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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바닥이 말라 가고 있었습니다. 질척질척한 논 한구석에 비닐 터널을 만들어 싹 틔운 볍씨 모판을 옮겨놓았는데 그곳마저 시원찮았습니다. 비가 왔는데도 소용이 없었습니다. 모판에서 푸르게 올라오던 벼들마저 시들시들해져 갔습니다.
다른 논들과 외떨어져 있어 유기농 재배하는데 큰 지장은 없으나 물 대는 것이 큰 문제였습니다. 손모를 심을 예정인 한 마지기 반에 불과한 다랭이 논, 천수답이다 보니 하늘만 바라볼 수밖에 없는 처지입니다.
비가 오지 않으면 물줄기가 시들해지는 논 옆으로 흐르는 작은 개울에 의지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동안 개울에 호스를 연결하여 논에 목을 축여주고 있었지만 며칠 전부터는 그 물줄기마저 멈춰버리다시피 했습니다.
개울을 따라 올라가 보니 곳곳에서 논물을 대고 있었습니다. 모터를 돌려 개울물을 끌어올리는 바람에 아래쪽에 자리한 우리 논으로 들어올 물이 충분치 않았던 것입니다. 이래서 물꼬 싸움이 일어나는구나 싶었습니다.
어쩔 수 없이 물 조리개를 동원해 목이 타고 있는 모판에 물을 뿌려주었습니다.
"농부 아자씨 뭐해요?"
모판에 목을 축여 주며 '물꼬를 어떻게 해결할까' 고민하고 있는데 턱 하니 장화까지 걸쳐 신은 영주 녀석이 논두렁을 타고 뒤뚱거리며 다가오고 있었습니다. 올해 네 살이 된 영주 녀석은 내가 소작하고 있는 논 옆댕이에 살고 있습니다.
"아자씨? 물주고 있지…."
"왜요?"
"어린 벼들이 목마르다구 하니께."
"왜 목마르다 해요."
"물이 없으니께, 너두 물 안 마시면 목마르지?"
"예."
우리 동네에서 학교도 가지 않고 유일하게 빈둥빈둥 노는 꼬맹이, 영주 녀석은 유치원을 한 달도 채 다니지 못하고 그만두었습니다. 유치원에 가면 형아들과 누나들이 꼬집고 때리고 자꾸만 괴롭힌다는 것이었습니다.
영주 녀석은 종종 우리 식구들을 친구 삼아 놀고 있습니다. 나와 아내 그리고 우리 집 아이들 역시 녀석과 친구처럼 노는 것을 좋아합니다. 또래 아이들에 비해 영특한 녀석은 작년에 비해 생각이 부쩍 컸지만 여전히 나보다는 생각이 훨씬 많지 않습니다. 그래서 나 또한 녀석과 생각 없이 노는 것이 좋습니다.
녀석은 늘 그랬듯이 논두렁을 폴짝폴짝 뛰어다니며 이것저것 참견하고 끊임없이 질문을 퍼부어댔습니다.
"사진은 왜 찍어요?"
"그냥 벼가 자라는 것을 찍어 놓으려구, 근디 어제께는 거머리 있었는디 다 어딜 갔지?"
"거머리가 뭐여요?"
"거머리? 그거? 다리에 붙으면 피 빨아 먹는다."
피를 빨아먹는다는 무시무시한 말에 녀석은 두 눈이 휘둥그레지더니 이내 말꼬리를 돌립니다.
"인효 형아하구 인상이 형아는 어디 갔어요?"
"학교 갔지."
"왜요?"
"글쎄? 공부하러 간다고 하지만 그건 나도 정확히 모르겠다. 그냥 학교 갈 때가 됐으니께 가는 거구, 그리구 또 학교에 가면 같이 놀 친구들이 많으니께, 그래서 간 거 같다."
줄곧 우리를 지켜보고 있었는지 영주 엄마가 저만치 집 마당 앞에서 뭐라고 그럽니다.
"예? 뭐라구요!"
"송 선생님하고 영주하고 그러고 있으니까 그림 같다고요! 보기가 너무 좋아요."
영주 엄마는 내가 논일을 하고 있으면 시원한 물이나 커피를 타 주고 때로는 참외도 깎아다 주곤 합니다.
"농부 아자씨! 우리 아저씨 집에 가서 놀아요."
"그려? 그러자! 형아들 올 때도 됐으니께. 형아들 마중 나가자."
나는 일손을 놓고 생각 없이 영주 녀석의 손을 잡고 논두렁을 걸어 나왔습니다. 영주는 우리 집 아이들과 노는 것을 좋아합니다. 우리 집 아이들도 영주와 노는 것을 좋아합니다. 서로 좋아할 수밖에 없습니다. 우리 동네에서 서로서로 놀 상대가 녀석들뿐이니까요.
동네 앞 커다란 둥구나무에 도착했을 때 학교에서 돌아오고 있는 우리 집 아이들이 꼬불꼬불한 길 저만치에서 걸어오고 있었습니다. 영주 녀석은 신바람이 나서 손을 흔들어가며 소리칩니다.
"인상이 인효 형아!"
우리를 발견한 두 녀석들도 손을 흔들어 줍니다. 나는 히죽히죽 걸어오는 우리 집 아이들에 대고 연신 카메라 셔터를 눌려대다가 그제서 영주 녀석의 '기분 좋은 꾀임'에 넘어가 물꼬 고민을 까마득히 잊고 있었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려 잊자, 물꼬는 하늘에 맡기고 니들하고 놀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