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렇게 추워서 그리움조차 얼어붙은 마음의 풍경화 속에 그가 지은 집 한 채가 <바람의 사생활>인데, 그 집의 지붕은 비가 새어 방에 누운 사람은 누구나 '이마 한가운데로 한 방울 물이 떨어져 잠에서 깬다'. 또한 벽은 '긁힌 자국 여럿'이고 '깊다 못해 수차례 스치고 부딪친 한두 자리는 아예 음'하기까지 하다.
그가 지은 집은, 오래 머물면서 사는 따뜻한 가정집이 아니라 얼은 강물 아래 간신히 살아남은 물고기들이 '와서 부딪치며 한사코 집 안으로 들어와 참견하려' 하는 '강변 여인숙'인 것이다.
과연, 천장에서 '똑똑 떨어지는 물소리가 눈물 같은 밤', 그가 누운 방의 벽 너머 바로 옆방에 머물고 있는 사내가 전화를 걸어온다. '정말 미안하지만 이야기 좀 할 수 있을까요'라고. '뭘 기다리느라 혼자 열흘 남짓 여관방에서 지내고 있는데 쓸쓸하고 적적하다고'.
그러나 그는 '간다'하고는 가지 않는다. '그가 뭘 기다리는지 들어버려서 내가 무얼 기다리는지 말해버리면/ 바깥에서 뒹굴고 있을 나뭇잎들조차 구실이 없어질지도 모른다'고 그 이유를 댄다.
이렇게 그가 대화를 청해 오는 옆방의 사내를 모른척하는 이유는 '동유럽 종단열차'에서 맞은편의 동양 사내가 건네 오는 질문에 다만 '고개를 저을 뿐 그에게 왜 혼자냐고 묻지 않'는 이유와 동일한 것일진대, 그것은 삶은 언제 어디서나 '혼자인 것에 기대어 가고 있기에' 그런 물음과 대화가 덧없는 것이라는 것을 그가 잘 알고 있음이다.
이처럼 '무심히 당신 앞을 수천년을 흘'러가는 '바람의 습관들'을 그는 다만 '피의 일'일 뿐이라고 말하고 있지만, 과연 그럴까? 사실은 그는 사람들이 '내 깊은 불출(不出)의 골병을 아는 체하려 들 것'을 두려워하고 있는 것이 아닐까? '이를테면 내가 당신의 누구인지 모르는 것과/ 내가 누구인지조차 모르는 것,/ 알게 되면 그것을 잃는 일이므로 껴안고 있으면서도 모르는 것'이라고 짐짓 우기고 있는 것이 아닐까?
그래서 '남쪽으로 서른 세 걸음 봄날은' 가는데 '굳을 만하면 받치고 굳을 만하면 받치는 등 뒤의 일이 내 소관이 아닌 걸 비로소 알게' 된 그는, '한 시절 사람으로 태어나/ 한 사람에게 스민 전부를 잊을 수 있으면'이라고 제 그리움을 송두리째 부인하는 안타까운 소망을 품게 된 것은 아닐까?
그랬을 것이다. '당신이라는 제국'은 '혼자이다가 내 전생이다가 저 너머인' 존재인 것이어서, 백화점 정문에서 만나 저녁을 함께 먹는 나라는 당신은 '찬찬히 풀어놓을 법도 한 근황 대신 한 손으로 나를 막고 자꾸 밥을 떠넣고' 있을 뿐이다. '지난날을 지껄이지 않겠다는 생각으로 술을 담'그려고 시침 뗀 채 '앞으로 앞으로만 밀며 살자고 어두운 밤 병 하나 말갛게 씻'고 있을 뿐이다.
그래서 그가 지어 놓고 빈 채로 놓아두고 떠난 '강변 여인숙'의 어둡고 찬 방에서 열흘을 머물면서도, 나는 그가 떠난 것이 아니라 사실은 '그 벽 뒤에 살'고 있다는 것을, 그 벽 뒤에 숨어서 빈방을 두리번거리며 그의 행방을 찾고 그의 속내를 알아내려고 하는 나를 그리움 가득한 눈빛으로 쳐다보고 있다는 것을 쉽사리 눈치 채지 못했다. 시인의 말에서야 슬쩍 적어놓았듯이 사실은 그도 스친 자리가 그리웠고, 두고 온 자리가 그리웠고, 저 건너가 그리웠던 것이다.
보라. '집이 싫어 오래 한데로 떠돌았'던 그는 다시 집에 돌아와 '누군가 다녀간 온기'와 '허기를 채우고 화초를 안쓰러워하다' 간 '정겨운 흔적'을 그리워하고 있지 않은가! '새야 새야 얼른 와서 이 몸과 저 몸이 섞이며 몸을 마려워하는 병 속의 형편을 좀 들여다보아라'고 소망하고 있지 않은가! 가끔 그의 집에 쳐들어오는 치매 걸린 할아버지가 '언제나처럼 넌 누구냐 하며 들어왔지만 차라리 반가웠다'고 말하고 있지 않은가!
사실은 그는, 부탁을 받으면 언제나 돈을 부쳐주었으나 '돌아와서도 나에게 전화 한통 하지 않은 형에게/ 또 아주 먼 곳에서 돈이 떨어졌다며/ 자신을 데리러 와달라는 말을 듣고 싶은 것이다'. 그렇게 평소에는 무심하지만 결정적인 순간에는 자신에게 기대는 사람을 그는 그리워했던 것이다.
그런데도 그가 그 시절을 '설명할 수 없는 날들'이라고 부르면서 '내가 알거나 본 배후를 비비고 또 비벼서 아무것도 아니며 그 무엇이 되겠다는 듯 쌓이는 저 눈 풍경'처럼 막막한 문장으로만 그려내고 있는 것은 왜일까?
그것은 그의 그리움은 '누구나 한번 들어가면 나오지 못하는 사막'처럼 깊고 깊은 것이어서 '자꾸 뒤돌아보기보다는' 터널의 출구처럼 그의 시선이 가 닿는 저 멀리 앞에 보이는 '검고 고요한 저 소실점을 향해 가는 일'밖에는 어찌할 도리가 없음을 그가 알기 때문이리라.
'지구와 달의 거리가 지금보다 훨씬 가까워/ 달이 커 보였던 때/ 일년은 팔백일이었고 하루는 열한 시간이었을 때', 그렇게 오래전에, 그는 당신과 어쩔 수 없이 헤어지면서 그렇게 하기로 당신과 약속을 했던 것이다.
그런데 그 약속이 꿈꾸었던 소실점이 빛으로 환하고 희망으로 일렁이는 것이 아니라 검고 고요한 것은 무슨 연유인가? 그것은 다시 만나기로 한 당신을 그 소실점에서 만날 수 없음을 그가 알아차렸기 때문이다. '태초에 그 약속을 잊지 않으려/ 만물의 등짝에 일일이 그림자를 매달아놓았건만// 세상 모든 혈관 뒤에서 질질 끌리는' 당신은 내 약속을 잊었던 것이다.
그런데도 그는 당신을 힐난하지 않고 다만 잊고자 하는 것은, 굳은 야속을 했던 당신의 그 손가락이 '그 어두운 밤 서로를 생각하고 생각하느라' 그만 잘리고 말았음을 알기 때문이다.
약속을 상기시켜 줄 손가락이 없어서 당신은 약속을 잊은 것이고, 그러나 당신의 손가락이 잘린 것은 나를 생각하는 그리움에 넋 놓고 있다가 생긴 일이니, 결국 원망하고 비난할 사람은 당신이 아니라 나인 것이다!
이 자책감이 그로 하여금 제 그리움을 철저하게 부인하고 애써 숨기게 한다. 그래서, 추운 밤 얼어붙은 강물의 얼음 속에 죽어 있는 한 마리 고래처럼, 그의 가슴 속 그리움도 꽁꽁 얼었던 것이다. 그가 자신의 그리움의 정체를 끝내 밝히지 않은 이유가 여기에 있었던 것이다.
읽어보시고 마음에 드신다면, 한번쯤 들러서 묵어보시라
이병률 시인이 침묵 속에 감춰 둔 그 힘겨운 고백을 들어주느라, 아니 그가 살고 있는 벽 뒤에서 그 고백의 흔적들을 발견해내느라, 나는 그가 지은 집 '강변 여인숙'에서 열흘을 머물렀다. 여기에 '흰 칠을 하고 바람이 지나면 그림을 그리고 지워지면 다시 흰 칠을 하여 그림을 올리고' 해서 그려진 그의 그림은 수십 겹이어서, 그걸 복원해내느라 또 닷새를 더 지냈다. 그러니, 도합 보름을 머무른 셈이다. 한 권의 시집에 머무는 시간이 짧게는 이틀 길게는 일주일 정도인 나로서는 어지간히 장기 투숙이었던 셈이다.
무릇 한 권의 시집은 적게는 40편, 많게는 100여 편에 이르는 시들이 옹기종기 들어와 사는 집이다. 대개는 대문으로 삼아 맨 앞에 실은 서시가 가장 수작이고 이어서 좋은 시편들이 현관에 배치되고 시선이 많이 머무는 거실쯤에다가 또 몇 편 가작들을 골라 꽃병에 꽂아서 세워두는 것이 일반적이다. 문패 격인 시집의 제목이 되는 시는 의외로 안방의 화장대쯤에 놓여 있는 경우가 많다.
하지만 시집의 구조와 배치가 어찌되었건, 아무리 잘 지은 시집이라 할지라도 내 마음에 드는 시를 골라내 보면, 그 많은 시들 중에서 고작 10여 편 남짓인 것이 일반적이다. 그런데 이병률 시인의 <바람이 사생활>에서는 수록된 58편의 시들 중에서 무려 절반인 29편을 골라낼 수 있었다.
이십 년이 넘는 세월 동안 수백 권의 시집들을 읽어 왔지만 이토록 이나 많은 시들이 내 마음에 들었던 시집은 열 손가락으로 뽑을 정도이다. 대단한 시인의 대단한 시집을 발견한 기쁨으로 '강변 여인숙'에 머무는 보름 동안이 전혀 심심하지 않았다.
이병률 시인이 제 그리움의 정체를 감추기 위하여 벽에 그렸다가 지우고 또 그린 수십 겹의 그림 중에서 어느 것을 골라내는 것이 가장 좋을지 정하는 것은 너무 어려운 일이다. 그래서 그가 공들여 지은 이 아름다운 시집에 내가 붙여준 이름인 '강변 여인숙'을 제목으로 삼은 시 한 편을 아래에 옮긴다. '강변 여인숙'의 어느 방엔가 그 많은 그림들이 그려져 있는 벽이 분명 있을 터이니 말이다. 읽어보시고 마음에 드신다면, 한번쯤 들러서 묵어보시라.
강변 여인숙
추운 밤 사이 강물도 얼었나보다
강 한가운데로 걸어들어가 얼음 속을 들여다보니 고래 한 마리 얼어 있다
그도 죽으려 했나보다
고래 속으로 들어가 몸을 서로 녹여도 좋겠다
천근의 아기를 받아 씻기며 집을 차려도 좋겠다
그러면 물고기들은 와서 부딪치며 한사코 집 안으로 들어와 참견하려 할 것이다
집 안쪽에다 불을 지피려 안간힘을 쓰는 내 모습을 보고 허허 신(神)은 파도소리만큼 웃기도 할 것이다
문득 그 소리에 녹기 시작한 고래는 물을 흘리며 일삼아 흐느껴 울기도 할 것이다
그러면 자꾸자꾸 그의 허리 속으로 걸어들어가 한 천년쯤 아무 일도 없을 어두운 밤을 차려도 좋겠다
덧붙이는 글 | 창비시선 270 이병률 시집 <바람의 사생활>
ㅇ 이병률 지음
ㅇ ㈜창비
ㅇ 2007년 1월 5일 초판 2쇄
ㅇ 값 6000원
본문 중 작은 따옴표 안의 구절들은 모두 이 시집에 실린 시의 시구 또는 시 제목에서 인용한 것입니다.
이 기사는 인터넷 서점 예스24의 독자리뷰에도 실렸습니다. 오마이뉴스는 직접 작성한 글에 한해 중복 게재를 허용하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