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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차는 내가 딛고 선 바닥을 흔들며 왔다. 그러나 느렸다. 안전모를 쓰고 기차 대가리에 매달려서 오는 이들은 기차에서 뛰어내려 철로에 나와 있는 장애물을 걷어냈다. 기찻길 앞 살림집에 매어진 개는 선로 위에 앞발을 걸치고 있었는데 기차에 가려서 보이지 않았다. 어느 집 문을 두드리던 젊은 남자도 집으로 들어갔다.
기차는 내 눈앞으로 지나고 있었다. 기차는 길었다. 한 자리에 서서 기차 칸이 계속 바뀌는 것을 지켜보았다. 어릴 때 큰물(홍수) 지고 나서 격하게 흘러가는 집 앞 냇물을 볼 때처럼, 몸으로 속도감을 느낄 수 있었다. 떠밀려가는 것 같았다.
큰물은 돼지, 온갖 살림살이, 커다란 나무까지 쓸어버렸다. 피라미와 가재가 사는, 여름 내내 아이들이 노는 냇가의 성정마저 바꿔놓았다. 집과 집을 이어주는 길까지 잡아먹고서 흙탕물이 되어 흘러가는 냇물을 구경하던 나는 초등학교 2학년이었다.
"지영아, 다음에는 기차를 타보자이"
시골 학교에는 농번기 방학이 따로 있었다. 나는 엄마가 고르고 고른 땅콩과 고추를 싼 짐을 들고서, 우리 학교 교감 선생님을 따라 광주에 갔다. 2층 집에 처음 들어가 보았다. 집 안에 목욕탕이 있는 '장관'도 보았다. 오랜 세월 도시에 대한 이미지는 그 때 본 광주가 다였다.
교감 선생님은 사흘 동안 나를 데리고 동물원, 서점, 양동 시장, 음식점에 다니셨다. 지금 내 아이 나이였던 나는, 나흘째 되는 날 아침에 엄마 보고 싶다고 울었다. 교감 선생님은 우리 집으로 바래다주는 버스에서, 내가 신은 빨간색 말표 구두에 앉은 먼지를 닦아주며 말씀하셨다.
"지영아, 다음에는 기차를 타보자이."
교감 선생님은 다음 농번기 방학이 오려면 멀었는데도 우리집에 오셨다. 그 때 엄마는 논일을 마치고도 바로 집에 올 수 없었다. 집에서 자식들이 밥 때를 기다리는 것처럼, 소도 굶고 있었다. 엄마가 어두컴컴한 논두렁에서 소 먹일 '깔'을 베고 돌아왔을 때에 선생님은 불도 안 켜고 토방에 앉아 계셨다.
"제가 오늘 다른 학교로 발령이 났는데 부탁이 있어서 왔습니다. 지영이를 꼭 갈키씨요."
'은하철도 999'처럼 비현실적인 기차, 군산 페이퍼 코리아선
3년 뒤에 우리집은 이사 나왔다. 처음에 엄마는 시골 살 때처럼 돼지를 키우셨다. 그 다음에는 밥집을 하고, 다시 이사한 곳에서는 일용직 잡부가 되셨다. 그 뒤로 엄마는 이 세상이 돌아가는데 필요한, 낮은 곳에 있어서 그 값어치를 제대로 쳐주지 않는, 숱한 일을 하셨다. 우리집 4남매를 '갈켰다'.
나는 대학 입학시험 끝나고 처음으로 기차를 탔다. 일부러 밤기차를 타고서 친구를 보러 다녔다. 아이가 아기였을 때는 둘이서 기차여행을 했다. 스위스에서 프랑스로 넘어가는 고속철도 안에서는 이성복 시집을 읽으며 폼도 잡았다. 그런데도 기차와 마주치면 한구석이 빈 것 같았다. 기차에 대한 결락을 느꼈다.
몇 해 전에 살림집 댓돌 아래로 기차가 지나다닌다는 얘기를 들었다. 안드로메다에 닿기 위해 우주 정거장을 날아다니는 '은하철도 999'처럼 비현실적인 기차, 군산 페이퍼 코리아선. 군산역에서 공장 사이만 오가는 전용선이다. 하루 한 번 종이 원목을 싣고 들어갔다가 완제품을 싣고 나온다.
나는 기차가 지나는 것을 직접 보려고 했다. 그러나 기차 오는 시간은 정해져 있지 않은 모양이었다. 기찻길에 살고 있는 이들조차도 "즈그들 맘 내킬 때 오제. 그래도 하루에 한 번 이상은 와"라고 하셨다. 기차가 지나다니는 철로 앞 살림집에는 장독대도 있고, 빨랫줄에는 아기 기저귀도 있었다.
바람은 맵지만 차창으로 들어오는 햇볕이 따스하던 날에는 한 아주머니가 나를 집 안으로 이끌었다. 아주머니는 보일러를 때지 않아서 춥다고 나보고 침대 위에 올라앉으라고 했다. 내가 커피를 마시면서 아주머니 가족사진을 보고 있는데 침대 광고에서처럼 들고 있던 찻잔이 흔들렸다.
페이퍼 코리아 공장으로 들어갔던 기차가 다시 군산역으로 돌아가는 소리였다. 나는 들어왔던 문 쪽으로 뛰었다. 다리가 불편하다는 아주머니가 빛의 속도로 나를 따라와서 "문 못 열어. 다친당게" 하셨다. 술 먹고 전봇대에 부딪히기 직전에 고개를 든 것처럼, 기차가 존재감 있게 내 눈앞으로 지나갔다.
선생님, 넓은 세상 보여주셔서 고맙습니다
비 그친 저녁, 바람이 눅눅하게 부는 때에는 아이와 둘이서 페이퍼 코리아선에 갔다. 아이는 차에서 잠들었다 깬 것도 아닌데 '우리 군산'이 맞느냐고 물었다. 우리가 철로 위에서 발걸음을 옮길 때마다 개들은 짖었다. 아이는 더 가지 못하고 안내문을 읽었다. 철로 위를 함부로 건너면 벌금을 물린다는 글을 소리 내서 읽고는 다른 말을 했다.
"엄마는 왜 나를 걱정시켜? 여기를 건너면 직장을 잃는대."
한밤중의 페이퍼 코리아선은 고즈넉했다. 살림집 창문 사이로 흘러나오는 불빛들은 어릴 때 심부름 가던 옛집들을 닮아 있었다. "옛씨요, 엄마가 갖다 디리라고 했어라우"라고 말하면서 방문이 열리기를 기다려도 될 것 같았다. 불도 안 켠 우리 집 토방에 앉아서 엄마를 기다리셨던 교감 선생님한테 하지 못한 인사를 올려도 될 것 같았다.
"교감 선생님, 저한테 넓은 세상을 보여주셔서 고맙습니다. 저는 엄마가 갈켰는데도 해찰을 하는 바람에 겨우겨우 밥벌이를 하는 사람이 되었어요. 그 옛날, 선생님이 저에게 태워주고 싶으셨던 통일호나 무궁화호는 사라져가고 있지만 저는 선생님이 생각나요. 그래서 기차도 많이 타 봤어요. 선생님, 정말 고맙습니다."
아이와 나는 기찻길 가로등빛이 닿는 자리에 쭈그려 앉았다. 철로 위를 기어 다니는 민달팽이 숫자를 셌다. 헤아릴 수 없을 만큼 많아서 세면서도 자꾸 헷갈렸다. 그러나 정확히 '백만 스물두 마리'였다. 대규모의 민달팽이들은 기차가 달리는 길 위에서도 자신들의 고유한 속도를 잃지 않고 제 갈 길을 가고 있었다.
덧붙이는 글 | <철도와 함께 떠나는 여행>에 응모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