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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은 누구라도 인생이라는 강(江)을 건넌다. 그런데 누군가는 그 인생의 강을 매양 순풍에 돛을 단 듯 순항(順航)하는가 하면 또 누군가는 늘 그렇게 모진 폭풍우에 시달리며 악전고투를 반복하기도 한다.

그렇다면 나의 경우엔 후자에 속하는 삶을 살아왔다 해도 과언이 아니리라.

지난 1950년대 말의 엄동설한에 출생한 나는 애당초 가난하게, 그리고 불행까지를 떠안으며 태어났다. 그건 우선 내가 고작 첫돌을 즈음한 무렵에 그만 생모를 잃었다는 사실이다.

나의 유년기부터 아버지의 상투적이고 고질적인 음주벽은 여전하셨다. 술을 한 번 입에 댔다 하면 통상 보름 내지는 20일 이상이나 조석으로 마셔대는 술로 인해 아버지는 서서히 무너져갔다.

여하튼 그 와중에 나도 나이가 차 입학 적령기가 되었다. 국민(초등)학교에 들어갔는데 다행히 머리가 좋았던지 아님 공부를 즐겼던지 어쨌든 반에서 줄곧 1-3등을 질주하는 우등생으로 자리매김했다.

그렇지만 나는 중학교에도 진학하지 못 하는 또 다른 불운을 만나야만 했다. 거듭되는 폭음으로 인해 건강과 정신마저 더욱 황폐해 지신 아버지는 이제 더 이상 가장이 아니었다.

내가 벌지 않으면 당장의 끼니거리조차 장만하기 힘들었다. 나는 그래서 초등학교 졸업 이전부터 실질적인 소년가장이 되었다.

처음엔 고향인 천안역 앞에서 구두닦이를 했다. 그러다가 시외버스 정류장의 행상을 했는가 하면 공사장의 노동도 모자라 별의별 궁상맞고 험한 직업을 두루 경험했다.

당시는 나와 같은 편부나 편모 슬하의 가난한 자제는 겨우 초졸 학력만으로 생업의 방편을 모색해야 하는 냉혹하고 살벌한 시기였다.

그래서 여자들은 방적공장 내지는 버스안내양(차장) 등으로, 남자들은 양복 일을 배우든가 철공소와 이발소 등지에 취직을 하는 경우도 많았다.

하지만 그처럼 장래 벌어먹고 살 '기술을 배우는 것'도 실은 일정기간 부모 혹은 형제간의 어떤 유기적인 경제적 도움과 지원이 부재하면 퍽이나 힘이 들었다. 당장의 호구지책이 급선무였음에 내게 또래들처럼 양복과 이발 기술을 배울 짬조차도 호사였다.

어쨌든 극빈의 나날은 여전했다. 당시는 자정이 넘으면 통행금지가 엄격하게 실시되던 냉혹한 즈음이었다.

하지만 만취하시면 낮과 밤의 구분과 경계마저 잊어버리시는 아버지의 관념에 통행금지는 아예 존재치 아니 했다.

새벽 1시든 2시든 간에 자고 있던 날 깨우신 아버지의 의도는 명확했다. 그건 바로 동네에 하나뿐인 구멍가게에 가서 소주를 사 오라는 것이었다.

그렇지만 그러한 아버지의 술 심부름이 가장 괴로운 건 바로 나였다. 모두가 잠든 한밤중임에도 자고있던 날 깨워 술을 사 오라고 하시면 정말이지 미치고 팔딱 뛸 노릇이었다.

늘 외상 술임에 동네서 하나 뿐이었던 구멍가게의 주인도 지쳐 아예 내다보지도 않았으니 대책이 없었다.

그 때부터 아버지께서 심야에 술 심부름을 시키시면 밖으로 나가 아예 남의 집 마루 밑에 기어 들어가 모자란 잠을 때웠다.

그러자면 때론 새파란 불을 양 눈에 켠 고양이가 스며드는가 하면 쥐들도 무시로 들락거려 소름이 끼치기 다반사였다.

그럴 적마다 아버지가 아니라 차라리 원수라고 생각했고 아울러 너무도 일찍 우리 부자(父子)를 떠난 어머니에겐 극심한 저주의 화살까지 무수히 날려보냈다.

하여간 그렇게 간난신고의 나날을 점철하던 중의 어느 날이었다. 그 날도 만취하신 아버지는 다시금 새벽에 날 깨우셨다. 헌데 그때부터가 아버지에 대한 나의 반항기가 시작되는 즈음이지 싶었다. 나는 평소완 사뭇 다르게 아버지께 거칠게 항의했다.

"또 술 사 오라구유?"
"그래."

하지만 나는 그날따라 완강하게 아버지의 술 심부름에 강력히 저항했다.

"싫어유! 돈도 안 주시면서 왜 만날 외상술 타령이세유? 그리고 이젠 제발 그 술 좀 끊으세유!"

그러나 아버지는 여전하셨다.

"난 술 없으면 못 산다. 잔소리말고 냉큼 다녀 왓!"

어쩔 수 없이 집을 나온 나는 하지만 그 길로 또 다시 어떤 집의 마루 밑으로 기어 들어갔다. 거기서 뜬눈으로 밤을 새며 이를 갈았다. 그리곤 다짐했고 작심했다. 아버지와는 다시는 함께 살지 않으리라고!

그래서 이튿날부터는 아예 집에도 안 들어가고 친구와 아버지의 지인들을 찾아다니며 하소연과 거짓말을 병행했다. 친구들에겐 서울로 가서 돈을 벌어올 거라며 돈을 꿨고 아버지의 지인들께는 아버지가 꿔 달라고 했다고 거짓말을 해 얼마간의 돈을 모았다.

그 돈을 지니고 초등학교 선배가 일전 구정(설날)에 고향에 왔다가 날 봤을 때 알려준 서울의 약수동 누나네 집 주소와 전화번호가 적힌 종이를 꺼내들었다.

서울로 전화를 하여 나의 신분을 밝히자 대뜸 반가워하신 선배의 누님께선 하지만 걱정부터 입에 다셨다.

"네가 굳이 돈을 벌러 서울로 온다는 건 이해가 되지만 네 아버지는 그럼 어떡하려고?"

하지만 이미 모질게 작심했던 나는 무슨 수를 써서라도 내 비참함만이 가득한 고향을, 그리고 아버지의 곁에서도 탈출하고만 싶었다.

▲ 천안역에서 찍은 제 사진입니다.
서울행 완행열차에 올랐다. 이제 다시는 만나지 못 할 것만 야속한 아버지가 하지만 열차의 차창 밖으론 가련함의 실루엣으로 오버랩 되었다.

나도 모르게 와락 눈물이 쏟아졌다.
'아버지, 용서하세유. 그리고 부디 안녕히 계세유. 제가 돈 많이 벌어서 올 게유.'

서울역에서 만난 선배를 쫓아 약수동 선배 누나집으로 갔다. 선배의 방에서 자고 먹은 뒤 이틀 후부터 인천 제물포 역 뒤에 있는 냄비공장에 취직했다.

아침 일찍부터 깜깜한 밤이 되도록 모진 노동력을 필요로 했던 그 공장에선 냄비 외에도 주전자와 이런저런 주물 제품도 다량으로 만들었다.

밥은 넉넉하게 줬지만 좁은 잠자리가 문제였다. 열대여섯 명이 칼잠으로 자야했기에 그런 때면 차라리 아버지만 계시는 집이 그리웠다.

하여간 이를 악물고 그 공장에서 시키는 대로 일을 했다. 헌데 열흘 쯤 일을 하던 때 그만 사고가 터졌다. 나보다 어린 아이가 일을 하다가 프레스 기계에 손이 끼어들어가 순식간에 장애인이 된 것이다.

죽는다고 악을 쓰는 그 아이를 업고 공장의 어른들이 혼비백산으로 뛰쳐나갔다. 하지만 그 모습을 본 나는 무서워서 도무지 일을 할 수 없었다.

이후로도 크고 작은 산재가 잇따랐다. 나는 거기서 더 있다간 내 명에 못 죽을 것 같아 마음을 돌렸다. 집으로 돌아가기로.

미우나 고우나 그래도 아버지가 계시는 내 집과 고향이 이보단 훨씬 낫겠지 싶었다.
보름 이상 일한 일당을 셈하여 받고 서울역으로 다시 나왔다. 약수동의 누님께 전화해 집에 간다고 했더니 잘 했다며 명절 때 보자고 하셨다.

열차는 한참 뒤 이를 악물며 서울행 완행열차에 올랐던 천안역에 나를 내려놓았다. 하지만 아버지가 무서워 한참을 역전 부근에서 배회해야 했다. 그러다가 어차피 맞을 매라면 피할 수 없다는 생각에 호두과자를 사 들고 집으로 갔다.

누추한 우리집 문지방을 도둑고양이처럼 기어들어가 문틈으로 살펴보니 아버지께선 책을 보고 계셨다. 술도 안 드신 말끔한 차림이셨기에 용기를 냈다.

"아버지, 저예유..."

순간 와락 문이 열리면서 아버지께선 '버선발'로 뛰쳐나오시며 날 부둥켜 안으셨다.

"아이구, 이놈아. 어딜 갔다 지금 오는 겨?"

아버지께선 날마다 동구 밖까지 나가시어 이제나저제나 내가 돌아오기만을 오매불망 학수고대하셨다고 하셨다. 다시는 가출 않겠다고 용서를 빌자 아버지께서도 이젠 술을 끊겠다고 하셨다. 그러나 그 약속 역시나 작심삼일이었다.

이러구러 세월은 여류하여 아버지는 진작에 작고하셨고 나는 지천명의 초입에 와 있다. 과거엔 그토록이나 나의 애간장을 태우게 하셨으며 원망의 대상으로까지 각인되었던 분이 바로 나의 아버지다.

하지만 당신께서 떠나신 지가 어언 20년도 넘고 보니 때론 사무치게 그리운 때도 많다. 지금껏 살아 계셨더라면 휴일마다 목욕탕으로 모시고 가 등을 밀어드렸을 게고 지난 벚꽃축제 땐 의당 신탄진에도 모시고 갔을 터였다.

이제는 뵐 수 없는 아버지. 그러나 지금도 천안역을 지나치자면 그 시절 아버지를 피해 달아났던 이 철부지 아들의 못 됐던 작정 가출의 소행이 떠올라 선친께 묵직한 죄스러움을 금할 길 없다.

덧붙이는 글 | <철도와 함께 떠나는 여행> 응모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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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저서: [초경서반]&[사자성어는 인생 플랫폼]&[사자성어를 알면 성공이 보인다]&[경비원 홍키호테] 저자 / ▣ 대전자원봉사센터 기자단 단장 ▣ 月刊 [청풍] 편집위원 ▣ 대전시청 명예기자 ▣ [중도일보] 칼럼니스트 ▣ 한국해외문화협회 감사 / ▣ 한남대학교 경영대학원 최고경영자과정(CEO) 수강 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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