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7년도는 ROTC 25기인 내가 임관하고 소대장의 임무를 해내기 위해 부대에 배치되는 해였다. 그러나 지금 생각해 보면 그보다는 6.29 전전 날의 소요진압을 위한 부대출동 명령과 나의 선택이 어우러진 고뇌의 기억이 더 크게 떠올려지는 것을 보면 다 같이 겪은 87년 6월 항쟁이지만 이렇게 잘 쓰지도 못하는 글재주를 알면서도 자판기를 두드려야겠다는 강렬한 느낌을 갖게한다.
그해 4월13일 오전 우리들은 원치않는 텔레비젼을 봐야했다. 국군통수권자 전두환 대통령의 직선제 개헌유보 기자회견이 방영되기 때문이었다.
그날은 도저히 점심을 먹을 수 없었다. 몇몇 동기생 소위들이 김해 공병학교 식당 앞 둔턱에 하나둘씩 모여들기 시작했고 말없는 침묵과 애꿋은 삘기대를 질겅질겅 앂어 툭툭 뱃어내는 모습을 통해 가슴의 진실을 그렇게 드러내며 서로가 느끼는 안타까움을 눈 빛으로 나누고 있었다.
이건 아닌데 라고 생각하면서도 정치문제에 대하여서는 너무도 무기력 해진 신분이 되어버린 캠퍼스 출신 초급 장교들은 어두운 미래를 토로하며 주어진 일정을 겪고 있었다.
초급장교인 소대장 기본교육(OBC과정)이 끝난 것은 그해 6월 중순, 이제 그해의 6월 항쟁이 중간쯤 다다르고 있을때였다.
나는 서울근교의 30사단에 배치되었다. 이 부대는 전방 사단의 예비부대이지만 국내 소요사태가 발생시 사태를 진압하고 수도서울의 치안을 담당하는 소위 충정 임무를 부여받고있는 부대였다. 특수병과인 공병부대도 그 임무에는 예외가 아니었다.
지름 5미리 강철로 엮어 만든 안면보호망과 적당히 구워 반달같이 휘어진 1미터 길이의 충정 진압봉을 가지고 지휘자의 구령에 마추어 "전진"하면 오른 발을 얼굴 앞에 까지 높이 들어올려 내려찍기 하듯이 폼을 잡고 일제히 기합소리 우렁차게 소위 천둥소리로 들리게 해야 휴식이 허락되는 소요진압 훈련 또한 피할 수 없는 임무였다.
6월 26일은 실제 출동명령이 떨어진 날이다. 물론 사병들은 6월 초부터의 텔레비젼 시청은 금지되어 있었다. 4시30분쯤 되었을까 연습이 아닌 실제상황 대기라는 긴급지시임을 확인한 나는 이제 올 것이 왔구나라는 생각을 하지 않을 수 없었다.
대학신문 기자 경력을 가진 나는 대학 2학년때 선배기자들의 특별한 지시에 못이겨 '전두환 매국방일 이렇게 생각한다'라는 박스기사를 쓰고 생전 겪지 못한 보안부대 경험을 한 바 있고 그보다는 이번 출동의 의미가 어떤 것인지에 대하여 조금은 정리가 된 상태였다.
독일 일본 기자들이 촬영한 비디오로 본 1980년 5월 광주에서의 대국민 학살행위를 몰래 봤던 캠퍼스에서의 기억은 실제상황이란 말과 겹쳐지면서 난 공항에 빠져버리게 되었다.
소대장 연구실로 들어간 나는 무조건 생각나는 것을 갱지 연습장에 쓰기 시작했다. 그냥 그 순간 떠올려지는 분들께 어떤 이야기라도 남기지 않으면 안 된다는 생각이 나를 그렇게하게 했다고 기억한다. 그것은 마지막 서신, 돌이켜보면 그것이 유서가 아니었나싶다. 엄마, 아버지, 누나, 동생들에게 보내는 서신에는 주로 그간 잘못했던것 못 해주었던 것, 그리고 이렇게밖에 할 수 없는 나를 용서하라는 내용이었다고 기억한다.
어찌나 잘못한 것이 많이 떠올려지는지 어머니가 늦게 낳아서 어렸을 때부터 잔병치레가 많았던 동생 종원이에게는 그냥 용서하라는 말을 몇번 되풀이했던 것 같다.
난 할 수만 있다면 병사들과 시민들이 적으로 만나는 일을 막고 싶었다. 아니 국민의 군대 소대장인 내가 그런 끔직한 일을 하는 모습은 도저히 용인할 수 없었다는 것이 더 맞는 말일 것이다.
눈물로 범벅이 된 편지를 모아 한 장의 봉투에 넣고 다이어리 책갈피에 넣었다. 그리고 책상 밑에 미리 마련해 놓은 1리터짜리 시너통을 만지작거리며 눈에 자꾸자꾸 아른거리는 엄마의 얼굴과 시위 중 최루탄을 맞고 쓰러져 핏물과 함께 흘러내리는 텔레비젼에서 본 연세대 대학생, 예전에 80년 5월 광주민중항쟁에서 보았던 장면들이 번갈아 보이면서 그 어떤 선택을 하지 않으면 안 된다고 여겼던 그때의 나를 지금 기억한다.
출동 명령과 동시에 난 그렇게 한다고 스스로 다짐했다. 소대장 연구실을 나와 소대로 들어가 무장 대기하고있는 병사들을 보면서 나와 저들, 그리고 국민사수의 소명을 수행해내야 한다고 믿는 장교인 나의 진정한 충정은 이렇게하는 것이라는 내 생각이 맞다는 신념은 더욱 굳어져 갔다.
출동명령이 내려지면 난 시너를 몸에 붓고 소대장실에 있다가 병사들이 중대 연병장에 모이면 "너희들은 국민의 군대다. 절대 국민들을 향해서 총질하면 안 된다" 이말이 내 마지막 목소리이기를 바랐다. 그리고 꼭 그렇게 하리라 꼭 그렇게 하리라고….
그렇게 흐르는 시간은 이미 순간이 되어버린 것 같았다. 해제 명령이 내려온 것은 대략 한시간 후인 5시30분쯤 이었다.
6월 29일 날 민정당 대통령 후보로 선출된 노태우 최고 대표가 100만명의 숫자로 불어난 시민항쟁의 심각성을 인식하여 중대한 발표를 한다는 소식을 듣고 출동명령이 취소된 이유를 알 수 있었다.
그리고 이틀 후 직선제 수용이 골자였던 6.29 선언은 시민운동도 군내 충정훈련도 더 이상 필요없게 했고 곧바로 그해 12월 대선을 향해 우리들을 주목하게 했다.
89년도 대위 이동균, 중위 김종대 그리고 취지에 동감한 3명의 초급장교가 연명으로 선언한 '군 명예선언' 사건은 87년도 6월을 겪은 나로서 정권을 다시 잡았으나 국회을 장악하지 못한 노태우 정권이 80년 5월의 진실이 드러나는 청문회를 치르면서 더 이상 밀리면 안 된다는 다시 말해서 다시 군이 동원될 수도 있으니 각오 단단히 하라고 선동하는 군내 잘못된 고급장교들의 남다른 충정의 의미를 걱정하면서 이를 누가 저지시킬 것인가 고심하다가 그래도 먼저 고민했던, 또한 수 명의 사병들의 양심선언을 군대생활하기 싫어서 한다고 왜곡해버리는 현실에서 그래도 잃을 것이 제일 적은 장교가 해야 한다고 믿은 한 초급장교의 자기 선언이었던 것이다.
덧붙이는 글 | 특이한 신분의 이야기도 이 란의 취지에 어울리지 않나 하는 생각에서 기억에 기대어 쓴 것이니 너그러운 이해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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