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정생이 묘사한 예수는 멜 깁슨이 감독한 영화 <패션 오브 크라이스트>를 연상시킨다. 최후의 만찬부터 골고다 십자가에 못박히고 사흘만에 부활하는 동안의 모습을 표현한 영화다.
십자가에 못박히기 앞뒤 반나절의 모습을 두시간에 걸쳐 자세하고, 거대한 화면에 처절하게 그리고 있는데 마치 세밀화 같은 그림은 현깃증이 나게 잔혹하다.
가시관을 머리에 씌우고, 매질과 채찍질, 철사로 갈기고 살점이 저미고, 찢기고 , 피가 흘러 응고하고, 온 몸이 난자 되고, 무거운 통나무를 가파른 골고다 언덕으로 끌게하고, 오그라든 팔을 끈으로 당겨 펴고, 한 손에 못을 박고, 다른 손도 박고, 발을 포개 발등에도 박고, 십자가를 뒤로 엎어 뒤로 나온 못끝을 꺽어 박고, 구름하늘 아래 세워 박고, 그도 부족해 창으로 옆구리를 찌르고….
참혹한 수난을 냉혹히 만행의 증거처럼 눈앞에 들이밀어 보여준다. 할 말을 잃었다. 빈 자리 없이 꽉찬 객석은 숨소리 마저 없다. 가끔 아, 하고 탄성을 지르고, 입을 막고 눈을 가리고 고개를 숙인다. 더 이상 보지 못하고 자리를 출입문 밖으로 나가는 이도 있다.
영결식장에서 권정생의 삶을 잠시 돌아 보면서 예수의 삶과 다르지 않다는 느낌이 들었다. 예수의 고난은 몇 시간에 불과 했지만 권정생은 거의 평생을 가난과 전신결핵의 고통 속에 지냈다. 임종을 앞둔 몇 일간에 온 통증을 유서에도 나타냈다' 그 아픔은 주먹만한 송곳으로 찌르는 것 같다'고 했다. 순간 영결식장은 흐느꼈다. 주변에 흐드러지게 핀 토끼풀도 고개를 숙이고 눈물을 훔치고 어깨를 떨었다.
권정생에게 주어진 평생의 가난과 아픔은 전쟁과 분단에서 비롯된 수난이다. 그의 수난은 시대의 자본과 모순이 씌워준 가시관이요 내리 친 채찍이었다.
24살 무렵, 폐결핵에서 신장, 방광 결핵으로 전신결핵으로 번지면서 소변 횟수도 통증과 함께 잦아졌다. 가난으로 집나간 동생과 병수발과 노동으로 지쳐가는 어머니와 가족을 더 이상 고생 시켜드릴 수 없어 자살을 마음 먹고 교회당에가서 고통을 눈물로 부르짖었다.'주여', '주여'를 되풀이 하다 보면 어느새 '어이 추워' , '어이 추워' 로 바뀌고 지쳐 잠이 들어 온통 바지가 젖어 그대로 빳빳하게 얼어 버렸다.
버려진 바지를 어머니에게 빨리기가 죄스러워 어두운 새벽에 우물에 가서 손수 바지를 빨면서 걷잡을 수 없는 눈물이 흘러내렸다. 그렇지만 어머니는 그가 흘린 눈물의 열곱절 아니, 백곱절도 넘는 숱한 분량의 눈물을 흘리시고 괴로와 하셨다.
벌레 한 마리도 죽이는 것을 못 마땅하게 여기시며, 생명 가진것을 그토록 소중히 여기시던 어머니가 아들의 병치닥거리를 위해 산과 들로 약초를 캐고 메뚜기와 뱀과 개구리를 수천 마리를 잡아 먹였다고 한다.
권정생은 오랜 세월 병고에 시달려 왔다. 여러 사람에게 신세를 지고 살았다. 거지 생활을 할 때에도 깡통에 밥을 꾹꾹 눌러 담아준 식당 아주머니, 길에 쓰러져 있을 때 두레박에 물을 길러 주신 할머니, 배삯이 없어 공짜로 강을 건네주신 뱃사공 할아버지 같은 마음 착한 사람들이 있었기 때문에 살아 남을 수 있었다. 권정생이 죽음에서 가까스로 벗어 날 수 있었던 것은 정치인이나 부자가 아니라 가난한 주변의 이웃이었고 어머니였다.
19살 사춘기 무렵, 부산에 재봉기상점에서 일하면서 알게 된 친구 기훈이가 있었다. 돈이 생기면 헌책방에서 책을 빌어다 보는 것을 기훈이와 함께 낙으로 삼았다. 함께 <죄와 벌>을 읽고 울기도 했다. 그리고 기훈이가 말했다.
"나도 언젠가 라스꼴리니꼬프처럼 도끼로 사람을 때려 죽일지도 몰라. 그 땐 소냐처럼 먼 시베리아까지 함께 가줄 연인이나 친구가 있어야 할 텐데"라고. 기훈이의 말이 아니어도 우리는 너무 고독했고 따뜻한 이웃이 그리웠다고 했다. 그 해 기훈이는 자살한다. 그리고 일요일이면 성경책을 들고 교회당으로 걸어가던 착한 명자도 있었는데 창녀가 되었다. 이 때의 이야기를 동화'갑돌이와 갑순이'로 썼다.
권정생의 동화에 등장하는 인물들은 힘겨운 노동을 하고, 몸이 상하고, 가난과 폐결핵으로 죽어간다 . 모순 투성이의 역사와 사회가 낳은 불행한 고아들의 이야기가 담겨 있다. 소외되고 상처 받는 사람들의 모습을 있는 그대로 장식없이 풀어냈다. 그리고 고통 받고 있는 이들속에서 생명의 소중함과 사랑을 길어 올렸다.
권정생의 글은 동화라기 보다 삶의 고난 속에 피는 희망의 이야기다. 십자가를 끌고 골고다 언덕을 오르 듯 한자 한자 아픈 몸으로 힘겹게 써내려 갔다. 예수가 두 손발이 못에 박히는 통증 같은 아픔을 참고 남긴 이야기들이다.
권정생! 우리말로 풀면 바르게 살자!. 그렇게 사신 분이다. 그에 비하면 나는 그르게 산다. 백년을 넘기지 못하는 인생을 이렇게 살면 안되겠다. 그가 갔으니 더욱 정신차리고 살아야 겠다. 그리고 권정생을 너무 모른다. 이제 겨우 조금 알 뿐이다.
톨스토이 민화집 가운데 사람은 어느 만큼 땅이 필요한가라는 이야기다. 천 루불을 내고 해가 질 때까지 돌아오면 그 둘레 만큼 땅을 살 수 있다는 거다. 한 농사꾼이 하루종일 들판을 달려 해질 때 겨우 돌아 왔지만 너무 욕심을 많이 내어 지쳐 쓰러져 죽고 말았다. 죽은 다음 그가 묻힌 땅은 사방 칠십 센티미터 밖에 되지 않았다. 지금 세상이 그런 꼴이다. 욕망과 돈과 이기가 세상을 양극으로 몰고 싸움과 죽음으로 몰고 있다.
권정생은 참 바르고 소박한 공산주의자다. 인간의 생존 경쟁은 재물을 많이 차지한 부자들 때문이다. 부자가 없으면 가난도 없다. 강대국 때문에 약소국이 생기고 잡아먹기 때문에 잡혀먹는 거다. 아프리카는 흑인 땅, 아시아는 아시안 제민족들의 땅, 아메리카는 인디언들의 땅이다.
권정생은 프란츠 파농이 '백인은 흰가면을 쓴 악마'라 말한 것처럼 미국은 약탈 행위를 멈추고 빼앗은 것들을 본래 주인에게 되돌려 주어야 한다고 했다.
모두가 원위치로 돌아와 가난을 지킬 때 비로소 평화롭고 행복할 수 있다고 했다. 그래서 그는 어렸을 때 불렀던 노래처럼 평생을 가난하게 살았다. 가난이란 바로 함께 사는 하늘의 뜻이라 믿었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