시설을 설치하도록 하는 것은 장애인정책의 진전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이런 장애인 유도블록이 무슨 의미인지를 읽지 못하고 그 위에 자동차 진입금지 말뚝을 박아 놓은 곳이 적지 않다. 이걸 설치한 사람이 얼마나 무감각한지는 두말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 (그래도 약간 비켜서 말뚝을 세운 것에 위로를 받아야 할지 모르겠다.)
위의 사진에서 보듯이 장애인을 위한다고 이동 턱을 없앤 것은 좋은데 그 길목에 말뚝이라니.
셋째, 지하도 문제이다. 지하도는 보행에 불편을 느끼지 못하는 사람도 다니기가 쉽지 않은 길이다. 지상으로는 차들이 질주하고 사람은 지하의 어두운 길을 걸어 오르락내리락 하는 것도 마땅치 않지만, 보행마저 불편한 사람들에 대한 배려 없이 지하도만 설치한 곳도 무척 많은 것이 현실이다.
과연 지상으로 보행통로를 만든다고 얼마나 교통이 혼잡해질까? 보행용 지하도보다는 지하차량통로를 만드는 것을 먼저 고려하지 못하는가? 그게 과연 비용 때문 만일까? 서울 거리에 몇 년 사이에 지하도를 두고도 보행자 횡단보도가 늘어난 것을 보면 예산문제라기보다는 정책방향의 문제라 할 수 있다고 생각된다.
이런 사례는 심심찮게 겪는 문제이다. 필자는 위 사진의 모습을 몇 년 전에 보았다. 이 사진을 찍으려고 기억을 되살려 그 장소에 갔는데 전혀 변함이 없이 그대로였다. 일단 처음에 시설이 설치되면 웬만해서는 변하지 않음을 말해주는 대목이다.
장애인들에게 편한 것은 장애를 갖고 있지 않은 이들에게도 편한 법이다. 강의실에서 적어도 한 통로라도 계단을 없애고, 길 가운데 박혀 있는 말뚝을 뽑으면 누구에게나 걷고 이동하기 편한 길이 될 것이다. 차량을 막는 것은 다른 방법으로도 어렵지 않을 것이다.
우리들에게 중요한 것은 이러한 모습에서 인권이 어떻게 침해되고 있는지는 민감하게 느끼고 그 구제를 위해서 어떠한 방안이 택하여져야 하는지를 진지하게 고민하는 것이다. 특히 국민에게 가장 큰 영향을 미치는 것은 공무원이기에 공무원들의 인권의식 또는 인권감수성은 아무리 강조하여도 지나치지 않을 것이다. 또한 공무원마다 그러한 감수성과 의식의 차이가 있으므로 최대한의 기준을 업무 매뉴얼로 만들어 모든 공무원이 업무를 수행할 때 따르도록 한다면 상당 부분 문제해결에 도움이 될 수 있을 것이다.
같은 돈을 들여도 엄청나게 좋은 건물을 지어 다른 학교의 벤치마킹의 대상이 되는가 하면 준공하고 나서 줄곧 부실공사와 불편만 나타나는 곳도 있다. 국민의 세금으로 이뤄진 국가와 지방자치단체의 시설물은 제발 사회의 가장 약한 자에게도 편리한 것이 되었으면 좋겠다. 단지 예산의 부족만은 아니다. 근본적인 사고의 방향과 애정이 문제라고 생각한다.
덧붙이는 글 | 이 기사를 쓴 송기춘 교수는 전북대에서 헌법을 가르치고 있습니다. 이 기사는 인권연대 웹진 주간 <사람소리>에도 실렸습니다. 오마이뉴스는 직접 작성한 글에 한해 중복 게재를 허용하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