솔직히 말해서 지난 한두 달 동안 내가 가장 재미있게 본 드라마는 <마왕>도 아니고 <고맙습니다>도 아니다. 그것은 엉뚱하게도 <케세라 세라>(도현정 극본, 김윤철 연출, MBC HD주말 특별기획)이다. 이 드라마에 대한 온갖 악평들과 비난들, 형편없는 시청률에도 불구하고 나는 상당히 재미있게 몰입해서 보았다.
그리고 이제 그 까닭을 곰곰이 생각해 보게 되었다. 누구는 이 드라마가 뻔하고 상투적이고 진부하다고 비판하는데, 누구는 이토록 크나큰 재미를 느끼는 이유는 도대체 무엇일까?
물론 어떤 드라마는 너무 뻔하고 상투적이고 진부해서 재미가 없고, 또 어떤 드라마는 뻔하고 상투적이고 진부한데도 재미가 있다. 어떤 드라마는 뻔하지 않아서 재미가 있고, 또 다른 드라마는 뻔하지 않아서 재미는 없으나 의미가 있다. 이러한 사실은 '뻔하고 상투적이고 진부하다'는 말이 개별 드라마에 대한 하나마나한 평가가 될 가능성이 크다는 것을 말해준다.
이런 식의 비난이나 비평에는 트렌디 드라마를 비롯한 여성취향의 멜로드라마 일반에 대한 상당한 거부와 폄하가 깔려있다. 사랑타령 일색에, 이리저리 얽혀 있는 삼각․사각관계, 툭하면 출생의 비밀에, 걸핏하면 신데렐라 이야기, 심심하면 불륜이니, 지긋지긋해 하는 것도 이해 못할 바는 아니다.
게다가 만날 사랑타령만 해대는 멜로물은 왜 그리 차고 넘치는지, 뭔가 색다른 이야기를 보고 싶어 하는 시청자들에게 우리나라 드라마 시장의 심각한 불균형과 낮은 심미안은 항상 불만의 요인이 되어왔다. 최근 들어 트렌디 드라마들의 눈에 띄는 퇴조와 몇몇 남성취향 드라마들의 성공에 따라 멜로물들에 대한 비난의 수위는 한층 높아지고 있는 추세이다.
그러나 그러한 비난이 현상적으로 틀린 지적은 아니지만 그럼에도 부당하다고 느껴지는 것은 다음 두 가지 이유 때문이다. 하나는 그러한 비판이 대중예술 장르의 관습성이나 도식성에 대한 충분한 고려를 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장르의 관습성이나 도식성으로부터 자유로운 드라마는 가능하지도 않고 존재하지도 않는다.
따라서 상투적이라거나 진부하다거나 도식적이라는 비판은 개별 작품에 대한 꼼꼼하고 성의 있는 분석이 뒷받침되지 않으면, 지나친 일반화의 오류에서 벗어나기 힘들게 된다.
또 하나는 그러한 비난이 유독 여성 취향의 멜로물들에 집중된다는 점이다. 평자들은 웬만해선 가족드라마의 상투성이나 범죄추리물, 사극 등의 도식성에 대해서는 언급하지 않는다. 이들에 대해선 그 대신 연장방영으로 작품이 늘어진다거나, 구성이 치밀하지 못하고 허술하다거나, 역사적 사실에 배치된다는 식의 전혀 다른 비판을 한다.
여성 취향 드라마에 대한 뿌리 깊은 냉소와 멸시
이렇게 볼 때 사랑이야기가 중심인 멜로물들에만 유난히 뻔하고 상투적이고 진부하다는 비난을 퍼붓는 것은 여성 취향의 드라마에 대한 평자 자신의 뿌리 깊은 냉소와 멸시를 드러내는 것이라고 아니할 수 없다.
물론 일반 시청자건 평론가건 할 것 없이 누구나 자신의 취향을 가지고 있다. 누구는 훈훈한 가족이야기에 후한 점수를 주고, 누구는 구성이 치밀한 선 굵은 드라마를 선호하며, 누구는 지능이나 과학을 이용한 지적 유희에 빠져들고, 또 다른 누구는 멜로물의 사랑이야기에만 과도하게 집착하기도 한다.
문제는 이러한 취향의 차이가 자주 우열을 가리는 취향의 서열화로 자리매김 된다는 점이다. 드라마의 다양화와 분화를 주장하는 것과 드라마 안에서의 취향의 서열화를 조장하는 것에는 분명한 차이가 있다. 드라마의 다양화는 소수 취향까지를 포함한 다양한 취향의 사람들을 위해 필요한 것이지, 특정 종류나 장르의 드라마들이 다른 종류나 장르의 드라마들보다 더 우수하고 뛰어나기 때문에 필요한 것이 아니다. 어떤 종류나 장르에도 잘 만든 작품과 그렇지 못한 작품이 있을 뿐이다.
<케세라 세라>는 많은 사람들이 비난하는 것만큼 그렇게 형편없는 작품이 아니다. 이 드라마는 익숙하고 관습적인 클리셰들을 전면에 배치한 뻔한 구도로 일관하지만, 공들인 캐릭터와 대사와 연출의 힘은 낡은 클리셰들을 뚫고 나름의 멜로 세계를 구축한다. 여기에는 사랑에 빠져드는 주인공 네 남녀의 감정의 흐름과 심리의 파장을 포착하고 조율하는 뛰어난 멜로적 감수성이 있다.
이 드라마는 그야말로 멜로드라마 자체에 대한 욕망을 드러내는 것처럼 보인다. 마치 <발리에서 생긴 일>(이하 <발리>)의 현실적이면서도 비극적인 사랑을 되살리려는 듯한 힘겹고도 끈질긴 욕망을 보여준다. 그리하여 오직 네 사람의 애증의 파토스에 배타적으로 집중하는 드라마의 전략은 처음부터 끝까지 일관된 멜로적 긴장을 축조해낸다.
여기서 <발리>의 현실은 인위적으로 무대화되어, 역시 네 명의 캐릭터를 계급적 간극으로 벌려 놓는다. 그러나 은수(정유미 분)와 태주(문정혁 분)에게 신분상승의 욕망은 수정과 인욱 만큼 절실하지 않고, 혜린(윤지혜 분)과 준혁(이규한 분)의 소유 욕망도 영주와 재민의 그것만큼 파국적이지 않다.
이들은 헛된 망상을 품지 않는 지독히 현실적이면서 콤플렉스를 갖지 않는 쿨한 인물들이다. 이들은 잔인한 계급 현실의 운명적 희생자들이 아니라 계산하고 거래하고 선택하는 주인공들이다. 이 드라마에서 <발리>가 지닌 계급적 현실의 비극성이 탈각되는 것은 바로 이 때문이다.
그리하여 네 사람은 어찌할 수 없는 운명적 연루가 아닌 스스로의 선택에 의해서 사각체제라는 사랑의 굴레 속으로 기꺼이 진입한다. 이들은 아슬아슬한 사랑 놀음을 위해 상대를 교환하는 은밀한 '거래' 안으로 들어간 것이다.
결코 채워지지 않는 욕망에 대한 이야기
그러나 자신도 제어할 수 없는 사랑이라는 감정이, 질투의 불길이 이들의 필요에 의한 거래나 선택을 배반할 때, 이들은 어느 한 순간 대책 없이 무너져 내린다. 혜린은 준혁에 대한 오기와 집착으로 자신이 쳐놓은 태주라는 덫에 걸려든다. 태주는 은수의 사랑 대신 혜린의 화려한 배경을 선택하고 나서야 비로소 자신의 욕망의 대상이 잃어버린 그 사랑이었음을 깨닫는다.
은수는 실연의 고통을 잊기 위해 준혁의 따뜻한 배려에 기대보지만, 태주라는 존재의 그늘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준혁은 결혼으로도 채워지지 않는 은수에 대한 갈망으로 마침내 냉정을 잃고 흔들린다.
네 인물이 공히 지니게 되는 결핍과 부재로 인한 통증과 외로움, 그 가질 수 없는 사랑의 대상에 대한 욕망과 그리움, 이런 것들이야말로 이 드라마의 주된 멜로적 정서이다. 그것은 사랑이 주는 행복감이나 충만감 대신 결핍에 시달리는 외로운 인물들에 대한 쓸쓸한 동화와 감정적 연루를 가져다준다.
<케세라 세라>는 결국 사랑이라는, 결코 채워지지 않는 욕망에 대한 이야기이다. 이 드라마는 <발리>의 계급갈등에 의한 비극적 파국 대신 사랑이라는 욕망의 내재적 실패에 대해 이야기한다. 이들은 항상 자신이 가지지 못한 어떤 다른 것을 욕망한다.
이들에게 사랑은 그들의 결핍을 순간적으로 메우는 공허한 대상으로만 존재한다. 네 사람 모두에게 부나 안락, 안정 따위가 그러하듯이. 그것들은 얻어지는 순간 그것이 자신이 욕망한 그 대상이 아니었음을 알게 한다. 욕망의 대상으로의 가치를 잃게 되는 것이다. 은수와 태주가 <발리>의 수정과 인욱이 결코 가질 수 없었던 부와 행운을 거머쥐지만, 그것으로도 결코 채워질 수 없는 결핍에 시달리듯이.
그렇게 이들의 욕망은 항상 실패한다. 사랑은 항상 어긋나기만 하는, 결여된 욕망의 대상으로서만 존재한다. 사랑은 항상 과거형이거나 도달하지 못하는 미래형으로만 나타난다. 한순간 섬광처럼 지나간 은수와 태주의 짧은 사랑이거나 혹은 마지막 엔딩에서 이들의 새로운 만남의 가능성으로서.
따라서 드라마의 첫 장면을 반복하는 이 마지막 장면은 이 드라마에서 결코 해피 엔딩으로 보이지 않는다. 그것은 또 다른 어떤 것을 욕망하게 하는 순간적 환상에 불과할 테니 말이다. 사랑은 그렇게 순환되고 반복되며, 멜로드라마에 대한 우리의 욕망도 그렇게 계속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