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런데 뜻밖에도 이쪽 산중턱에 낡은 집 한 채, 그리고 저쪽 바닷가 절벽쯤에도 근사한 집 한 채가 서 있었다. 낡은 집은 이 근처에서 소와 양을 방목하는 농장주의 집으로 보였고, 근사한 집은 돈 많은 부호의 별장쯤으로 여겨졌다. 이렇게 외진 곳에 생활의 터와 휴식의 터를 마련한 이들은 과연 어떤 사람들일까? 그들은 도시의 이웃들처럼 서로 사이가 좋을까?
궁금한 마음에 멀리 그 두 집을 오래도록 응시하지만 사람의 움직임은 잡히지 않았다. 가까운 곳으로 잡아 당긴 내 시선에 대충 시멘트 블록으로 바람막이를 한 화장실과 나무로 만든 피크닉용 야외테이블이 걸려들었다.
'그렇지, 집이 있으니 길이 놓인 거겠고, 길이 놓였으니 놀러오는 사람들도 있을 테지.'
나는 속으로 생각하면서 다시 주위를 둘러보았으나, 바닷가에는 우리 말고는 아무도 없었다. 바다 쪽에서 불어오는 강한 바람을 타고 고적감이 밀려들었다. 조금 으스스한 기분이 드는지 아내와 딸아이도 말이 없었다. 눈에 보이는 두 채의 집과 화장실과 야외테이블을 살짝 가린다면, 무인도의 해변쯤으로 여겨질 수도 있을 정도로 적막하고 호젓했다.
고적한 바닷가를 기웃거리다가 마침 비가 내리기 시작해서 우리는 차 안으로 피신을 했다. 딸아이는 그만 가자고 했으나 위험한 길을 운전해서 가기에는 빗방울이 제법 굵었다. 나는 모텔에서 준비해온 뜨거운 물이 담긴 보온병과 비상식량으로 챙겨 온 컵라면 세 개를 꺼냈다. 귀로는 빗방울 소리와 바람 소리를 들으면서, 눈으로는 차창에 서린 뿌연 김을 바라보면서, 우리는 후후 입김을 불어가면서 컵라면을 먹었다.
컵라면을 다 먹고 비가 그쳐서 무인지경의 호젓한 바닷가를 떠나면서도, 나는 컵라면의 빈통을 화장실 옆 쓰레기통에 버리지 않았다. 때 묻지 않은 원시의 바닷가 오피토 비치에는 누군가 왔다 갔다는 흔적을 남기지 않는 것이 예의일 듯싶었기 때문이었다.
역사의 숨결이 서린 그림처럼 예쁜 바닷가, 쿡스 비치
우리는 비포장도로를 돌아 나와 다시 25번 국도를 타고 남쪽으로 달렸다. 오래지 않아, 코로만델 반도에서 아름다운 해변들이 가장 많기로 소문난 머큐리 베이(Mercury Bay)가 눈앞에 펼쳐졌다.
머큐리 베이라는 이름은, 뉴질랜드 역사의 서장을 여는 인물들 중의 한 명인 제임스 쿡(James Cook) 선장이 1769년 11월, 이곳 바다에 엔데버(Endeavour)호의 닻을 내리고 수성(水星, mercury)이 태양면을 통과하는 진기한 천체 현상을 관측했다는 역사적 사건에서 유래한 것이다.
그러나 구전으로 전하는 마오리족의 역사에는, 그보다 훨씬 오래 전인 서기 950년 경, 타히티섬의 전설적인 탐험가 쿠페(Kupe)가 이곳에 상륙했다는 이야기가 전해 내려온다. 쿠페는 자신이 상륙한 곳을, '쿠페가 지나간 땅'이라는 뜻인 '테-피티앙아-아-쿠페(Te-Whitianga-A-Kupe)'라고 이름 붙였는데, 머큐리 베이의 중심지 피티앙아의 지명은 여기에서 유래한 것이다.
우리는 그 지명이 뜻하는 대로 제법 번화한 피티앙아 거리를 그냥 '지나갔다'. 대신 그 맞은편에 있는 보다 한적한 해변들을 찾아가 보기로 했다. 하지만 비구름이 우리를 쫓아다니는지 내내 비가 내려서 차로 드라이브를 하면서 둘러보는 수밖에 없었다. 그러다가 잠깐 비가 그친 사이를 이용해서 우리는 쿡스 비치(Cooks Beach)가 한눈에 내려다보이는 절벽인 셰익스피어 클리프(Shakespeare's Cliff)를 다녀올 수 있었다.
절벽 끝에서 내려다보니 그림처럼 예쁜 초생달 모양의 아늑한 해변이 푸른 바다를 품고 있었다. 제임스 쿡 선장이 그 바다 어디쯤에 닻을 내리고 상륙했었기에 '쿡스 비치'라는 이름을 얻었을 터인데, 그보다 800여년 앞서 이 바닷가의 모래밭을 밟았을 쿠페의 행적에 나는 더 마음이 쓰였다. 그러나 역사는 승자가 기록하는 것이어서, 절벽 위에 만들어놓은 기념물에는 수성의 태양면 통과를 관측했던 제임스 쿡 선장의 행적만 기록되어 있었다.
오후 4시 30분 경, 근처 바닷가 마을인 하헤이(Hahei)의 숙소에 일단 체크 인을 하고 날이 개기를 기다렸으나 날이 다 저물고 나서야 비가 그쳤다. 일찍 하루를 마감하기가 아쉬워 저녁을 먹고 나서 홀로 바닷가로 나섰는데, 반갑게 나를 맞아주기라도 하듯 검은 구름장을 빗기고 둥실 보름달이 나타나는 것이었다.
지금 내가 보고 있는 저 보름달은 천년 전의 쿠페든, 이백 사십년 전의 제임스 쿡이든 그 누구에게나 똑같이 보였을 것이며 또한 앞으로도 오래 그러할 것이었다. 내가 오늘 본 아름다운 해변들 역시 예나 지금이나 변한 것이 거의 없을 터인데, 이백년 후 천년 후에도 과연 그럴 것인가? 스스로 물어보는 질문에 나는 쉽게 대답하지 못했다. 구름이 다시 슬슬 보름달을 가리기 시작했다.
덧붙이는 글 | 2004년 9월에 다녀온 뉴질랜드의 코로만델 반도 여행기 네번째 이야기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