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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스터리'가 죽었다. 그리고 <고맙습니다>가 끝났다. 드라마를 즐겨 보지 않는 내가 시간을 기다리며 보던 드문 드라마가 끝이 났다. 마지막회에서 등장인물들 누구랄 것도 없이 연방 "고맙습니다"를 말하던 그 드라마는 죽음으로 시작해 죽음으로 끝난 것이나 다름없다.
봄이가 에이즈에 걸리게 된 이유를 제공한 민기서(장혁)의 애인 차지민(최강희)이 죽고 이에 상심한 기서가 의사라는 직업에 환멸을 느끼며 시작하더니, 푸른도에 다시 돌아온 기서가 미스터리를 대신해 초코파이를 집집이 사람마다 밤을 새워 나눠주고 미스터리가 죽으며 끝났다. 처음과 끝을 비교해 보면 죽음을 대하는 기서의 태도가 사뭇 달라져 있음을 느낀다.
우연히 얼마 전 <병원에서 죽는다는 것>이라는 책을 읽었다. 저자는 야마자키 후미오라는 일본의 외과 의사다. 수년간 말기암 환자를 비롯해 삶과 죽음의 기로에 선 많은 환자들을 치료해 온 저자는 피할 수 없는 환자들의 죽음을 겪으며 현대의학이 죽음에 직면한 사람에게 해줄 수 있는 것과 없는 것의 딜레마를 경험한다.
그리고 강력히 권고한다. 병원에서 죽지 말라고. 병원에서 시행하는 연명소생술에 수 시간의 수명을 연장시키기 보다는 편안하고 준비된 공간에서 생명의 마지막 순간을 맞이하라고.
가족이 회복 불가능한 병을 얻어 삶과 죽음을 다투는 시기에 병원에 있어본 사람은 의사들이 "이만 퇴원하십시오"라고 말할 때 얼마나 야속하고 막막한지, 아니 얼마나 세상이 무너져 내리는 심정인지 알 것이다. 객사를 불행한 죽음으로 여기는 한국인의 정서로도 병원에서 포기한 상태가 되었다는 것이 매우 절망적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의사도 죽음을 영원히 유예시킬 수는 없다. 가족들의 절망보다 더 큰 딜레마가 여기에 존재한다. 의사가 되려고 힘든 공부를 택한 사람들은 대부분 사람을 병에서 구하고 살리는 고귀한 일에 대한 자부심과 사명감을 갖는다. 하지만 사람을 살림으로써 보람을 느끼는 순간 못지않게 자신의 능력으로 어찌할 수 없는 죽음의 순간 또한 맞아야 한다. 사람을 살리기 위해서 이 일을 시작했는데 살리지 못하고 죽어가는 사람들을 지켜보아야 한다. 살리고자 한 일인데 죽이고 있다. "너, 사람 죽이는 깡패야? 사람 살리는 의사야?"
기서가 어렵게 공부해서 얻은 의사직을 던져버리려고 하는 혼란의 핵심에도 이 딜레마가 존재한다. 단지 췌장암에 걸린 애인 지민을 직접 수술하고도 그녀의 죽음을 봐야 하는 상처만이 아니라 더 오래전 아버지가 의사직을 버리게 된 어떤 사건이 있었다. 그것은 안락사의 문제이다.
기서의 아버지 민준호(길용우)도 의사였다. 고아원 출신으로 의사가 된 아버지는 같은 고아원에서 함께 자란 누님의 안락사를 도왔다. 그래서 (민기서) "살인자로 몰리고 세상으로부터 손가락질당하고 의사직도 잃고 이혼당하고 딸도 죽고 아들은 이 꼴이 되었"고 자신은 택시 기사를 하는 처지가 되었다.
기서는 "살려내라"고 절규하는 환자 가족의 거센 항의를 묵묵히 받아내던 아버지의 모습을 보고 크게 충격을 받았다. 살리는 자가 아니라 죽이는 자가 되어버린 아버지를 본 후 기서는 아버지에 대한 콤플렉스를 가지게 된 것이다.
그 콤플렉스는 기서가 치료하던 푸른도의 한 주민이 소생하지 못하고 죽게 되자 오해를 받아 살인 혐의로 경찰서에서 조사를 받을 때 표면에 드러난다. 이것은 특정한 한 부자(父子)의 사연이 아니라 의사라는, 특히 외과의사라는 직업이 필연적으로 갖게 되는 딜레마이며, 기서는 그 딜레마를 정면으로 맞서지 못했기 때문에 상흔처럼 콤플렉스로 남게 된 것이다.
[아버지] "난 최선을 다했다."
[민기서] "환자를 안락사시키는 것이 최선이라구요?"
[아버지] "고통받지 말고 편히 쉬라고 내 손으로 보내주고 싶었다."
민기서는 아버지의 뜻에 수긍하지 않는다. 그런 상태로 푸른도에 첫 발을 디뎠다. 그리고 살인 혐의로 조사를 받은 직후 다시 푸른도를 떠난다. 의사로서의 딜레마에서 벗어나고자 의술의 현장에서 벗어나 온 곳이 푸른도였지만, 사람의 생과 죽음은 때와 장소를 가리지 않는다. 당연히 푸른도에서도 죽음의 문제를 대하게 된 의사 기서는 여전히 딜레마를 해결하지 못하고 다시 회피한다. 서울에 돌아가서 의사가 아니라 어머니의 사업을 돕게 된다.
그런데 서울이건 푸른도건 의술을 편다는 것에 회의를 느낀 기서는 왜 다시 푸른도에 돌아왔을까? 자신의 꿈과 소망을 온통 혼돈의 도가니에 빠뜨린 의사라는 직업을 버린 채 살아가면 적어도 그 혼돈에 사로잡힌 채 침몰하는 것만은 막을 수 있을 텐데, 왜 다시 푸른도에 돌아와야 했을까?
그것이 민기서의 숙명일까? 사람에게 죽음이 언젠가는 맞이해야 할 숙명인 것처럼, 아버지가 말하듯 "너는 의사가 천직인 놈이야. 이 애비와는 비교도 안 되게 따뜻한 가슴을 가진" 민기서가 다시 정면으로 마주 서서 딜레마를 목도해야 하는 숙명의 현장이었다고 할까.
민기서가 푸른도로 돌아온 후에 본격적으로 봄이의 에이즈 보균 사실이 부각된다. 한 마디로 민기서를 변화시킨 것은 봄이와 영신이다. 에이즈라는 병, 그것은 생물학적인 죽음의 두려움보다 사회적인 죽음의 억울함과 비참함이 더 견디기 힘든 고통이다.
<고맙습니다>는 많은 사람들에게 잔잔하게 감동을 주면서 강렬한 사회적 이슈를 던지고 있는데, 그것은 바로 에이즈 환자 및 HIV 보균자에 대한 잘못된 정보와 사회적 편견에 관한 것이다.
사실 봄이는 환자가 아니다. 병에 걸린 상태가 아니라 병으로 나타날 수 있는 잠재적 보균자일 뿐이다. 그럼에도 우리가 드라마에서 마음 아프게 보았듯이 푸른도에서 학교도 다니지 못하고 이웃들의 눈총을 받으며 쫓겨날 위기를 맞게 되는 것이다.
기서는 많이 배웠고 부잣집 아들이며 의사라는 직업은 사회적 지위를 보장해준다. 영신이는 많이 못 배웠고 가난하고 부모도 없고 독신모인 것도 모자라 치매 노인까지 돌봐야 하는 몇 곱절 힘겨운 처지다. 기서는 따뜻한 마음을 가졌다고는 하나 언제나 자신이 베푸는 입장에 있어 왔다.
영신이 기서의 체온을 재려고 할 때 "내 몸은 내가 알아요"라고 윽박지르며 거부했던 기서는, 보건소 의사가 있음에도 베인 상처를 자신이 손수 꿰매는 기서는, 자신의 몸을 포함해서 다른 사람들의 몸과 인생까지 자신의 통제 하에 두어 왔던 사람이다.
그 능력에 대한 신뢰가 산산이 깨어진 후 목격하게 된 영신이와 봄이 모녀의 시련은 민기서를 성장시키는 계기가 되었다. 자신이 통제할 수 없는 죽음에 대한 것에 대해 겸허해지고, 통제되어서는 안 되는 힘에 의해 불의의 영향을 받는 것에 대해서는 저항하는 원초적인 힘을 발견하는 것이다.
"나한테 봄이랑 봄이 엄마가 뭐냐고 물었죠? 기적이요. 어떤 자식이 선물처럼 주고 간 기적이요." (민기서)
<병원에서 죽는다는 것>이라는 책을 읽은 지 얼마 되지 않은 때라서 그런가, 나는 에이즈에 대한 편견에 맞서 싸우는 봄이와 영신이, 시시때때로 갈등하며 가족의 의미와 유대를 깨달아가는 석현이와 석현 모, 모든 사람들의 마음에 고마운 감정의 선물을 전하고 안타깝게 죽는 미스터리.
그리고 비정한 사회의 편견을 보여주느라 집단적으로 닭대가리가 되었다가 다시 영신이와 봄이 모녀의 따뜻한 이웃으로 돌아온 푸른도 주민들, 병국이 오빠를 사모하던 절절한 마음의 미스 송씨, <고맙습니다>에 나오는 모든 인물들 하나하나가 애틋한 사연을 가지고 있지만, 무엇보다도 기서가 가진 딜레마와 혼돈의 시간들에 시선이 간다.
그가 의사라는 일을 버리려고 했을 때 자신이 전지전능한 능력이 있지 않음에 대해 화가 난 것이었다면, 다시 푸른도로 돌아와 섬 주민들의 아픈 몸을 헌신적으로 돌볼 때는 자신이 섬주민들 스스로 살아가고자 하는 능력을 일깨워주는 역할이라는 점을 알게 된 것이다. 봄이와 영신이가 사회적 죽음에 저항해서 살아가고자 애쓸 때 영신이와 봄이에게 당당함을 일깨워줄 수 있었던 것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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