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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 졸이던 어머니와의 첫 나들이가 잘 치러졌다. 트럭에 어머니를 태울 때도 조마조마, 시동을 걸고 차를 출발시킬 때도 조마조마했지만 막상 도로로 차가 나가자 차창 밖으로 펼쳐지는 바깥 풍경을 보고 신이 나신 어머니 모습은 내 조바심을 다 없애고 계획한 하루 일정에 대한 자신감을 갖게 했다.
"저기 먹꼬? 꼬치밭 아이가? 여기는 벌써 모 싱겄네?"
"우리집 씬나락은 내가 다 쳤다. 솔솔 씬나락 잘 친닥꼬 불리댕깃따 아이가."
"창문 더 열어라. 안 춥다. 멀미? 개안타."
"못자리에 인자 물 떼거라. 그래야 뿌리가 어시지는 기다."
옛 기억도 떠올리고 우리 못자리 물 대는 지시까지 하는 어머니는 절에 안 가겠다고 뻗대던 아침과는 달리 십 몇 년만의 자동차 나들이에 소풍가는 아이처럼 즐거워했다. 초대받은 귀빈이라도 되는 듯이 "남의 절에 감스로 빈손으로 가믄 되것나?"라며 인사치레까지 하려고 하셨다.
새벽에 일어나서 부처님 오신 날이니 절에 가지 않겠냐고 했을 때 씨도 안 먹히다가 "나 같은 사람 일어서게 해 준다카믄 가지"로 바뀌더니 "절에 사는 부처님이 나 오줌이나 안 싸게 해 주믄 을매나 조컨노?"라고 바뀌었고 "니가 간다 카는데 내가 따라 가야지"하면서 시작된 나들이였다.
동사섭(同事攝) 수련을 지도하시는 스님이 계시는 절이라 동사섭 도반들이 많이 와 있었고 어머니를 보고 다들 극진하게 인사를 하고 용돈까지 봉투에 넣어 주는 사람이 있다 보니 절이라고는 난생 처음이지만 해 보라는 대로 합장도 하고 손뼉도 치면서 금세 잘 어우러지셨다.
스님이 법문에서 네 가지 부처님의 선물을 소개할 때 내가 공책에 글을 써서 보여주니 그때마다 어머니는 고개를 끄덕이셨다. '마음을 비워라', '남을 칭찬해라', '뭐든지 감사해라' 등등 내가 글을 쓰면 어머니는 글을 읽고 나서 스님 한번 쳐다보고 내 얼굴 한번 보고 그랬다.
걷지도 일어서지도 못하시고 하루에 너댓 번씩 오줌으로 옷을 적시는 어머니가 여행을 목적으로 집을 나선다는 것 자체가 만만한건 아니었다.
부처님 오신 날에 역사적인 바깥나들이를 하기로 작정을 하고 준비한 것이 근 3개월이었다. 트럭의 거친 진동에 견딜 수 있어야 하고 바퀴의자에서 내려 승용차보다 한참 높은 트럭에 올라갈 수 있는 근력도 키워야 했다. 10년 이상 방 안에만 계셨으니 바깥 공기에 몸이 익숙해지도록 연습도 해야 했다.
우박이랑 눈 내리는 걸 보고는 몇 십 년만에 처음이라고 하셔서 주워서 손에 쥐어드렸더니 열대지방에 사는 사람처럼 좋아했었고 바퀴의자를 타고 골목을 나가 위 아래로 봄나물 봄꽃들을 구경 다닐 때도 매만지며 거기에 얽힌 추억들을 되새기면서 좋아했었다.
마당 텃밭에 물주는 것도 몇 십 년만에 처음이요, 청국장 만들고 절구통에 찧는 것도 마찬가지였다. 어머니에게 처음처럼 다가오는 체험들이 계속되었고 그 연장선상에 이번 외출이 계획되어 있었던 것이다.
외출 준비에는 서울서 우리 집에 오면서 다 없앴던 기저귀를 다시 챙기는 것도 포함되었다. 작은 물병도 준비하고 손수건과 우산도 가져갔었다. 신기한 것은 대여섯 시간 동안 어머니가 오줌을 한 번도 안 누신 것이다. 집에 와서 기저귀를 빼내니 오줌이 한 방울도 비치지 않았다. 어머니는 부처님 덕인 거 같다며 이제 옷에 오줌 안 누실 거라고 했다.
매년 그랬듯이 올해도 스님은 모든 참석자들에게 사람 키만한 타올을 선물로 하나씩 주셨다. 돌아오는 길에 어머니 용돈 봉투들이랑 타올을 가리키며 내가 부러워하자 이렇게 말하셨다.
"내가 날라 댕긴들 누가 나 보고 이렁걸 주건노. 다 니 얼굴보고 중기지."
공덕을 남에게 돌리고 사리를 잘 이해하고 있는 어머니 모습이 흐뭇했다. 노인네가 이러기가 쉬운 일이 아님을 잘 알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