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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ont color=a77a2>[왼쪽] 스트랜드 서점 전경. <font color=a77a2>[오른쪽] <어린 왕자> 등 오래된 서적도 전시돼 있다.
[왼쪽] 스트랜드 서점 전경. [오른쪽] <어린 왕자> 등 오래된 서적도 전시돼 있다. ⓒ 하승창

뉴욕 시내엔 여기저기 헌책을 파는 곳이 제법 있다.

브로드웨이 14번가 주변인 뉴욕대학교와 뉴스쿨 대학교 주변을 어슬렁거리다 보면 심심치 않게 헌책방을 만나게 된다. 그 중에 유니언 스퀘어에서 멀지 않은 12번가 브로드웨이에 가면 매장이 크고 대중적으로도 잘 알려진 헌책방인 스트랜드(STRAND)가 있다.

20년전 청계천, 시위 갔지만 "헌 책 사러 왔어요"

내 기억 속의 헌책방은 청계천에 있다. 줄지어 선 헌책방 사이로 걸으며 데이트도 하고 책도 사던 기억이 있다. 1984년이던가 청계노조합법화 시위에 참가했다가 잡혔는데, 끝까지 헌 책 사러 나왔다가 잡혔다고 우겨서 훈방되어 나온 적도 있다.

나이 들어서는 딸아이에게 문학전집류 사준다고 식구들이 함께 나가서 황석영의 <삼국지>며 박경리의 <토지>며 등을 사들고 들어오기도 했다.

그러나 청계천을 덮었던 시커먼 아스팔트가 벗겨지고 난 후에는 아직 헌책방에 가보지를 못했다.

청계천은 지금 어떻게 되어 있을까? 내게 이런 기억이 있다는 것은 우리 헌책방도 사람들이 즐겨 찾는 추억과 기억의 장소로 만들 수 있다는 의미는 아닐까?

<시민의 신문>에 연재되었던 최종규씨의 헌책방 이야기는 아쉽게도 시민의신문 홈페이지가 폐쇄되는 바람에 다시 읽을 수는 없지만, 헌책방이 전국 곳곳에 알토란같이 박혀 있음을 알 수 있다. 최종규씨도 헌책방은 단지 헌 책만을 파는 곳이 아니라고 말했던 것 같다.

1500여평 공간에 빼곡히 책, 책, 책

서점 구석에 쌓여있는 책들.
서점 구석에 쌓여있는 책들. ⓒ 하승창
하여간 스트랜드는 스스로 말하고 있듯이 18만 마일의 책이 있는 곳이다.

서점 밖에서 보면 2층과 3층 유리창으로 보이는 것처럼 책들이 빼곡히 쌓여있다. 지하1층에서 지상 3층까지 매장이 책으로 꽉 차 있다. 헌책방이 이런 정도 크기가 되면 정말 대단하지 않을 수 없다.

매장 크기가 55000 스퀘어피트라고 하니 우리 식으로 하면 1500평이 좀 넘는 건가? 과장해서 말하면, 마치 우리 청계천 헌책방들을 묶어서 하나의 서점으로 만들어 버린 것처럼 느껴진다.

서점에 들어서면 마치 슈퍼마켓에 온 것처럼 바퀴달린 장바구니·쇼핑카트가 줄지어 있다. 아마도 대개 책을 한 권 두 권 사는 것이 아니라 여러 권을 사는 게 보통이니까 아예 카트를 준비해놓은 것이다.

청계천 우리 헌책방에 들러도 새 책을 살 수 있듯이 여기도 마찬가지다. 출판사에서 팔리지 않고 넘어오는 책들 말이다.

서점은 손님과 직원들로 북적거렸다. 지하 매장 철학코너와 사회학코너에서 오래 된 책들을 발견했다. 1900년에 뉴욕에서 발간된 몽테스키외의 <법의 정신>이 제목도 잘 안보일 정도로 낡은 모습으로 꽂혀있다.

48센트부터 1000불까지, 새 책부터 희귀본까지

1927년 발간된 칸트의 <순수이성비판>도 보인다. 함께 간 후배는 잘도 찾아낸다. 그 친구는 칸트의 책을 손에 넣었다.

혹시 마르크스의 책들이 있을까 싶어 이 코너 저 코너 뒤져봤는데 보이지 않고 레닌의 글을 몇 개 모은 책은 눈에 들어온다. 미국에서는 마르크스에 대한 관심이 그다지 크지는 않았나 보다.

오래된 책에서 나는 특유의 냄새와 먼지 때문에 나는 연신 기침이 나오는데, 다른 사람들은 괜찮은 것인지 익숙한 것인지 기침을 하는 사람들이 별로 없다.

희귀본이 진열되어 있는 곳이라는 얘기를 듣고 3층으로 올라갔다. 그 곳은 정말 오래된 책에서 발산되는 특유의 케케묵은 냄새가 심한 곳이었다.

어린 왕자 초판 2쇄가 225불이라고 가격이 매겨져 진열되어 있다. 마치 책 박물관처럼 유리로 덮여져 진열돼 있고 가격은 대부분 1000불이 넘었다. 눈요기는 해도 직접 돈을 지불하고 내 것으로 만들기에는 부담스런 가격이다. 도서 수집이 취미거나 관련한 연구자가 아니라면 말이다.

미처 진열되지 못한 책이 여기저기 쌓여 있고 직원들은 이런 책을 정리하느라 바쁘다.

서점 밖에는 1불짜리 책들이 진열되어 있다. 몇 년 전에 미국에 왔을 때 어느 마을 도서관에서 1불을 주고 미국시민단체에 관한 연구서적을 산 기억이 있어서 혹시나 해서 또 둘러봤지만 오늘은 특별히 눈에 띄는 것이 없다. 한 쪽에는 48센트짜리 책도 있다.

3대째 이어진 가업, 8만마일에서 18만마일로

서점 내부 모습.
서점 내부 모습. ⓒ 하승창
스트랜드 서점은 3대째 운영되는 서점이다. 대를 이어 서점을 하는 경우가 드문 우리와는 다른 모습이다. 또 헌책방은 나이 지긋한 노인들이 지키고 있는 우리와는 달리 스트랜드는 할아버지 벤자민 베스, 아버지 프레드 베스, 그리고 지금의 딸 낸시 베스 이렇게 3대째 한 집안이 운영하면서 성장을 계속해 왔다.

처음부터 이렇게 큰 서점은 아니었다. 1927년 시작할 때는 지금의 위치가 아니었고 당시 뉴욕의 헌책방들이 몰려 있던 4번가 북로우(book row)라는 곳에서 많은 헌책방 중의 하나로 시작했다.

헌 책이라면 무조건 사들였던 스트랜드. 풀리처상을 수상했던 저널리스트 조지 F. 윌이 스트랜드 서점을 지칭하면서 '8만마일의 책'이라는 말을 사용했는데, 이제는 '18만마일'이니까 그간 얼마만큼 성장했는지 짐작할 수 있다. 북로우 거리에 있던 48개의 헌 책방 중 지금은 스트랜드만이 남아 있다고 한다.

우리는 헌책방에 갈 때 대개 구입할 책을 염두에 두는데(물론 그저 뒤지다가 눈에 띄는 책을 사는 사람도 있겠지만), 여기서는 반드시 그렇지 않아도 되는 것 같다.

우리의 경우 헌 책방에 가서 무슨 책을 달라고 하면 주인장이 어디선가 그 많은 책들 사이에서 쑥 뽑아주곤 해 그 신기의 기억력에 감탄할 때가 많은 데 여기서는 분야별로 분류가 되어 있어 자기 관심 분야의 코너에서 열심히 뒤지면 된다.

난 철학과 사회과학 코너와 연극코너를 뒤져서 5권의 책을 샀다. 100불.

1900년에 발간된 책이 30불이고 2004년 발간된 책이 20불이 조금 넘었으니까, 다른 책들은 10불 내지 15불 정도의 가격에 구입한 셈이다. 지난번 소호 북카페에서 구입한 가격보다는 다소 비싼 편이다. 물론 소설책들은 훨씬 싸다.

뉴욕에서 청계천 헌책방을 그리워하다

우리 헌 책방에서 느낄 수 있는 따뜻함이나 추억이 느껴지지는 않지만 이곳은 헌 책방이 갖는 낡고 오래된 이미지 대신에 현대화된 시스템으로 소비자들을 끌어당기고 있다.

이들은 스트랜드 로고가 있는 티셔츠와 가방·노트 등도 만들어 팔고 있다. 또 도서관에 대한 서비스, 희귀본 전시나 '도서와 서재 꾸며주기(스티븐 스필버그의 서재를 꾸며주고 돈 벌었다고 한다)' 같은 관련 사업을 통해 벌어 들이는 돈도 만만치 않은 모양이다.

오래 된 책이라면 다 여기 있다는 이미지를 만들어 가면서 훌륭한 관광 명소로도 만들어 관광객마저 흡입하고 있는 스트랜드를 보면서, 청계천에 있는 우리 헌책방의 모습이 궁금해진다.

청계천이 개발식 복원이 아니라 생태와 문화를 염두에 둔 복원이었다면 당연히 이 서점들에 대한 구상도 있었을 것 같은데, 과연 그리했는지 말이다.

나는 스트랜드를 보면서 청계천 그 헌책방들을 그리워하고 있다.

뉴욕의 스트랜드 서점은 '낡고 오래된' 이미지가 없었다. 사진은 서울 신촌의 어느 헌책방.
뉴욕의 스트랜드 서점은 '낡고 오래된' 이미지가 없었다. 사진은 서울 신촌의 어느 헌책방. ⓒ 정윤수

#헌책방#뉴욕#하승창#청계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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