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월 1일. 이제 5월이다. 새로운 느낌이다. 긴 여행을 떠나면 날짜 가는 줄 잘 모른다는데, 이른 아침 일어나 일정표를 보고 10월이 시작되는 날이면 어떤 느낌일까 생각했다. 그날이 올까. 이제 시작인데 말이다.
값싼 호텔에 묵었더니 빨리 떠나고 싶어진다. 밤새 긁느라 숙면은 아니었고, 아침을 주는 곳도 아니어서 버스를 타자 싶었다. 치처잔(汽车站)은 예상보다 붐비지 않았다. 중국 우이지에(五一节)가 시작되는 날이니만큼 걱정이 조금 됐는데 다행이다.
우이지에는 노동절이다. 사회주의 국가를 건설하는 것이 중국공산당의 비전이니 황진지아(黄金节)중 하나임에 틀림없다. 중국은 우리의 설날인 춘지에(春节)와 10월 국경일인 궈칭지에(国庆节)가 3대 황금 연휴기간이다.
1999년에 제정한 이 제도는 개혁 개방 이후 사회 전반에 걸친 산업화로 도시로 간 가족이 고향으로 돌아갈 수 있는 하나의 기회가 생긴 것이다. 땅이 넓은 만큼 이동거리도 길다 보니 중국답게(?) 일주일 이상을 13억 인구가 한꺼번에 쉬는 셈이 된 것이다. 멀리 고향으로 가지 않아도 된다면 그것은 곧 휴가를 뜻하니 관광지에는 사람들로 넘쳐난다. 인구의 대이동과 여행지로의 집결이 곧 중국의 황금연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오전 7시 30분에 출발한 버스는 금세 카이펑(开封)에 도착했다. 1시간 30분 정도 걸렸으니 가까운 거리다. 날씨가 무더워졌고 사람들이 북적이기 시작하는 것이 카이펑 시내에 그대로 드러난다. 버스에서 내려 지도를 사고 시내 중심지 호텔 하나를 눈도장으로 정하고 택시를 탔다. 10분이면 도착할 거리인데 30분이나 걸렸다. 그것은 엄청난 두처(堵车), 즉 차가 막혔던 것이다.
카이펑에서 이틀을 묵을 예정이다. 그래서 호텔도 시내 중심으로 정했고 3성급 진타이삔관(金台宾馆)을 찾았다. 하루에 240위안. 연휴기간이라 좀 비싸다. 짐을 풀고 인터넷에 올린 글과 사진, 영상들을 살펴보며 오전을 보냈다.
거리는 황금주를 맞아 대대적인 세일행사를 하느라 북적댄다. 카이펑 역시 성벽으로 둘러싸인 도시인데 성 안은 차가 아주 많이 막힌다. 도로는 좁고 사람은 많으니 당연하다.
먼저 찾은 곳은 따시앙궈쓰(大相国寺). 이곳은 원래 전국(战国)시대의 위나라 신릉군(信陵君)의 사저였다가 북제(北齐)가 정권을 잡았던 남북조 시대인 서기 555년에 이르러 지엔궈쓰(建国寺)란 이름의 불교사원을 지었다가 불에 탔다.
이후 당나라 시대에 무측천에 의해 폐위됐던 예종이 다시 복위한 시점에 다시 지어진 이 사원은 폐위되어 상왕(相王)의 신분에서 황제의 자리를 계승하게 된 것을 기념하여 712년에 '대상국사(大相国寺)'라는 편액을 내렸다고 한다.
입구에 들어서면 수호지의 노지심(鲁智深)이 큰 나무를 뽑는 동상이 있다. 바로 상국사 부근 채소밭에서 노지심이 80만 금군의 교두인 임충(林冲)과 의기투합 의형제를 맺은 곳임을 알려주고 있다.
따시앙궈쓰 천왕전(天王殿), 대웅보전(大雄宝殿), 나한전(羅漢殿), 장경전(藏经殿) 순으로 둘러봤다. 각 건물마다 독특한 불상들과 나한상들, 기나긴 역사를 가름할 불교 장식들로 넘친다. 특히 천수관음상 앞에는 사진을 찍는 사람들이 많다. 그만큼 천수관음이야말로 대중들에게 인기가 많다.
물론 사람들의 발길만큼이나 자주 하얗게 피어 오르는 향기도 코를 자극하기에 충분하다. 향초를 피우는 냄새가 처음에는 약간 거북하긴 하다. 연휴이고 명절이라 좀 비싼 향초를 태우면 그 연기도 그렇게 나쁘지 않다.
역시 연휴가 되면 아이들의 천국이 되나 보다. 노지심 앞에서 서로 사진을 찍으려고 발버둥 하는 아이들, 천왕전 앞에서 청나라 복장을 입고 더위도 잊은 채 포즈를 취하기도 하고 어른들처럼 초를 피우며 예를 올리기도 하는 등 정말 상국사 안에 있는 아이들 보는 일이 참 즐거운 또 하나의 관광이기도 하다.
따시앙궈쓰를 나와서 삼륜차를 타고 카이펑푸(开封府)로 갔다. 사실 카이펑의 상징이라 할 곳이다. 빠오칭티엔(包青天)의 작두가 연상되는 곳, 그래서 기대가 크다.
카이펑푸는 북송시대 수도였던 이곳의 최고의 관청이었다. 동쪽은 관청이고 서쪽은 사당의 형태로 남아 있는 1.36만 평방미터 크기를 자랑하는 거대한 관청이라 할 수 있다. 양쪽으로 긴 성벽을 따라 깃발이 펄럭이는 모습이 그 옛날 그대로는 아니겠지만 서슬 퍼런 관청의 모습이 연상되기는 한다.
문을 들어서면 마당 한가운데 꽁셩밍(公生明)이 적힌 바위 하나가 위엄을 보이며 서 있다. 그리고 당시를 재연한 간단한 공연은 흥미롭다. 물론 당당한 카이펑푸의 빠오칭티엔은 공연이 끝나자마자 10위안을 벌기 위해 사람들과 사진을 찍어야 하지만 말이다.
먼저 동쪽을 보려고 이리저리 살피는데 사람들이 몰리는 곳이 있다. 사람을 태우고 한 바퀴 도는 가마에 맞춰 풍악이 울리고 있다. 카이펑푸 전체를 다 울리는 고음의 피리소리는 정말 축제를 즐기러 온 사람들에게 잘 맞는 놀이감이다.
날씨는 아주 무덥고 하늘은 맑았다. 카이펑푸의 크고 높은 건물들과 파란 하늘이 잘 조화를 이루니 보기에 좋다. 사람들이 스쳐 지나는 소리조차도 흐르는 땀이 떨어지는 소리에 묻힐 정도로 덥긴 하다. 무더위가 벌써 시작인가 걱정하면서 돌아다니다 보니 정말 시간이 많이 걸린다. 그만큼 넓다는 것인데 작은 호수도 있고 오르락내리락 하는 볼거리도 많으니 지루하지는 않다.
칭씬러우(清心楼)는 역대 카이펑푸의 푸인(府尹) 박물관인데 당시의 복장이나 거리 풍경 모형들이 볼만하다. 넓은 시야도 즐겁다. 마음껏 온 사방을 둘러볼 수 있는 곳이니 어찌 마음이 시원해지지 않겠는가.
뭐니 뭐니 해도 카이펑푸의 주인공은 검은 얼굴에 검은 수염을 휘날리는 빠오라오헤이(包老黑) 불리는 빠오칭티엔이다. 카이펑푸 안에는 그의 석상이 하나 서 있다. 늠름하고 온화한 모습의 석상을 보니 그의 인간적 체취가 물씬 풍기는 가슴 따뜻한 일화가 떠오른다.
어느 날 한 아이가 울고 있다. 그 아이는 병든 엄마의 약을 사기 위해 장사를 한다. 매일 빵을 기름에 구워 판다. 하루 종일 튀김 빵을 팔아 번 광주리 속의 돈을 바위 옆에 앉아 세니 동전 100개였다. 너무 기뻐 빨리 엄마 약을 사야지 했는데 아침부터 장사를 했던지라 피곤해서 바위에 기대어 잠을 잤다.
한참 후에 일어난 아이가 돈을 잃어버린 것을 알고 크게 울고 있던 것이었다. 마침 지나가는 빠오칭티엔이 자초지종을 듣게 됐다. 한참 곰곰이 생각한 그는 우는 아이에게 '내가 알겠다. 바로 이 바위 녀석이 훔쳐간 게로구나' 하며 바위에게 심문을 하기 시작했다. '바위야 바위야 너가 아이의 돈을 훔쳤지. 이실직고하거라!'하며 바위를 때리기도 하고 고함도 치고 그러는 중이었다.
주변에 있던 사람들이 모두 의아해 하는 게 당연했다. 그래서 사람들이 모두 '빠오칭티엔이 총명한 사람인 줄 알았는데 알고 보니 흐리멍텅한 사람이었군'이라 말하기 시작했다. 빠오칭티엔은 이 말을 듣고 크게 화를 내며 '내가 지금 바위에게 심문을 하고 있는데 어찌 하여 험담을 하느냐!'하며 '너희들 모두 벌로 동전 하나씩을 내거라!'라고 했다. 그리고는 사람을 시켜 대야에 물을 붓고 한 사람씩 동전을 던지라고 했다.
사람들이 어쩔 수 없이 동전 한 잎씩을 대야에 풍덩거리며 던지기 시작했다. 그러다 어떤 한 사람이 막 동전을 던지고 지나가자 아랫사람을 시켜 잡으라고 지시했다. 사람들이 영문을 모르고 있자 '네 녀석이 바로 도둑놈이구나. 저 아이의 기름기 묻은 동전을 훔친 게 사실이렷다!' 여전히 사람들이 의아해 하자 말하길 '보거라, 이 놈이 떨어뜨린 동전만이 수면 위에 기름이 뜨질 않느냐! 바로 아이가 잠든 사이에 훔친 게 분명하다!'고 하자 그제야 사람들 모두 말하길 '역시 빠오칭티엔은 총명하구나'라고 했다 한다.
카이펑푸 서편에는 지금의 감옥이라 볼 수 있는 라오팡(牢房)이 있다. 좁은 감옥 안을 사람들이 한 번씩 눈길을 던진다. 크게 유쾌한 장면은 아니지만 지은 죄를 반성하는 곳이니 차분해질 수 있다. 과거를 현재와 미래로 연결해 보게 된다면 역사는 감옥처럼 갇힌 것이 아니다. 마음을 열어 과거의 모습을 담고 또 담아내는 것이야말로 감옥으로부터 나와 미래로 가는 길이 아닐는지.
마지막으로 찾은 곳은 티엔칭관(天庆观)이다. 이곳은 카이펑푸 안에 있는 도교사원이니 당시 도교문화의 번성을 잘 알게 해준다. 싼칭디엔(三清殿)에 의젓하게 앉은 원시천존(元始天尊)과 거대한 벽에 새겨진 태극팔괘대(太极八卦台)와 오악진형도(五岳真形图)가 당시 호화롭던 도관(道观)의 모습을 담고 있어 흥미롭다.
카이펑푸를 나오면서 다양한 문화행사가 많은데 하루 종일 버티고 있을 수도 없어 안타까운 마음이 들었는데 넓고 시원한 빠오꽁후(包公湖)를 보니 한결 마음이 가볍다. 호수와 잇닿아 있는 카이펑푸의 전경이 참 다정하다.
카이펑푸 세 글자가 멀리서도 또렷이 보이는 회색 벽 왼쪽에 누군가 핸드폰 번호를 적어놓지만 않았다면 문화적 향기가 더욱 높은 13억 국민이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하며 호텔로 돌아왔다.
호텔에서 씻고 땀 식히고 나니 배가 고프다. 혼자 또 저녁을 먹어야 한다. 호텔로 돌아오면서 보니 시 한복판에 거리 식당들이 준비 중이었다. 야시장이 뜬다는 것이다.
양고기에 맥주 한 잔을 마시고 있는데 어디선가 통기타 반주에 노래를 부르는 소리가 들렸다. 중국노래다 당연히. 한 곡 부르는데 5위안. 대만의 인기가수 런시엔치(任贤齐)의 씬타이루안(心太软)과 대륙 출신의 최신 인기가수 팡롱(庞龙)의 량즈후디에(两只蝴蝶, 나비 두마리)를 신청했다.
2000년 10월, 처음 베이징에 온 날 새벽 12시가 넘어 똥즈먼(东直门) 부근 꾸이지에(鬼街)에서 마라롱시아(麻辣龙虾)에 맥주 마실 때가 생각난다. 허름한 스촨(四川) 식당에서 듣던 중국노래. 이국적인 뉘앙스가 은은한 불빛을 타고 느릿느릿 그러나 강렬하게 가슴을 타고 넘던 때가 문득 떠올랐다. 고마운 노래다. 외로운 여행길을 환하게 비춰주는 빛깔 나는 정서다. 푹신한 잠을 잘 수 있었다.
덧붙이는 글 | 이 기사는 http://blog.daum.net/youyue/10568405에도 실렸습니다. 오마이뉴스는 직접 작성한 글에 한해 중복 게재를 허용하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