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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에서 통일전쟁이 한창 진행 중이던 전국시대(戰國時代) 때의 일이다. 사마천의 <사기> 권70 장의열전(張儀列傳)에는 변장자(卞莊子)의 계략을 써서 한(韓)나라와 위나라를 모두 장악한 진나라 혜왕(惠王, 기원전 325~312년 재위)의 고사가 나온다.

한나라와 위나라는 모두 진나라의 동쪽에 있었다. 그런데 한나라와 위나라 사이에서 벌어진 전쟁이 1년이 넘도록 끝날 줄을 몰랐다. 그러자 진나라 혜왕은 어느 한 쪽을 편들 필요성을 느껴서 조정에 의견을 구했다.

조정은 어느 한 쪽을 편들자는 의견과 어느 쪽도 편들지 말자는 의견으로 나뉘었다. 의견이 팽팽하게 갈리자 혜왕은 판단을 내리지 못하고 주저했다. 그러던 차에 때마침 장의(연횡책 주장자)의 라이벌인 진진(陳軫)이라는 책략가가 진나라 조정에 들어왔다.

혜왕은 그에게도 의견을 구했고, 결국 진진의 계책이 혜왕에 의해 채택되었다. 진진은 변장자의 고사를 인용하여 혜왕을 설득했다.

전국시대의 바로 앞 시대로 춘추시대(春秋時代)가 있었다. 춘추시대에 노나라(지금의 산동)에는 변장자(卞莊子)라는 무인이 살고 있었다. 그가 어느 지방의 여관에 투숙하고 있었을 때에, 그 지방 사람들은 호랑이 2마리 때문에 골치를 앓고 있었다. 호랑이들이 툭 하면 출몰하여 인명과 재물을 손상시키고 있었기 때문이다.

의협심에 불탄 변장자는 여관 수자(豎子, 종업원)와 함께 호랑이 2마리를 잡으러 나섰다. 호랑이 둘을 발견한 변장자가 이들을 죽이려 들자, 여관 종업원이 제지하고 나섰다.

"조금 있으면 호랑이 2마리가 소를 죽일 겁니다. 그런 뒤에 호랑이들은 먹이를 차지하려고 서로 싸울 겁니다. 싸우면 큰 놈은 다칠 것이고 작은 놈은 죽겠죠. 그때 살아남은 놈을 죽이면 일거에 쌍호(雙虎)의 명성을 얻으실 수 있을 겁니다."

그 말을 옳다고 여긴 변장자는 종업원의 말대로 일단 지켜보기로 하였다. 잠시 후에 소를 죽인 2마리의 호랑이는 이번에는 자기들끼리 싸우기 시작했고, 정말로 종업원의 말대로 작은 쪽은 죽고 큰 쪽은 부상을 입은 채로 살아남았다.

그 틈을 놓치지 않고 변장자는 부상당한 큰 쪽을 죽여서 그 지방의 우환을 제거했다. 일거에 호랑이 두 마리를 없앤 셈이다.

변장자의 고사를 인용하여, 진진은 혜왕에게 "한나라와 위나라가 서로 싸우면 필시 대국(大國)은 상할 것이고 소국(小國)은 망할 겁니다"라면서 살아남은 쪽을 공격하면 궁극적으로 두 나라를 모두 점령할 수 있다고 제안했다.

혜왕은 진진의 건의를 받아들여 어느 쪽도 편들지 않고 일단 양쪽의 싸움을 끝까지 관망하기로 하였다. 결국 상황은 진진의 예측대로 흘러갔다. 오랜 전쟁에서 한 쪽이 살아남았고, 살아남은 나라는 결국 진나라에 의해 멸망하고 말았다.

변장자의 고사 연상시키는 중국의 태도

이 같은 <사기>의 이야기에서 연상되는 것은 최근 중국 정부의 6자회담 전략이다. 6자회담 의장국으로서 중재자의 책임을 떠맡고 있는 중국은 그동안 회담 국면이 꼬일 때마다 이를 적극적으로 해결하려 하기보다는, 가급적 시간을 끌면서 자국의 국익을 더 우선시하는 태도를 취해 왔다.

북-미 간의 핵문제가 전면전쟁으로 비화될 가능성이 극히 낮다는 것을 잘 알고 있는 중국은 차라리 6자회담 국면을 활용하여 자국의 영향력을 확보하는 쪽에 전략적 비중을 두고 있다. 6자회담이 '싱겁게' 끝나버리면, 중국이 언제 또 다시 한국·북한·미국·일본·러시아를 '거느리고' 의장국 행세를 할 수 있겠는가.

"6자회담은 단기간에 끝날 수 있는 게 아니다"라는 말은 그간 중국 외교부 대변인이 정례 기자회견에서 일상적으로 사용해온 표현이다. 핵문제가 너무 일찍 끝나기를 바라지 않는 중국 정부의 속내가 '살짝' 드러나는 대목이다.

2·13 합의 이후 BDA 북한계좌의 반환문제만 해도 그렇다. 물론 미국에게도 귀책사유가 있지만, 중국이 북한 자금을 송금해줄 의향만 있었다면 문제는 훨씬 더 수월하게 진행되었을 것이다.

그런데 새삼스럽게 원칙과 절차를 강조하는 중국의 태도가 부분적 원인으로 작용하여 BDA 송금과 6자회담 진전이 지연되고 있다. 결국 북한이 제3국 송금 루트까지 찾아나서는 상황이 조성되고 말았다. 다른 사안에서는 유연성을 보여 온 중국이 이번 사안에서만큼은 유난히 원칙과 절차를 강조하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태도는, 핵문제를 조속히 해결하기보다는 핵문제 지속을 통해 영향력을 확보하고자 하는 중국의 기본적인 전략을 잘 보여 주는 것이다. 그리고 어느 한 쪽을 명확하게 편들기보다는 가급적 중간자적 입장에서 외교적 실리를 챙기려는 중국의 의도가 잘 드러나고 있다.

이따금씩 애매모호한 말로 적당히 중간자적 입장을 지키면서 영향력을 증대시키다가 승부가 명확하게 판가름 나는 시점에서 최종 방침을 결정하겠다는 중국의 태도는, 변장자의 고사를 활용하여 동쪽의 한나라와 위나라를 모두 삼켜 버린 진나라 혜왕과 별반 다를 바 없는 것이라고 볼 수 있다.

물론 중국이 자국의 국익을 우선시하는 것을 나무랄 수는 없다. 하지만, 어느 한 쪽을 명확히 편들어야 할 상황에서까지, 그리고 어느 것이 옳다고 분명하게 말해야 할 상황에서까지 그저 애매모호한 중간자적 입장을 고수한다면, 이것은 장기적으로 볼 때에 중국에게 득이 아니라 실이 되고 말 것이다.

중국이 국제사회에서 책임 있는 국가가 되려면, 편들어야 할 때에는 소신 있게 편들고 옳다고 말해야 할 때에는 명확히 옳다고 말할 줄 알아야 할 것이다. 중국이 가만히 있다고 해서 변장자의 고사가 그대로 재현되지는 않을 것이다.

#6자회담#변장자#북핵#BDA#2·13 합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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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imjongsung.com.시사와역사 출판사(sisahistory.com)대표,제15회 임종국상.유튜브 시사와역사 채널.저서:친일파의 재산,대논쟁 한국사,반일종족주의 무엇이 문제인가,조선상고사,나는 세종이다,역사추리 조선사,당쟁의 한국사,왜 미국은 북한을 이기지못하나,발해고(4권본),한국 중국 일본 그들의 교과서가 가르치지 않는 역사 등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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