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침내 미국이 공식적으로 한미FTA 재협상을 요구할 것으로 알려졌다. 한미FTA가 체결된 직후부터 끊임없이 흘러나왔던 소문이 사실로 확인된 것이다.
체결 직후부터 통상관료들은 재협상은 없다고 단호한 자세를 보였지만, 그들의 말을 액면 그래도 받아들이는 사람은 많지 않아 보였다. 그리고 다시 한번 통상관료들의 신뢰도는 떨어지게 되었다.
재협상론은 두 가지 이유에서 노무현 정부에게 치욕적이다. 첫째, 그동안 반대세력이 주장해 왔던 불평등 협상이라는 것을 재차 확인시켜 주었다. 미국 의회의 과반을 장악한 민주당이 행정부와 합의한 신통상정책을 기존에 체결된 FTA에 적용하는 과정에서 재협상을 거론했는데, 다른 나라와는 달리 한미FTA는 최근에 체결된 협정이다.
민주당이 의회를 장악한 것은 이미 지난 해의 일이고, 미국의 통상절차법에 따라서 미국의 무역대표부는 계속 의회와 논의하면서 통상협정을 진행해 왔다. 따라서 미국 의회는 그동안 이 재협상 대상이 되는 안건들에 대해 충분히 요구할 기회가 있었다. 미국 협상단이 자의적으로 의회의 요구를 묵살했을 가능성은 희박하다. 그런데 이제 와서 미국이 국내 사정을 이유로 재협상을 요구하는 것은 불평등 협상임을 만천하에 공표하는 격이다.
반노동·반환경 정부임을 확인시켜준 재협상론
재협상이 노무현 정부의 치욕이 되는 두번째 이유는 미국이 재협상을 요구하는 분야가 노동과 환경이라는 점이다. 자동차와 쇠고기도 거론할 것이라는 추측도 있으나, 자동차는 미국이 아무리 요구를 해도 큰 차이를 보이기 힘든 분야이다.
국내 시장에서 현대·기아차 독점의 문제점을 인식한다면 미국차가 일부 더 수입된다고 해도 큰 문제가 아닐뿐더러, 외제차 수요계층에서 미국차의 선호도가 그리 크지 않기 때문에 영향도 크지 않으리라 예상된다. 아마 향후 전개될 달러 환율의 변화가 훨씬 더 큰 충격을 줄 수 있다.
쇠고기의 경우에는 이미 노무현 정부에서 그 정도는 들어주겠다는 확고한 의지를 표명한 바 있기 때문에, 반대측의 국민건강권을 포기한 굴욕적 정책이라는 주장을 재삼 확인시켜 주는 것에 불과하다.
그러나 노동과 환경을 국제적 기준에 맞추도록 요구하기 위해 재협상을 요구하는 것은 자동차나 쇠고기와는 전혀 다른 차원의 이야기이다. 특히 미국이 이미 협상 중에 이러한 사항에 대해 요구했을 가능성이 높다는 점을 감안할 때, 한국의 통상관료들이 이러한 노동과 환경기준을 강화하는 것에 반대했고 또 지금도 반대하고 있다는 결론이 도출된다. 이것은 매우 중요한 의미를 가지는데, 왜냐하면 이것이 노무현 정부와 한미FTA의 정체성을 그대로 드러내기 때문이다.
노무현 정부가 한미FTA를 추진할 때 목표로 내세운 것이 제도의 선진화였다. 그런데 노동과 환경 분야에 있어서는 제도를 선진화할 생각이 전혀 없다는 것이 이번 재협상론을 통해 명확히 드러난 것이다.
필자는 줄곧 이번 한미FTA가 특정 이익집단의 이해만을 반영하는 졸속 협상으로 천민자본주의적 미국화를 추구한다고 주장해 왔다. 미국 민주당이 한국의 노동과 환경기준을 배려해 주고 있는 이 현실은 그런 필자의 주장을 뒷받침한다. 어쩌다가 노무현정부가 이 지경에 이르렀는지 답답하다. 노무현 정부는 정녕 부끄러움을 잊었는가?
선전 도구로 전락한 국책연구원
최근 발표된 국책연구원의 '한미FTA 연구결과'는 또 다른 의미에서 노무현 정부의 치욕이다. 원래 이러한 연구의 결과는 많은 가정에 의존하고 있기 때문에 그 수치는 큰 의미가 없다. 다만 그러한 가정들을 염두에 두고 결과를 해석해 가면서 정책을 집행해가는데 있어 효용성이 있으므로 이러한 연구를 한다. 전문가들이라면 어떠어떠한 가정하에서 어떻게 결과가 나왔다는 과정이 중요할 뿐이다.
실제로 미국 미네소타 대학교의 저명한 경제학자 티모시 케호(Timothy Kehoe)는 북미자유무역협정(NAFTA)이 체결된 후 10년 후에 NAFTA가 체결되기 전에 발표되었던 경제모형의 예측결과를 재검증한 바 있다. 이러한 경제모형의 분석결과들이 협정 체결에 영향을 미쳤기 때문에 이 연구는 주목을 받았다. 케호는 대부분의 연구가 무역의 증대효과와 그 부작용을 과소평가했으며, 특히 자유무역협정 이전에 거의 거래가 없던 품목과 관련한 예측에서 오류가 컸음을 밝힌 바 있다.
이러한 주장에 이어 세계무역기구(WTO)에 있는 두 명의 경제학자 피에르마티니(Piermartini)와 테(Teh)는 무역모형을 신비화하지 말라는 논문을 통해 경제학자들에게 경제모형을 통해 무역의 효과를 과장하지 말라고 경고하기도 했다.
사후적으로 이러한 모형의 결과가 틀릴 때, 유용한 경제적 모형의 신뢰성이 의심받게 되고 합리적 논의를 냉소하는 태도가 만연하게 된다는 이유에서였다. 자유무역을 주장하는 세계무역기구의 학자들의 주장임을 주목해야 하는데, 바로 우리의 경우를 정확히 지적한 것으로 보인다.
여기서도 노무현 정부는 두 가지 치욕적 오류를 범하고 있다. 첫번째는 순수해야 할 연구보고서를 선전도구로 사용하고 있다는 사실이고, 두번째는 그래서 연구보고서를 검토하자는 반대쪽에게 자료를 제공하지 않고 있는 점이다. 검증하기 위한 자료를 공개하지 않는 보고서는 과학적 논의의 가치가 없다. 어쩌다가 노무현 정부가 이 지경에까지 이르렀는지 재차 한탄하지 않을 수 없다.
재벌의 민원 해결책, 동의명령제
한미FTA 협상 과정에서 경쟁부문이 제일 먼저 타결되었다. 그런데 경쟁부문은 한미간에 상당히 비대칭적인 부문이었기 때문에 쉽게 타협하기 힘든 분야였다. 이유를 알기 위해서는 한국과 미국의 공정거래법 차이를 알아야 한다.
예를 들어 최근 삼성전자와 하이닉스 반도체 관계자가 담합으로 인해 미국에서 실형을 살고 있다는 보도가 된 적이 있다. 2002년도의 반도체 가격 담합 혐의로 삼성전자는 벌금 3억달러, 민사배상금 6700만달러, 집단소송 합의금 9000만 달러라는 막대한 금액을 지불했을 뿐만 아니라, 임원 4명이 실형을 사는 형을 선고 받았다고 보도된 바 있다. 하이닉스도 금액은 다소 적지만 역시 천문학적인 금액을 부담하고, 임원도 실형을 살고 있다.
반면 한국에서 기업의 담합행위에 대한 처벌은 미미하다. 얼마전 경실련이 공정거래위원회의 자료를 종합해 분석한 결과를 보면, 2003년 이후 재벌급 대기업집단이 연루된 35건의 담합사건의 소비자피해 추정액 4조7476억 원인데 반해 과징금은 4279억 원에 불과했고, 형사고발은 15건에 그쳤는데 그마저도 검찰에서 대부분 불구속이나 약식 기소에 그쳤다. 그야말로 한국에서는 처벌을 무서워서 담합을 꺼리지는 않을 것임을 누구나 쉽게 짐작할 수 있다.
한국과 미국의 차이는 크게 두 가지가 있다. 하나는 공정거래위원회의 전속고발권이다. 한국에서는 이러한 담합행위에 대해 공정거래위원회만이 검찰에 고발할 수 있다. 만약 공정거래위원회가 고발하지 않으면 검찰은 기소가 불가능하다. 그런데 공정거래위원회는 압수수색 등의 수사권이 없기 때문에 담합의 물증을 확보하기 힘들다. 그렇다면 고발이라도 자주해야 검찰이 본격적으로 수사를 하는데, 자신들이 담합이라고 확인한 것조차 고발하지 않는 상황이다.
반면 미국에서는 검찰이 독립적으로 수사에 착수할 수 있다. 특히 51개 주 검찰과 연방검찰이 독립적으로 움직이기 때문에 사실상 기업의 담합행위에 대해서는 52개 검찰 당국과 연방거래위원회가 독립적으로 감시하는 셈이다. 실제 수사는 연방검찰과 연방거래위원회, 그리고 다수의 주검찰이 공동으로 수사를 진행하게 되는데, 이해관계가 다른 주검찰을 만족시켜야 하기 때문에 기업에 대한 선처는 애초에 불가능하게 되어 있다.
두번째 차이점은 집단소송제이다. 검찰이 철저한 수사를 해서 담합의 증거가 밝혀지게 되면, 다수의 소비자가 집단소송을 제기할 수 있다. 그러니까 기업의 입장에서는 담합이 발각될 확률도 높은데다가 발각되었을 시 배상액도 훨씬 커지게 된다.
보호받지 못하는 한국의 기업과 소비자
담합을 예로 들었지만 공정거래법에 포함된 모든 기업의 불법행위를 처벌하는데 있어 한국과 미국의 차이는 크다. 그러니까 한국과 미국이 FTA를 체결하게 되면 무역이 늘어나게 되는데, 만약 한국의 기업이 미국에서 불법행위를 하게 되면 큰 처벌을 받게 되지만 미국의 기업은 그럴 걱정없이 안심하고 물건을 팔아도 된다.
그렇다면 상식적으로 생각해서 미국과 FTA를 체결하면서 공정거래법을 바꾼다면 어떻게 바꾸어야 할까? 당연히 소비자 보호를 강화하는 쪽으로 가야할 것이다. 그런데 한국의 협상단이 받아온 것은 동의명령제였다.
동의명령제란 무엇인가? 기업이 불법행위를 했다는 것에 동의하고 앞으로 그런 행위를 하지 않겠다는 것을 약속하면 공정위가 정식 조사를 하지 않는 제도를 말한다. 이미 한국의 재계가 강력히 요구해서 공정위가 입법을 추진하였지만, 법무부에서 다른 법집행절차와의 차이가 난다는 점을 들어 반대해 왔던 제도였다. 한 마디로 말하면 한미FTA를 이용하여 재벌의 민원을 해결해 준 것이다.
미국에서 동의명령제는 거의 의미가 없다. 미국의 51개 주 검찰과 연방검찰, 연방거래위원회가 모두 동의하지 않는 한 동의명령제는 아무런 의미가 없다. 미국에서는 워낙 강력한 처벌을 전제하고 있기 때문에, 동의명령제는 검찰이나 연방거래위원회의 인력과 자원을 절약하면서 동일한 효과를 얻을 수 있는 수단이 된다.
반면 한국에서는 처벌 자체가 미약하기 때문에 동의명령제는 기업 측에 커다란 특혜가 될 가능성이 높다. 미국 기업들이 한국에 와서 영업을 할 때 아무런 수사권이 없는 공정거래위원회가 나서서 이래라 저래라하면 두 가지 선택이 있다. 만약 이익이 많이 남는 행위라면 공정위의 최종 심결을 받아 과징금 조금 내면 된다. 그것도 싫으면 불법행위를 중단하겠다고 약속하면 된다.
어떻게 광명천지에 동의명령제를 한미FTA 협정문에 넣어올 생각을 했는지, 필자로서는 정말 이해하기 힘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