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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문익환 목사 시비 제작 중인 임옥상 미술가
ⓒ 이정환
쉽게 생각하면 쉽고, 어렵게 생각하면 어려운 일. 문익환 목사에게 '통일'이 그랬을까. 적어도 1989년에 '잠꼬대 아닌 잠꼬대'라는 시를 통해 '늦봄'은 우리에게 그렇게 말했다. 그리고 그 해 3월 문 목사는 훌쩍 '평양으로 가고 말았다'.

"이 땅에서 역사를 산다는 건 말이야. 온 몸으로 분단을 거부하는 일이라고. 휴전선은 없다고 소리치는 일이라고. 서울역이나 부산, 광주역에 가서 평양 가는 기차표를 내놓으라고 주장하는 일이라고. 이 머리가 말짱한 것들아. 평양 가는 표를 팔지 않겠음 그만두라고. 난 걸어서라도 갈 테니까. 임진강을 헤엄쳐서라도 갈 테니까."

임진강에서 가까운 도라산역에 세워질 문익환 목사 시비에 새겨질 '늦봄 정신'이다. 시비 제막식이 열리는 다음 달 3일은 공교롭게도 문 목사가 태어난 날(1일)과 이틀 차이. 문 목사가 살아있다면 아흔 살 되는 해에 열리는 뜻깊은 행사다.

도라산역에 세워지는 '늦봄' 시비

▲ 1991년 문익환 목사와 함께 한 임옥상 미술가. 암울한 현대사를 보여주는 사진이다.
ⓒ 임옥상 제공
늦봄 시비 제작을 맡은 미술가 임옥상 대표(임옥상 미술연구소)에게도 그렇다. 1980년대에는 전투적인 민중 미술가로, 90년대 이후 "하늘과 땅이 모두 내 캔버스"라며 미술과 대중과의 거리를 좁히기 위해 실천하는 예술가로 잘 알려진 임 대표. 지난 22일 서울 평창동에 있는 작업실에서 '늦봄'과 '6월'을 주제로 임 대표와 만났다.

- 시비 제작을 맡은 동기는?
"내가 해야 된다는 사회적 합의가 있었던 것 같다(웃음). 너무 당연하게 받아들였다. 89년도에 목사님 방북 그림을 그렸는데, 그렇게 나한테 감동을 준 인물은 처음이었다. 굉장히 신선하고 아주 멋진 일 아니었나. 불가능해 보이는 행동을 옮긴 것이니까. 어디 감히 평양을…. 사회 전체를 뒤집어놓을 사건이었다. 이번 시비 제작도 나에게는 굉장히 영광스러운 일이다."

잠깐 임옥상 대표의 '하나됨을 위하여'를 소개하지 않고 넘어갈 수 없다. 이쪽일까, 저쪽일까. 하여튼 두루마기를 입은 문 목사가 막 철조망을 넘으려는 순간이다. 철조망 앞에는 진달래들이 피어 있다. 임 대표에게 당시 작품 구상 과정을 물었다.

"김용택 시인과 회문산을 함께 등산한 적이 있다. 산을 오르다가 길을 가로막은 철조망과 만났다. '여기 철조망을 왜 쳐놨지?'하고 그냥 넘어 올라갔다. 그리고 김 시인에게 문익환 목사 방북을 작업할 것이라고 말했다. '멋있는 생각이야'라고 하다, 갑자기 '진달래도 함께 그려주면 안 되겠냐'고 부탁하더라. 그러더니 '이렇게 지천으로 핀 진달래를 보며 좀 느껴지는 것 없냐'고 묻는 거다.

정말 만발한 진달래를 보면서 '많이 피었구만, 뭐'라고 답하니까, '진달래는 말야. 응달에만 피는겨'라네? 진짜 양지에는 얼마 없고, 대부분이 응달에 밀집해 있었다. '불쌍한 사람들은 죽어서도 음지에서 피는데…. 음지에 아무 것도 없으면 얼마나 어둡고 추워 보이겠냐'.

'고맙다'고 하고 내려오는데, 또 이 놈의 철조망이 있는 거다. 팔짝 뛰어 넘는 순간, '맞아, 문 목사님이 평양에 간 것도 이렇게 분단을 팔짝 뛰어 넘은 것 아니냐. 어떻게 보면 간단한 거다. 분단이란 게 생각만 바꾸면 되는 것 아니냐. 우리들이 그런 생각을 가져야 통일도 더 쉬워지는 것 아닐까'는 생각이 팍 들더라. 그래서 사뿐히, 춤추듯이 넘는 장면을 그리게 된 것이다."

- 그리고 목사님과 만난 적이 있나?
"1991년에 호암 갤러리에서 <중앙일보> 주최로 초대전을 했다. 민중미술작가에게는 이례적인 일이었다. 그 때 목사님 그림을 전시하려고 했는데, 못 걸게 하더라. 그림까지 가져갔는데…. 아주 기분 나빴다. 목사님께 '죄송합니다, 못 걸게 됐습니다' 그랬더니, '괜찮아, 괜찮아. 그렸으면 됐지, 뭐"라고 말씀해 주시더라. 목사님의 씁쓸한 미소를 잊을 수 없다."

- 목사님은 작품을 보고 뭐라고 말씀하시던가.
"아주 좋아하셨다. 작품 설명을 들으신 목사님께서 '맞아, 나도 그렇게 가볍게 생각해'라고 말씀하시더라."

"늦봄 시의 핵심은 경쾌함"

▲ 문익환 목사 시비 시안
ⓒ 임옥상 미술 연구소
- 이번 시비에 목사님의 '잠꼬대 아닌 잠꼬대'를 넣기로 한 것과도 관련 있어 보인다.
"목사님이 경쾌한 행보를 하셨던 것 같다. 시도 매우 경쾌하지 않나. 아주 평이하지만, 내용은 다 담고 있지 않나. 누구나 다 이해할 수 있고, 말이 경쾌해서 마치 춤추는 것 같다."

- 그럼 지난번 '늦봄 문익환 시 낭송의 밤'에서 "목사님 생애를 대지를 뚫고 나오는 '말씀의 춤'과 '말씀의 기둥'으로 형상화하겠다"고 했는데, 그 말의 뜻은 무엇인가?
"춤추는 언어, 글들이 춤추면서 올라오다 보니까 말씀의 기둥이 되는…. 글자는 다 배경이 있어야 되지 않나. 벽에 쓴다든가, 종이에 쓴다든가. 하지만 문익환 목사님의 시는 그렇지 않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디 붙어 있는 시어가 아니라, 살아 움직이는, 민중의 바다, 민중의 공간 속에 살아 움직이는 시어. 그래서 대지 위에 글자를, 공간에 글자를 썼다."

- 이번 시비 제작의 핵심이 '경쾌함' 같다.
"경쾌한 행보다. 너무 무거우면 행동하기 어렵지 않나. 목사님에게서는 종교인의 색채 같은 거부감을 느낄 수 없었다. 당시 많은 분들이 통일 운동을 했지만, 목사님이 통일 운동 대중화에 굉장한 기여를 하셨다고 본다."

- 일부만의 통일 운동으로 접근하지 않았다?
"그렇다."

- '임옥상의 미술 철학'과도 통하는 부분 같다(웃음).
"일부 능력 있는, 뭐- 전문가들, 무슨 천부적인 재능을 가진 사람들의 전유물처럼 신비화시키고 독점하려는 흐름이 있다. 아주 못된 거라 본다. 자기들의 전유물로 여기는, 자기들의 이익을 배가시키기 위한 압력 단체를 만드는 일종의 '세팅' 아니겠나. 나는 거부한다. 만인은 예술가다.

물론 미술계만의 문제는 아니다. 무슨 슬로건이나 이데올로기를 통해 혹세무민하는 현상이 재계·노동계·운동계, 다 있다고 본다. 이런 것들을 어떻게 허무느냐, 사회 모든 부분의 가장 중요한 화두가 될 수 있다. 그것이 바로 민주주의 출발점이 아닐까."

1987년 6월, 역사의 현장에 임옥상 대표도 있었다. 주요 활동 무대가 전주였던 임 대표는 "워낙 급박하게 돌아가는 상황"에 동참하고자 서울에 와 "명동에서, 서울역에서 사람들이랑 엄청 도망 많이 다녔었다"고 당시를 회고했다.

- 6월 정신을 무엇이라고 보는가.
"얼마나 무서운 시절이었나. 그런데도 모두들 별로 무서움을 느끼지 않는 것 같았다. 마치 무엇에 씌운 것처럼, 마치 메마른 땅에 들불이 피어오르듯이, 그렇게 불타올랐던 것 같다. 어느 누가 시켜서 그렇게 했나? 아니었다. 봄에 꽃이 하나 둘 피기 시작하지 않나. 나무 새싹도 스스로 나오지 않나.

모두가 봄을 역사해야 봄이 온다는 것. 이것을 6월에 느낀 것 같다. '나 혼자 잘 났다거나 내 역할만이 중요하다는 것들을 버려야 한다. 나는 하나의 작은 나무고, 하나의 씨앗일 뿐이다. 모두 같이 피어날 수 있도록 하는 것이 중요하다'. 6월이 나에게 던져 준 교훈이다."

"모두가 봄을 역사해야 봄은 온다"

▲ 문익환 목사 시비를 제작 중인 임옥상 미술가
ⓒ 이정환
- 그런데 '6월 정신이 화석이 됐다, 비석처럼 기념되는 것 같다'는 말이 나오고 있다.
"민주화기념사업회에서 '기념'이란 말을 뺐으면 좋겠다는 말을 하곤 한다. 마치 박물관에 집어넣는 것 같은 느낌이 든다고. 그들이 일을 잘못 한다는 얘기가 아니라, 다 끝난 것을 기념하는 듯한 느낌이 들어서다. 이제 민주주의가 발아 또는 걸음마 단계 아닌가.

가는 방향으로 시선이 가게 마련이다. 그런데 자꾸 사람들이 뒤를 쳐다보는 것 같다. 걸어가는 데 6월이 뒷받침돼야 하는데, 걸음을 멈추고 자꾸 6월을 뒤돌아본다. 삶 속에 6월이 있어야 하는데, 자꾸 6월 속에 삶을 집어넣다 빼곤 한다. 바람직하지 않다."

- 이유는 무엇일까?
"이 시대 민중미술이 존재할 수 없나? 아니다. 고통받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데. 다만 70~80년대식으로 갈 수는 없지 않나. 우리가 제대로 못 찾고 있기 때문이다. 노동 운동도 마찬가지다. 자신들의 권리는 주장하면서 주위에 고통받는 비정규직에 대해 배려가 없다면, 그건 경직된 노동자 세상이다.

모두 '이익집단화'됐다. 그리고 87년 정신을 얘기하니, 누가 설득력 있게 듣겠나. 감동이 없지. '그래, 너희가 군부독재 무너뜨렸다. 그래서? 지금 너희들이 뭐하고 있는데? 분배? 평등? 고통받는 민중을 위해 뭘 했는데?'란 질문에 별로 한 것이 없단 말이죠. 노무현 하나 뽑아놓고서."

- 그럼 비석은 어떻게 존재해야 할까?
"비석이 나쁜 것은 아니다. 기록이나 보존 그리고 우러러보는 '기념' 다 좋다. 하지만 그걸로 끝나면 안 된다는 것이다. 자꾸 비석이 뒤돌아보게 만들고, 걸어가는데 걸림돌이 되면 문제가 있다. 비석도 여러 종류다. 이순신 장군 동상처럼, 높은데 앉아서 '이 놈들!', 그럼 밑에서 '어구구'(웃음). 이런 문화가 문제라는 것이다. 살아갈 '앞으로'를 보고 가는데, 비석이 함께 살아 숨쉬어야 한다는 것이다. 6월 항쟁이 시대에 맞게 새로운 문화로 재창조되야 한다는 것이다. '문화화'가 필요하다."

"이명박·박근혜가 문화를 알겠나"
그가 손학규를 지지하는 이유

ⓒ 이정환
마침 노무현 대통령 얘기가 나왔다. 물어보지 않을 수 없었다. 임 대표는 손학규 전 경기지사 지지모임인 '선진평화포럼' 공동대표다. 마침 인터뷰 도중 손 전 지사에게 전화까지 왔다.

- 뭐라고 말씀하던가.
"정말 오랜만에 전화 주셨는데…. 딱 들켜버렸네, 현장을(웃음). '어떻게 지내느냐고. 저녁이나 한 번 먹으면서 얘기 좀 나눠보자'고 하시더라."

- 선진평화포럼 공동대표다.
"왜 그거 하냐고?(웃음). 그 전에는 손 전 지사를 도와줄 수 없었다. 한나라당에 있는데 어떻게 도와주나. 그런 점에서 이번에 손 전 지사가 그에 대한 애정을 갖고 있는 사람들을 편하게 해줬다고 본다. 저쪽에 들어가 세력 싸움을 통해 결국 저쪽을 다운시키려는 생각을 가졌던 것 같다. 그런데 그게 불가능해지지 않았나.

그동안 사람들이 손 전 지사에 대해 안타깝게 생각한 만큼, 본인도 갈등이 얼마나 심했겠나. 이제 그 사람이 갖고 있는 덕목들을 충분히 사회를 위해 잘 쓸 수 있을 것이라 본다. 개인적으로도 인연이 깊은 사람이다. 파리 유학 시절부터 만났으니까, 30년이 다 되가는 인연이다. 하지만 말이다. 예술인의 한 사람으로 그런데 이름을 거는 것은 굉장히 힘든 일이다. 아무래도… 아, 참 착잡해요(웃음)."

- 확실히 짚고 넘어가자. 손 전 지사를 지지한다는 이야기 맞는가?
"대의명분으로 얘기하자. 이번 선거 역시 굉장히 중요하다. 우리나라의 재도약 여부가 이번 선거에 달려 있다고 본다. 그럼 기반은 무엇이냐? 나는 문화라고 본다. 그런데 이명박씨나 박근혜씨나 문화 쪽에 절벽 아니냐. 토목국가를 꿈꾸는 이명박씨, 아직도 자기를 공주로 생각하는 박근혜씨. 이런 사람들이 무슨 문화를 알겠는가."

#임옥상#손학규#문익환#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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