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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모님은 살아서 가만히 방 구둘만 지키셔도 등이 든든하제.'
결혼 전, 친정에서 할머니께 심심찮게 듣던 말이다. 그런 가정 교육을 받고 자라서인지 멀쩡하게 잘 다니던 직장을 그만두고 시골에 홀로 계신 아버님을 모시겠다고 낙향하는 남편을 말리기는커녕 한 술 더 떠서 '생각 잘 했다'며 맞장구를 쳤다.
그렇게 남편이 시골로 간 지 엊그제 같은데 어느덧 1년이란 세월이 훌쩍 지났다. 그 1년이란 시간은 남편을 시골 농투성이로 만들었고. 어쩌다 한 번 올라오는 그의 서울행은 애써 땀으로 지은 농사의 결실인, 양손에 들린 보따리가 그의 시골 생활을 대변한다.
말이 좋아 땀의 결실이고, 말하기 좋아 무공해 식품이지 그것이 우리의 입으로 들어가기까지 시골의 하루는 그야말로 몸으로 시작해서 몸으로 하루를 마감한다. 점점 까매지는 남편의 얼굴을 보며 처음에는 진정 우스워서 웃었는데, 살이 빠지며 겉늙어가는 모습을 보는 요즘은 가슴이 알싸하니 '생고생 하는구나' 하는 착잡한 심경이다.
진정 입에 발린 소리는 아니지만 "여보, 나도 시골 내려 가서 살까요?"라고 물어 보면 "당신은 시골 생활 못해. 그리고 하는 일도 있잖아. 아직은 나 혼자 할 만해요"라고 대답할 때면, 고맙다기보다 '우리 아버님은 참 효자 아들을 두셨구나' 하는 생각이 든다.
그래서 그런지 아버님은 원래도 건강하셨지만 요즘은 더 건강해지셔서 얼굴에 화색이 만연하시다. 읍내에 혼자 나가셔서 머리도 깎고 농협일이나 군청일도 보러 다니신다.
지난 봄에는 시제에도 함께 다녀오셨다. 91세라면 도저히 믿기지 않을 정도의 젊음(?)과 용기가 있으셔서 몸소 움직이시는 것을 좋아하신다. 아직도 산에 올라가 톱질을 하시며 기름 값 비싸다고 나무를 해서 보일러를 때신다. 힘들고 위험하다며 아들이 말리기라도 하면 "이렇게 움직이니 내가 아직 건강한 거야"라며 하루 종일 무엇인가 움직이신다.
나는 사람을 좋아해서 느닷없이 친구들을 데리고 시골에 내려갈 때가 종종 있다. 그런 며느리를 귀찮아하시거나 나무라기는커녕 따뜻한 밥을 짓고 된장국까지 끓여 놓으신다. 깨끗한 옷으로 갈아입으시고 마당에서 서성이며 며느리와 며느리 친구를 맞이하신다.
단풍이 곱게 물든 가을에는 백양사가 지척인 관계로 한 해 가을에 네 번이나 친구들을 데리고 갔지만 한결같이 반겨주시는 모습에 나는 은근히 친구들에게 아버님 자랑을 늘어놓는다. 따뜻한 방에서 잘 놀고 친구들이 떠날 때는 이것저것 챙긴 보따리를 손에 손에 들려 주시며 "또 오라"는 인사를 잊지 않으신다. 그러니 어찌 내 남편을 빌려 드리지 않을 수 있겠는가.
얼마 전에 아버님께서 종합건강진단을 받으셨다. 치아가 좋지 않으셔서 틀니를 해드렸는데 잘 맞지를 않아 치과에 다니시는 것 외에는 그다지 걱정이 되지는 않았는데, 연세가 연세인 만큼 은근히 걱정은 됐었다. 남편이 전화를 했다.
"여보, 아버지 건강 검진 결과 나왔어요."
"어떻게 나왔어요? 어디 불편한 데는 없으시데요?"
"허허허, 정상A 나왔어요."
"하하하 어머나 세상에, 젊은 나도 수술에다 오십견에다 허구헌 날 골골거리는데 감사하기도 하지, 그래 아버님 기분은 어떠신 것 같아요?"
그리고 며칠 후 시골에 내려갔다. 저녁 설겆이를 끝낸 뒤 거실에서 TV를 보며 이런저런 대화를 나누다가 나는 아버님께 감사하다는 말씀을 드렸다.
"아버님, 건강하셔서 참 다행이에요. 감사합니다."
"허허허 고맙냐? 걱정스럽지 않고?"
"아니 아버님 건강하신데 왜 걱정스러워요?"
"너무 오래 살아서 너희들 고생시킬까봐 그라제."
"에이 아버님, 벽에 똥칠만 하시지 말고 오래오래 사세요."
"허허허 고맙다. 내가 앞으로 10년은 더 살 것제?"
아버님과 나와의 대화는 늘상 이런 식이다. 글로 쓰니까 '아버님'이라고 하지 원래는 그냥 '아버지'라고 부르기 때문에 처음 보는 사람들은 친정 아버지인 줄로 안다. 나는 피곤할 때면 아버님과 대화 중에도 "아이 한 일도 없이 왜 이렇게 피곤하지" 하며 슬그머니 누워 버린다. 그러면 아버님께서는 "편하게 다리 펴" 하신다.
그런 고부를 바라보는 남편은 무척 행복해 한다. 그 행복해 하는 모습이 꼭 아이 같아서 나는 무엇이 그리 행복하냐고 물어보면 "아, 아버님 계시지, 마누라 있지, 딸 있지, 아들 있지, 땅 있지, 집 있지, 연금 나오지" 하며 "내 나이에 아버지 있는 사람 있으면 나와 보라 그래" 하고 으시댄다.
올해 91세이신 아버님께서 10년 후에도 건강 검진 '정상A'를 받아서 내 남편이 행복했으면 좋겠다.
"아버님! 제 남편 빌려 드릴테니 오래오래 만수무강하옵소서."