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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작은 섬유회사에서 근무를 하던 때였다. 평생 직장이라고 의심치 않았던 회사가 외환 위기의 한파로 부도가 나 버렸다. 기숙사에서 생활하며 지내고 있던 터라 산설고 물설은 그곳에서 오갈 곳 없는 가랑잎 신세가 되었다.

"어찌됐든 버텨라, 버티는 놈 이길 재간은 없는 것이다"하던 엄마의 말이 귓전에 맴돌았다. 하지만 쫓겨나는 것이 아니라 저절로 나가야 하는 마당에 엄마에게 했던 다짐은 아무 소용이 없었다.

어찌됐든 내일까지는 나가달라는 말에 짐을 대충 챙겨 놓았다. 근 사년여 동안 등 붙이고 지낸 곳이지만, 옷가지를 챙긴 가방은 너무나 보잘 것 없기만 했다. 기숙사에서의 마지막 밤은 들려오지 않는 기계음만큼이나 적막이 감돌았다. 어디로 가야 할지, 무엇을 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새벽녁 누군가 기숙사 문을 두드려댔다. 해도 뜨기 전인데 그 새를 못 참아 내쫓으려나보다 싶어 나가보니 사촌언니와 형부라는 사람이 서 있었다. 생전 처음 보는 사촌언니였다.

언니는 엄마의 전화를 받았다며 언니네 집으로 가자고 했다. 짐을 받아주겠다는 형부의 손에 작은 가방 하나만을 건네니, 형부는 어이없는 표정이었다. 그렇게 사년여를 내 집처럼 생활하던 기숙사를 떠나왔다. 그리고 들어간 곳이 언니네 옥탑방이었다.

컨테이너를 올려서 만든 옥탑방은 쫓겨나지 않아도 된다는 안도감과 처음 접해 보는 생소함때문인지 신기하고, 재밌고, 아늑하게 느껴지기까지 했다. 물론 그 착각은 하루 해를 넘기지 못했다. 오뉴월 땡볕에 하루 종일을 내어말리듯 드러나 있던 컨테이너는, 해가 넘어가고 언니네 수퍼에서 하루종일 잔심부름을 해준 뒤 들어가보니 그야말로 생생한 찜통이었다.

잠을 자는 건지, 잔다는 명분하에 나 자신을 찌는 건지 알 수 없는 밤을 보내고 아침에 보니 얼굴이 호박만하게 부어 있었다. 그래도 그땐 그나마의 옥탑방도 내겐 감사했다. 더 이상 갈 곳이 없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나도 편한게 뭔지, 어떤게 안락함인지 아는 사람인지라 옥탑방에서의 후텁지근하고, 짜증나는 고단함에 서서히 질려가고 있었다. 게다가 생면부지인 사촌언니네 집에서 기거하는 일은 생각보다 더 고달팠다. 물론 언니는 나 같으면 그러지 못할 만큼 나에게 참 잘해줬다. 그것이 더 부담스러웠는지도 모른다.

그러는 사이 계절은 여름에서 가을을 넘어 겨울에 접어들어 있었다. 수퍼에서 잔심부름을 해주는 것이 고맙기는 하지만, 그렇다고 월급을 주면서까지 처제를 데리고 있을 수 없다는 형부의 충고대로 몇 달 전부터 근무를 하면서 틈틈이 따놓았던 에어로빅 자격증으로 강사를 했다. 또 밤에는 시내 모 스포츠의류점에서 밤 10시까지 아르바이트를 하고 있었다.

많지 않은 금액이지만 열심히 모아 작은 전셋방이라도 하나 구하는 게 목표였다. 하지만 채 몇 달을 다니지도 못하고 체육관마저 문을 닫게 되었다. 비관이란 걸 처음 맛 보았던 것 같다. '왜 난 이렇게 재수가 없을까?' 며칠을 컨테이너 안에서 나오지도 않고 고민했다.

이곳을 떠나야 할 때가 왔음을 알 수 있었다. 내게는 사년간의 안락에서 벗어나 색다른 변화가 필요했던 것이다. 하지만 이대로 누군가가 나를 변화시켜주기를 바라는 건 옳지 않다는 것도 알았다. 모자를 눌러썼다.

그리고 무작정 대구역으로 향했다. 부산행 막차표를 끊었다. 기차에 올라탔을 때 몸은 천근만근이었지만, 기분만은 최고였다. 겁이 많아 화장실 갈 때도 꼭 문지기를 대동했던 나였다. 세상이 험하다는 이유로 그 흔한 여행 한 번 해본 적도 없던 나였다. 언제나 덜 가진 현실을 탓하며, 젊음이라는 특권도 누리지 못한 채 누군가를 탓하기 바빴던 나였다.

그런 내가, 혼자서 기차를 타고 여행을 계획하고, 또 다른 내 삶을 위해 잠시 휴식을 갖게 된 것이다. 그 시간에 그런 기분으로 뭔가를 먹는다는 건 조금 무리인 듯했지만, 나는 기차여행의 묘미인 계란과 콜라를 사서 먹고 마셨다. 앞으로는 어떻게든 나 혼자서 이 현실을 헤쳐나가야 한다고 다짐하며…. 그럴려면 어떤 고난에도 내 몸이 먼저라는 걸 가르치듯 그것들을 먹었다.

며칠째 아무것도 먹지 못한 뱃속에 들어간 그것들은 금세 밀려오는 허기를 잠재웠고 나는 든든해진 뱃속으로 창 밖 세상, 모두가 잠들었지만 또 누군가는 열심히 세상을 향해 도전장을 내미는 창 밖 어둠을 여유롭게 응시할 수 있었다.

그때의 착시현상은 나를 즐겁게 했다. 달이 나를 따라오고, 뿌연 가로등이 나를 따라왔다. 깜빡이며 멀어져가는 자동차 전조등은 나를 향해 응원의 메시지를 보내는 듯했다. 기차가 부산역에 도착했을 때는 아주 이른 새벽이었다. 막상 기차를 타고 이곳까지 오긴 했지만 마땅히 갈 곳이 없었다.

자판기 커피를 한 잔 뽑아서 마시고 주위를 둘러보니 그제야 그곳의 풍경이 제대로 눈에 들어오는 듯했다. 이 시간에도 누군가는 바삐 움직이고, 세상도 바삐 돌아가고 있었다. 그 중에서도 시간이 멈춰버린 세상에 들어온 듯 대합실 의자에 길게 누워 아침을 기다리는 사람들의 정지된 모습이 나를 사로잡았다.

그 기분을 탐하고 싶은 충동이 일었다. 항상 자던 곳에서 자고, 덮던 이불만 덮고, 가던 길만 더듬어 다녔다. 그 룰이 깨어지는 날 마치 내 자신마저도 깨어지는 듯 의자는 앉는 곳, 침대는 눕는 곳이라고만 생각해온 내게 대합실 의자에 길게 누운 사람들은 '그러니까 피곤한 거야'라고 야유라도 퍼붓는 듯했다.

모자를 더 푹 눌러쓰고 대합실 의자에 비스듬히 기대어 누웠다. 누워서 보는 세상은 서서 보는 세상과는 달랐다. 바삐 걷는 사람들의 가여운 신발들이 꼭 두 시간 전까의 내 모습 같았다.

저리 바삐 걸어 어디들 갈까? 그곳에 가면 그토록 바라는 뭔가가 진짜로 있을까? 학교를 졸업하고 단 하루도 쉬는 날 없이 열심히 일을 해왔다. 일을 해서 받은 돈은 단 한 푼도 허투로 써본 적 없이 정해진 곳에, 정해진 양만큼 쓰고 모으고 또 아꼈다. 그래도 결국 남는 건 오갈 데 없는 가랑잎 신세뿐인 것을.

대합실 스피커에서 해운대로 가는 첫차가 5시 30분에 있다는 방송이 흘러나왔다. 무언가에 이끌리기라도 한 듯 표를 끊었고, 나는 또 기차에 올라탔다. 달려갈수록 알싸하게 달려드는 바다 내음에 풀어진 해면같던 머릿속은 맑아지고 덩달아 서러움도, 두려움도 모두 달아나는 듯했다.

고향의 냄새였다. 희망의 냄새였다. 겨울의 새벽바다는 꽤 매서운 바람을 일으키고 있었지만 볼에 와 닿는 바람은 나를 움츠려들게 하기보다는 움츠려든 가슴에 펌프질을 하는 듯했다. 아버지도 이 햇살에 매일 아침 살아갈 용기를 끌어올리셨던가 보다.

수평선 너머에서 서서히 떠오르는 아침해를 보면서 경외심에 저절로 눈이 감아졌다.
두 손이 모아졌다. 누군지도 모를 하늘님을 향해 기도를 올리고, 내 손 안에 들어오는 모래알을 잡아올렸다.

"그래 살아보자. 떠나보자. 반겨주는 이 하나 없어도 나는 또 헤쳐나갈 것이고, 살아갈 것이다. 그러다 보면 단단해지겠지…."

크리스마스 캐럴이 울려퍼지던 이브 저녁에 난 그렇게 사년여를 살았던 도시를 떠나왔다. 그리고 지금도 많이 힘들 때면 모자 하나 푹 눌러쓰고 무작정 기차에 올라탔던 그 해 겨울을 기억한다.

그 어두운 창 밖을 기억하고, 대합실의 웅성거림과 낯섬을 기억한다. 내 손 안에서 살며시 빠져나가던 그 모래알들을. 서러움처럼 생생하기 만한 그 모래알들의 감촉을 기억한다.

그리고 이제 난 더 이상 혼자가 아니다. 그것이 오늘도 나를 살게 한다. 해운대행 첫차 그리고 해운대의 바닷가. 지금도 잘 있는지 안부를 전해본다.

덧붙이는 글 | "철도와 함께 떠나는 기차여행" 응모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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