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편 만화영화 한 번 만들어봅시다.” 신동헌 감독이 당시 메이저 영화사였던 세기상사로부터 제안을 들은 것은 1965년.
유명한 ‘진로소주’ 시리즈 등으로 1960년부터 CF애니메이션계에서 명성을 쌓아온 그는 선뜻 제안을 받아들였다. 만화가, CF애니메이션 감독 등으로 일해왔지만 진짜 하고픈 일은 장편 애니메이션이었기 때문.
스크린으로 옮긴 작품은 선생의 친동생인 고 신동우 화백이 당시 소년조선일보에 연재중이던 <풍운아 홍길동>. 아우의 ‘홍길동’을 가져오긴 했지만 신 감독은 만화영화라는 특성에 맞춰 그 자신이 캐릭터를 새로이 그려내고 전체 구성도 손을 봤다.
“유소년이 주 대상인 만화영화는 스토리가 뚜렷해야지. 영국 ‘로빈훗’과도 닮은 ‘홍길동’은 ‘의적’이라는 소재가 좋았어. 그 안엔 활극이 있고, 모험이 있으니까. 원작이 최초의 한글소설이라는 점에서도 의미가 있는 작품이었지. 무엇보다 선악이 뚜렷한 <홍길동>의 이야기구조가 애니메이션화하기에 적합했어.”
열의와는 달리 상황은 좋지 못했다. 셀애니메이션의 기본인 셀마저 구하기가 쉽지 않던 시절. 선생은 미 공군 촬영 필름을 두루마리째 시장에서 싸게 얻었고, 양잿물에 하루를 재워 감광막을 지우곤 그 위에 그림을 그려넣었다. 그나마도 ‘비닐카’라는 셀 전용 물감이 없어 일반 ‘포스터 컬러’로 색을 칠하는 통에 촬영 때면 색이 바래고 일어나기 일쑤였다.
“시행착오도 많았고, 막판 보름 정도는 제대로 잠도 못 자고, 수면부족으로 서로 신경이 날카로워 싸우기까지 했지. 정말 고생이 많았지만 고생으로 생각하지 않았어. 우리가 맨처음 장편 만화영화를 만든다 하는, 그런 긍지가 있었거든. 그런데 지금 다시 하라면 못할 것 같아.(웃음)”
전문적인 지식은 고사하고 이제 갓 고등학교를 졸업한 40여 명의 사람들을 한쪽에서 가르쳐가며 진행한 작업이다. 처음 완성된 10분간의 필름은 마음에 들지 않아 폐기되기도 했다. 하지만 오케스트라를 동원한 배경음악, 선녹음 방식, 이중촬영 등의 당시로서는 첨단이라 할 수 있을 방식을 도입, 1년간의 작업기간을 거쳐 12만 5300장의 그림을 최종 완성했다.
개봉일인 1967년 1월 21일. 새벽까지 작업에 시달렸던 신 화백과 스탭들은 누적된 피로에 막상 개봉 당일엔 쓰러져버릴 수밖에 없었는데 개봉관을 찾은 사촌 형으로부터 “대한극장이 터질 것 같다”는 말이 전해졌다.
교통순경 기마대가 동원돼 교통대란을 막아야 할 정도였다. 개봉 4일만에 10만 관객이 들었다. 개봉일로부터 딱 보름 동안 걸렸던 필름은 당시 실사영화까지 포함한 순위에서 당당히 2위를 차지했고, 그해 비 극영화 부문 대종상을 수상했다.
“인간적인 따뜻함과 ‘손맛’ 잃지 않기를”
그러나 선풍적인 인기에도 그에게 돌아오는 것은 오히려 빚 뿐이었다. 극장주들은 약속한 수익은 고사하고 제작비조차 돌려주지 않았다. 속편격으로 6개월만에 극장에 다시 내건 <호피와 차돌바위>를 끝으로 신 감독은 마침내 영화판을 뜨자고 생각했고, 다시 CF와 방송용 애니메이션을 찍으며 빚을 갚아나갔다.
재능도 있었고, 기회도 있었지만 “생리에 맞지 않은 영화판은 사람을 버려놓을 것 같았다”. “경제적으로는 손해를 봤지만 우리나라 최초 장편 만화영화를 두 편 만든 것에 대해서는 보람을 느끼고 있어”라며 노감독은 지난 세월을 털어낸다.
‘한국 애니메이션의 뿌리’ 탄생 40주년을 맞은 <홍길동>에 대한 관심이 뜨거운 지금, 정말로 궁금한 것은 ‘홍길동 필름의 증발’. 어디로, 왜 사라져버린 것일까.
“얼마 전에도 일본에서 누가 필름을 갖고 있다 해서 갔는데 조그만 조각 필름이었어. 글쎄? 왜 없어졌는지도 모르겠어. 영화사에서 다 가져갔으니까. 있으면서 없다는 것인지 그것조차 분명하지 않아. 한쪽에서는 있다는 말도 하고….”
최근에는 ‘홍길동 기념사업회’가 만들어져 필름 복원과 관련 자료 수집, 예술관 건립 등 <홍길동>과 신동헌 선생에 대한 다양한 사업이 진행될 전망이다.
사라져버린 신화에 대한 뜨거운 관심. 반가운 일이지만 한편으론 자신의 ‘공’이 지나치게 강조되는 것이 달갑지만은 않다. 필름의 길이가 남산의 몇 배라느니 하는 말들도. “47만 5000장으로 완성된 월트디즈니의 <백설공주>도 겨우 집 높이 몇 개일 뿐이었을 뿐인 걸. 전부 너무 과장된 것 같아.”
그는 자신의 애니메이션이 한국 애니메이션의 기원인 듯 회자되는 것에도 반대한다. “문달부 씨의 ‘럭키치약’ 광고가 맨처음이지. 엄도식 씨의 ‘활명수’ 광고도 있었고. ‘코주부’ 김용환 선생도 일제시대 때 이미 만화영화 제작에 대한 고민을 했었어. 뜻은 펼치지 못했지만….” 그런 모든 움직임들이 이어져내려온 결과 <홍길동>도 탄생하게 된 것이리라.
그리고 계속해 그 흐름이 이어져나가길 바란다.
“애니메이션은 보통 유소년을 대상으로 하지? 그렇다면 선악이 아주 뚜렷해야 해. 그런데 요즘은 그게 분명하지 않은 것 같아. 기술은 좋은데 캐릭터들이 너무 뚜렷하지 않은 것 같고. 어린이들한테는 어려운 스토리들이 많아. 그것도 세상의 흐름인지는 모르겠지만 그래서 큰 관객 동원에는 실패하는 건 아닐까.”
벌써 반세기 전 배움에 근거한 것이니 더욱 조심스러운 마음. 하지만 내친 김에 그는 몇 가지 이야기를 더 들려준다.
“오디오 비디오 싱크로율을 100% 맞추는 일이 중요해. 선녹음 할 것은 선녹음 하고 음악에 동작도 맞춰야 하지. 만화영화의 음악은 단순한 배경음악이 아니거든. 그런데 그 작업들을 후배들이 잘 안해. 후녹음으로 대강 입술만 맞추더라고. 그런 게 참 불만스러워. 소리와 잘 맞는 정확성이 중요한 건데. 또 스토리가 약하고 개그가 약한 것도 문제야. 명색이 만화영화인데 진지한 스토리에도 개그는 있어야지. 그리고 충격을 지나치게 많이 쓰는 것도 좋지 않아. 충격이란 가끔 있어야 먹히는 법이지.”
무엇보다 잃지 말아야 할 것은 인간적인 따뜻함. 기계에 기대서는 절대로 얻어낼 수 없는 손맛의 힘을 노감독은 신디사이저에 빗대어 전한다.
“기계에 의존하면 안 돼. 창작을 많이 해야 하고. 악기 중에 신디사이저라고 있지? 그건 바이올린, 드럼 소리도 다 내는 건반악기야. 그렇다고 해서 그 신디사이저가 제일 높이 평가되거나 ‘예술적’이라고 하진 않잖아. 기계에 너무 의존하는 것은 문제라고 생각해. 사람이 손으로 직접 해야지. 3D가 대세라곤 하지만 최근 미국에선 2D로 다시 돌아서고 있어. 요즘 정말 너무 많은 애니메이션 종사자들이 나오고 있지. 다들 기술은 좋은데 인간미가 없어. 인간적인 따뜻함을 잃지 않는 게 필요해, 구성에 있어서나 그림에 있어서나.”
| | | “평생 일만 하다 간 참 안타까운 사람이지” | | | 신동헌-데츠카 오사무, 한·일 만화영화 대부의 10년 우정 | | | | “세상 떠난 지도 벌써 십수 년이 지났네. 참 아까운 사람이야. 점심 먹을 시간도 없어 김밥으로 끼니를 때우며 평생을 일만 하다 갔지.”
신동헌 감독이 ‘일본 만화영화의 아버지’라 불리는 데츠카 오사무와의 우정을 공개했다. 신 감독은 1980년 데츠카 오사무를 처음 만나 1989년 그가 세상을 떠나기 전까지 줄곧 친구로 지냈다고.
한 살 차이(신동헌 감독이 연상)의 두 사람은 닮은 점이 많은 만큼 잘 통했다고 한다. 의예과 출신 데츠카와 공대 출신 신 감독은 각각 만화가로부터 시작해 만화영화 감독으로 데뷔했으며, 음악듣기가 취미인 것이나 성격도 비슷했다. 신 감독은 <불새>와 같은 데츠카 오사무의 작업을 돕기도 하고, 시간이 날 때면 같이 여행도 다니곤 했다.
언젠가 그와의 미국 여행 중 있었던 에피소드 하나. 한밤중 데츠카 오사무가 선생의 방을 두드리며 “정로환 없냐”고 물었다. 편집담당자가 선생이 묵던 미국 호텔까지 원고를 받아내기 위해 쫓아들었던 것. 약국 갈 새도 없이 원고를 마무리할 수밖에 없었던, 살아서 지독히도 일에 쫓겼던 데츠카를 기억하며 선생은 다시 그가 안쓰러운 듯 미소 지었다.
“그 친구가 했던 말 중에 기억나는 말이 있어. 돈을 벌 수 있게 해주는 만화는 자신에게 ‘본처’이고, 만화영화는 ‘첩’이라 했었지. 정말 여기(만화)에서 번 돈을 저쪽(만화영화)에 다 쏟아부었었어.(웃음)” | | | | |
| | | “국가적 차원 관심으로 우리 애니메이션 뿌리 찾아야” | | | 지난해 11월 출범한 ‘홍길동 탄생기념사업회’ | | | |
지난해 11월에는 ‘홍길동 탄생기념사업회’가 발족했다. 선생의 업적을 기리고 관련한 사업들을 벌이고자 선생의 제자와 후배 등이 함께 뜻을 모은 것.
사업회는 그 첫 번째 사업으로 지난 1월 KBS1 TV를 통해 ‘잃어버린 기억-만화영화 홍길동’을 방영했다. 홍익대 이남국 교수가 세기상사 근무시절 소장하고 있었던 3분가량의 흑백 예고편과 5분 가량의 러시필름, 그리고 예고편에 색을 입힌 복원판 등이 이렇게 세상과 다시 한 번 만났고, 한국 애니메이션의 뿌리에 대한 세간의 관심은 뜨거웠다.
사업회의 가장 큰 관심은 <홍길동> 필름을 되찾는 일. 최근 부활한 <로보트태권V>와 같이 복원되기를 바라고 있다. 모름지기 <홍길동>은 우리 장편 애니메이션의 뿌리이기 때문.
또 선생의 전기 <신동헌과 홍길동>, <한국애니메이션 50년사>와 같은 출판 작업은 물론 애니메이션업계에 선두적인 업적을 남긴 사람들에게 상은 주는 ‘신동헌 상’(혹은 ‘홍길동 상’) 등도 제정하고자 한다.
무엇보다 ‘신동헌 애니메이션 예술관’을 지어 한국 애니메이션의 대부 신동헌의 업적을 기리는 동시에 일반 시민들이 애니메이션을 쉽게 접하고 이해할 수 있게 하는 것을 목표로 하고 있다.
사업회의 전체 기획을 담당하고 있는 황의웅 프로듀서는 이와 같은 작업들에 대해 “우리 애니메이션의 ‘기원’을 찾아내는 일로 매우 중요하다”고 말하고, “비단 사업회 뿐 아니라 우리 애니메이션계 곳곳에서 진행돼야 할 사업”이라 덧붙였다.
그는 한편 “필름 하나 제대로 보관 못한 현실에 답답한 마음을 느낀다”면서 “<홍길동>의 복원과 관련한 사업들의 전개는 지금처럼 개인적인 차원에서가 아니라 국가적인 차원에서 지원되고 완성돼야 할 것”이라 강조했다. | | | | |
덧붙이는 글 | 이 기사는 한국문화콘텐츠진흥원 CT News에도 실렸습니다. 오마이뉴스는 직접 작성한 글에 한해 중복 게재를 허용하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